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이 본 것은 분명 있다. 인간 사회의 출발에는 선한 의지나 절대적 도덕률보다 먼저, 각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을 좇는 선택 구조가 있었을 것이다. 협력도, 거래도, 규칙도 처음부터 초월적 선의 명령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상호작용 속에서 점차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행인은 사회의 형성 원리를 보려 했고, 그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그는 이 원리를 오직 개인의 좁은 이익 수준에서만 붙들고, 그 상태로 사회 전체를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생성의 원리를 봤지만, 그것이 구조를 이루고 유지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까지는 충분히 밀고 가지 못했다.
반대로 철갤러가 본 것도 있다. 단기적이고 개체적인 이익만으로는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맞다. 신뢰, 제재, 반복된 상호작용, 장기적 안정성 같은 요소가 없으면 사회는 쉽게 붕괴한다. 오늘 당장 내게 유리한 선택이 언제나 전체 구조에도 유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갤러는 “이기심만으론 사회가 무너진다”는 식으로 반박했고, 유지 조건의 층에서는 그 말이 일정 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철갤러가 저지른 문제는, 이 유지 조건을 다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률로 끌어올리면서,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준인 것처럼 다뤘다는 점이다. 즉 결과를 원인처럼 놓아버린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논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기심”이냐 “도덕”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써야 할 단어는 “이기심”보다 “이익 추구”다. 이기심이라고 하면 이미 부정적이고 개체적인 뉘앙스가 너무 강하게 붙는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더 넓은 의미의 이익 추구다. 개인은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그 상호작용 속에서 집단 차원의 이익 구조가 형성되며, 더 발전하면 국가나 인류 같은 더 큰 단위의 이익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도 사실은 이런 확장된 이익 구조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도덕은 이익의 반대가 아니라, 범위가 확장되고 구조화된 이익의 한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서로에게 좋은 이익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이 말은 틀렸다고 하긴 어렵다. 다만 이것도 이미 발전된 사회 구조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반복된 상호작용, 신뢰, 제재, 규칙, 장기 전망 같은 장치들이 어느 정도 형성된 이후에야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는, 협력적 이익은 언제든 쉽게 붕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도덕은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 구조가 성립된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다. 이 점을 생략하고 도덕을 처음부터 본질처럼 두면, 형성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내가 특히 경계하는 건, 도덕을 본질로 두고 생각하는 태도다. 사실 나는 도덕을 완전히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도덕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실제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본질로 놓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왜 그런 규범이 필요한가”,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형성되었는가”, “구조가 바뀌면 이것도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같은 질문이 금기시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검증과 수정이 멈추고, 결국 더 큰 비용을 치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고착 상태가 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도덕을 본질로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껴왔다. 물론 냉정히 말하면, 사람들이 도덕을 본질처럼 여기든 말든 결국 어느 순간 “이게 맞나?”라는 의문은 생기고, 사회는 바뀔 수 있다. 문제는 변화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변화 비용이다. 도덕을 절대적인 것으로 둘수록,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정신적 비용은 훨씬 커진다. 그러니까 핵심은 “바뀔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쉽게 조정 가능한 구조로 두느냐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인간은 본능적으로 결국 해결한다”는 식의 낙관이다. 이건 내가 특히 위험하게 보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결국 자정작용이 자동으로 보장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 지배종이 되면서,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제거되던 메커니즘이 약화되었다. 과거에는 행동과 결과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오류가 생기면 그 오류를 한 개체나 집단이 빠르게 대가로 지불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지연되거나, 다른 세대나 다른 지역, 다른 종에게 전가될 수 있다. 즉 필터가 사라진 게 아니라, 필터가 작동하던 조건이 무너진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본능적 자정에만 기대는 사고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궁구하고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바탕으로 보면, 행인이 본 것은 본질의 한 부분이 맞다. 사회는 이익 추구 속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그것을 개인 단위의 좁은 이익으로만 붙잡고 전체를 설명하려 하다 보니, 유지 조건과 구조 형성을 놓쳤다. 반대로 철갤러는 유지 조건을 봤지만, 그 조건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 채, 도덕을 절대적 기준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그래서 둘 다 절반만 맞았고, 바로 그 절반짜리 진실 때문에 논쟁에서 엇갈린 것이다.
내 입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거다.
사회는 이익 추구 속에서 형성되며, 그 이익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구조가 재조정되면서 지속된다.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재조정된 구조가 안정화된 결과이지,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본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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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보편적 도덕 혹은 선악구분은 국소적일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상대성을 이야기 함.
뭐가 더 중요한가의 가치를 따지게 된다면 상대적이 될수밖에 없긴 한데 문제는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인간이고 인간의 공통적인 특성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느냐는거지 일단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것 자체가 끔찍하게 힘들고 어렵고 건방지고 재수없는 행위인데다가 노답인데 상대적으로 보자는 건 그냥 포기하겠다는것과 다름없음 뭔가 기준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