요즘 계속 드는 생각이 있다.
세상에 떠도는 대부분의 사유는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 하나의 명제가 단단하게 세워지는가 싶으면 곧 그것을 무너뜨리는 반대의 방향이 생기고, 둘은 끝내 깔끔하게 승부를 보지 못한 채 이상하게 접합된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정-반-합”이라고 배웠던 그 도식의 조악한 그림자를 닮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완벽한 변증법이 아니라 언제나 비뚤어진 변증법이다. 정은 반에 의해 파괴되지만, 반도 정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다. 결국 둘은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서로를 닮은 합을 낳는다. 그런데 그 합은 다시 하나의 정이 되어 또 다른 반을 부르고, 또 다른 애매한 합을 만든다. 인간의 정신사도, 사상사도, 개인의 인생도, 관계도 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나는 이 과정이 프렉탈과 닮아 있다고 느낀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맥처럼 보이던 것이 가까이 다가가면 또 작은 산들의 반복이고, 그 작은 산에 더 가까이 가면 또 더 작은 굴곡들의 반복인 것처럼, 인간의 생각도 같은 모양을 여러 스케일에서 반복한다. 시대 전체의 철학이 그러하고, 개인의 인생관이 그러하며, 하루 동안의 감정 변화도 그렇다. 거대한 사상적 충돌에서 보이는 패턴이 가족 안에서도 반복되고, 연애에서도 반복되고, 한 사람 안의 독백에서도 반복된다. 신과 인간의 문제, 국가와 개인의 문제, 자유와 질서의 문제, 욕망과 금기의 문제, 존재와 무의 문제는 결국 모양만 달라질 뿐 비슷한 구조를 공유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더 작은 스케일에서 다시 나타난 익숙한 무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진리를 하나의 답, 하나의 문장, 하나의 최종 결론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반대라고 느낀다. 진리란 “무엇이 맞는가”에 대한 최후의 대답이 아니라, “어떤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가”를 보는 능력에 가까운 것 같다. 즉 개별 명제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명제들이 생겨나는 방식과 서로 부딪히는 방식, 부딪힌 뒤 이상한 합으로 봉합되는 방식, 그리고 그 합이 다시 새로운 정이 되어 비슷한 패턴을 재생산하는 전체 흐름을 보는 것. 진리를 안다는 건 하나의 정답을 움켜쥐는 게 아니라, 생각의 생성 규칙을 보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프렉탈의 비유를 좋아한다.
프렉탈은 끝없이 반복되는데, 그 반복 속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 인간 사유도 비슷하다. 겉으로는 모두 다르고, 각자의 시대적 맥락과 문화와 언어와 욕망이 다르지만, 조금만 멀리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장면들이 반복된다. 인간은 계속 자유를 말하다가도 안전을 원하고, 질서를 세우다 다시 해체하고 싶어 하며, 의미를 찾다가도 의미를 의심하고, 초월을 갈망하다가도 구체적인 감각으로 돌아온다. 금욕을 말하다가 쾌락으로 기울고, 쾌락을 밀어붙이다가 파멸 앞에서 다시 절제를 부른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일한 구조 위를 미끄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프렉탈이 어디까지 있는지”를 가지고 싸우는 게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끝이 있는지, 없는지.
정말 모든 스케일에서 반복되는지.
어느 지점부터는 깨지는지.
이런 질문들은 중요해 보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끝내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파이의 소수점 아래가 영원히 반복되는지 아닌지를, 또는 소수의 분포 속에 완전한 규칙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인간이 끝없이 싸운다고 해서 숫자 자체가 바뀌진 않는다. 우리는 규칙을 감지할 수는 있어도 전체를 한 번에 쥘 수는 없다. 결국 어떤 지점에서는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포함해서 사고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프렉탈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끝없는 진영 싸움을 하는 것보다, 지금 눈앞에 드러나는 반복 패턴을 읽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건 절망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조금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끝내 모든 답을 소유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는 답을 가장한 폭력에서는 조금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최종 진리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위험해진다. 그때부터는 구조를 보는 게 아니라 결론으로 세상을 재단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거대한 구조의 일부이며, 더 큰 스케일과 더 작은 스케일에서 다시 비슷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섣부르게 단정하지 않게 된다. 확신은 줄어들지만 시야는 넓어진다. 결론은 흐려지지만 패턴은 선명해진다. 나는 그게 조금 더 성숙한 태도에 가깝다고 느낀다.
물론 이런 생각은 위험한 쪽으로도 흐를 수 있다.
모든 게 반복 구조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도 너무 작아 보일 수 있다. 인간관계의 문제도, 사회의 문제도, 종교의 문제도, 윤리의 문제도 결국 다 같은 무늬의 다른 스케일일 뿐이라면, 개별 사건의 무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구조만 보다 보면 삶의 살결이 사라진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패턴만 남고, 감정의 뜨거움이 아니라 도식의 차가움만 남는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로 떨어지고, 어떤 사람은 냉소로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가짜 초월감에 빠진다. 나도 가끔 그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그런데도 끝까지 보고 싶은 이유가 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어쩌면 이 세계를 진짜로 믿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답을 믿고 싶은 게 아니라, 적어도 이 모든 혼란과 반복과 모순이 무의미한 잡음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 같다. 인간의 역사, 종교, 과학, 사랑, 고통, 전쟁, 초월에 대한 갈망, 해탈에 대한 환상, 구원에 대한 상상 같은 것들이 완전히 제각각 흩어진 파편이 아니라, 어떤 생성 규칙 속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거대한 무늬라고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개별 인간은 길을 잃더라도, 전체 구조는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 느낌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내 감각은 점점 이렇게 바뀌고 있다.
진리는 하나의 문장이나 하나의 계시가 아니다.
그건 아마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비슷한 모양을 반복하며 태어나고, 왜 그 반복이 멈추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감각에 가까울 것이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정답인지, 어느 종교가 맞는지, 어느 철학이 더 우월한지를 판정하는 일은 그보다 하위의 싸움처럼 보인다. 더 큰 층위에서는 선과 악조차 서로를 먹으며 반복되고, 구원과 타락조차 비슷한 구조를 공유하고, 사랑과 집착조차 서로의 그림자가 된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이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경계가 왜 반복해서 생기고 무너지는지 보는 일이다.
우리는 어쩌면 끝없는 합의 존재들이다.
완전한 정도 아니고, 완전한 반도 아니다.
항상 어딘가에서 타협된 합으로 태어나지만, 그 합은 또 금방 낡고, 부정되고, 해체되며 다음 구조의 재료가 된다. 인간 하나하나도 그렇다. 어린 시절의 나를 부정하며 자라난 현재의 나는 또 미래의 나에게 부정될 것이다. 한때의 확신은 다음 시기의 무지가 되고, 한때의 진실은 나중의 좁은 시야가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정체성이 있다는 말도, 없다는 말도 둘 다 완전하진 않다. 정체성은 하나의 단단한 핵이 아니라 계속해서 임시 봉합되는 합에 더 가깝다. 그런데 그 임시성 때문에 오히려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걸 좋게도 나쁘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좋다고 말하면 낙관의 함정에 빠지고,
나쁘다고 말하면 허무의 함정에 빠진다.
그냥 이 구조가 있는 것 같다고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파이의 어느 자리처럼, 소수의 어느 지점처럼,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전체의 일부로 반복되고 있다. 스스로가 무엇을 반복하는지도 다 알지 못한 채, 그러나 아주 가끔은 자기 안에 새겨진 더 큰 무늬를 힐끗 보고 만다. 나는 아마 그 힐끗 보는 순간들이 좋다. 잠깐이라도 세계가 하나의 구조로 보이는 순간, 내가 겪은 사소한 혼란과 남들이 남긴 거대한 사유가 같은 무늬의 다른 스케일이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그럴 때 인간은 조금 덜 외롭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마 이 정도다.
프렉탈의 끝을 단정하지 않고,
반복되는 구조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개별 결론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그러나 흐름을 읽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진리는 완전히 쥘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가 스스로를 반복하는 방식은 어쩌면 조금씩 더 가까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정도면 아직은 충분하다.
물론 이 정도도 과한 생각일 수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과하다.
이런 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면 삶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구조를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사람 얼굴보다 패턴이 먼저 보이고, 감정보다 반복성이 먼저 보이며, 결국 살아가는 일보다 해석하는 일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생각은 늘 스스로를 갉아먹는 위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끝까지 보고 싶다.
정답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떤 무늬로 자신을 계속 다시 쓰는지,
그걸 한 번쯤은 더 멀리서 보고 싶어서.
굿굿
이걸 어케 1분만에 다읽는거야;;;
반갑습니다. 정말로.
곤란하네..
프렉탈 = 경계안의 반복 , 한정된 구조의 반복 , 경계라는 닝겐인식한계의 자연의 공리와 정의 , 비경계의 무한 구조의 자연 인식 이었다면 프렉탈 구조는 없음 , 프랑크 길이 압력 부피의 경계안의 자연인식한계 , 무한 분리는 물질계에서 불가능 , 분리의 임계점에서 물질세계 형성 , 동시성 속의 동시성 , 비국소성 속의 비국소성을 통한 제2의 엔트로피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