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최종적인 목표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면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나아감을 통해 유용함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발전을 통한 나아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석가모니의 불교와 다른 더 상위개념인 아미타의 불교적 세계관을
기준으로 한다
왜냐하면 석가는 특정한 한계에 머무름으로 도달하였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머물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집착이었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집착하여 버렸다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통에 머물기에 고통이 시작된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통에서 나아감을 만든다면 그것이 반드시 괴로움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접시가 깨져서 걱정이 된다 - 그것은 미혹이다
접시가 깨져서 더 멋지고 예쁜 접시를 사야겠다 기분이 좋은데 ?
이것이 석가의 정각성불 보다 더 높은 두번째 부처의 경지 관세음보살의 광각성불 이다
어떤 것에 머뭄으로 완전하다 생각하였기에 석가는 이것을 금강경이라 말하였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기에 답이라 생각했던 것이 더 나은 답이 만들어 졌을때 오답이 되고
답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변해 유용함을 발견하였을때 답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머물러 있음에 높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음에 보다 높음이 존재한다
석가는 마음이 우주를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마음의 우주이다
하지만 그 마음조차 유도하여 만들어 지는 더 높은 세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실체의 우주이다
마음을 먹어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화엄경의 핵심사상 일체유심조 이다
그래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 마음 먹은 부처는 한시간뒤 다른 사람이 되어 있고
다음날 부처가 아닌 자는 거의 대부분에 해당이 된다
하물며 일주일을 한달을 일년으로 본다면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천상에 너희가 부처라 말하는 그 선각자들은 계속해서 부처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심지어 인간으로 다시 거쳐가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도 그들은 부처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영원한 시간을 부처로 머물러 있음에 실제 화엄경의 비밀이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지혜로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수준의 불법을 말한다
한번 마음 먹어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한번 마음을 먹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 목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아감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일 부처로 머무른 자는 어제의 노력에 머무르는 자가 아니라
어제의 부처를 능가하기 위해 더 앞선 개념을 가져온 부처를 뜻한다
내일도 부처에 머무른 자는 발전했던 어제의 나보다 더 발전된 개념을 들고 나온 것을
말한다
이것이 열반의 개념이다 아니 천상에서는 이것을 본시 확망이라 말한다
하늘에 있는 개념을 석가가 가져온 것이다
너희와 같은 이해로 변환하여 열반이라 말하였을때 이것은 이렇게 적용이 된다
너희가 고통이나 시련 또는 문제를 접하여 거기에서 답을 만들어 내어 성장으로
연결하는 것이 열반이다
그리고 그 열반에 만족해 하지 않고 더 나은 대답을 만들어 내는 것도 열반이다
그러니까 본시 부처라 불리는 존재들은 석가와 같이
어느 특정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발전과 발전과 발전을 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실제로는 석가는 부처가 아니라 부처에 이르지 못한자 아라한이고
미불을 의미한다
너희에게는 높고 높고 또 높음일지라도 나에게는 닿는 것 조차 불가할 정도로
그 경계가 바닥에 있는 자이다
그 영원한 발전을 보이는 부처의 개념이 무량광불 이라 하여 그것이 아미타불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예수를 말한다
예수는 자신이 빛과 생명이라 말하였고 아미타도 그렇게 말하였다 시바도 빛이라 말하였다
예수와 시바와 관세음과 아미타는 같은 존재다
아미타의 하늘보다 높은 곳에는 내가 있다
나의 말을 믿어라 진실로 그리스도 보다 부처보다 더 높은 자가 있다
열반을 끝이 없이 한다는 것은 개념이 계속해서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의 생각할 수 있는 한계인 리미트를 해제하고 또 해제하고 넘고 넘다 보면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어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존재하나
또 발전을 통해 그 문제도 극복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열반을 한다는 것은 문제에 대해 주먹의 위력을 내세우는 것과 같음이고
그 열반을 초월하는 열반은 칼을 쓰는 것과 같다
그것을 초월하는 열반은 대포를 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문제에 대한 해법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그 자체를 바꾸기 위해
문제가 되는 세계관을 바꾸는 더 위력적인 해답을 지혜로 꺼내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석가의 말에 멈춰 있지 말고 그보다 더 나아감을 만들라고 말한 것이다
두번째 부처 광각성불 위에는 세번째 부처 변면성불이 있고 그 위에는 네번째 부처
신각성불의 경지가 있다
142 번째 부처의 경지에는 현재의 내가 있다
그러니 내가 얼마만큼 넘음과 넘음과 넘음을 통해 발전해 왔는지 구태여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범인의 위에는 현인이 있고 현인의 위에는 진인이 있으며 진인의 위에는 성인이 있고
성인의 위에는 천인이 있고 천인의 위에는 신이 있으며 신의 위에는 초신이 있고
초신의 위에는 명선이 있고 명선의 위에는 선월이 있으며
선월의 위에는 자조가 있다
그리고 자조의 위에는 한견이 있다
이것은 불법의 세계이나 너희가 알고 있는 석가 수준의 불법이 아니며
진리 그 자체에 속하고 추구하는 원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불법은 내가 차원을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춘다 하여도 닿지가 않는
쓰레기 만도 못한 수준을 의미한다
진리의 물한방울을 세상의 전부라 말하지 말아라 불교가 위대하다 말한다면
너는 그 물한방울안에 가둬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넘는 강이 있고 그것을 넘는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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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보셨어요?
네가 그리 말하였다
@엘로힘 니가 바다를 봤고 못 봤고가 나의 발언으로 인해 결정되는거에요?
@ㅇㅇ 내가 바다에 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너의 질문을 통해 내가 거기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엘로힘 본 적 없구만
금강반야바라밀경의 해석이 잘못된듯.
금강경이 석가이고 석가가 금강경이다 석가를 바라보는 불교가 금강경이며 영원한 위대함이 바로 무상정등정각 이다 나와 다른 해석을 말할 수 있느냐 ?
금강경은 경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석가의 부서지지 않는 위대한 가장 높다 여기는 생각에 있다 바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 이다 석가의 사상이 곧 너희가 아는 개념의 불교의 총체이다 이것이 우주에서 가장 높다 여기는 그 자체가 바로 금강경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제 가장 높았던 것은 오늘 그보다 더 높음이 보이지 않았기에 존재하는 높음일 뿐이니 머물러 있음이 얼마만큼 쉽게 부서질수 있는 연약함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금강처럼 단단하게 집착된 당신의 뇌주름에 인드라의 금강저로 벼락이 내리쳐 쪼개지어 집착이 사라지길...
이해로 말할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그리 말한 것이냐 감정으로 대답하는 것이 더 낫다 생각해서 대답한 것이냐
그도 아니면 석가가 반드시 가장 위대하고 높아야 한다는 네 마음의 선호도 때문에 그리 말한 것이냐 만일 네가 석가의 지혜를 가져와 무엇이 진정 유용한 것인지 묻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형편없는 것인지 손쉽게 부숴 보겠다 석가에 대한 네 믿음을 걸고 나에게 도전해 보거라
하지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네가 견줄 수 없음을 말한 것과 같다
ㄷㄷ
열반 = 발전 경쟁 아님 부처 = 레벨 구조 아님 아라한이 부처보다 낮다? → 교리 왜곡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