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들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했다. 미적분법의 발견으로 수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지만


수학의 정의들 중 엄밀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 수학의 엄밀성을 갖추기 위한 도구로서 집합론이 거론되었다.


곧 수학자들은 모순 없고 엄밀한 수학을 집합론을 통해 재구성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한 희망은 러셀의 역리로 인해 위협을 받게 되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인해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원리’에서는 제시된 체계에 대해,


‘이 체계가 무모순적이라면, 이 체계는 불완전하다’는 초수학적 명제를 얻었다.


그런데 만약 위의 명제가 참이라면 그 대우인 ‘이 체계가 완전하다면 이 체계는 모순적이다.’도 참이 된다.


그리고 전통적인 논리학에 기본 원리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 있다.


동일률은 'A는 A이다'와 같이 어떤 것도 자기 자신과는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순율은 '어떤 것에도 그것과 어긋나는 것이 속할 수는 없고 또한 서로 어긋나는 성질이 함께 어떤 것에 속할 수는 없다.'와 같이 정의된다.


그런데 이때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착하면서 나쁘다.'와 같은 표현이 만약 한 관점에서 말해졌다면 모순이지만


서로 다른 관점(기준)에서 말해진 것으로 이해될 때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순의 규칙의 준수 여부는 문맥의 의미상 달라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배중률은 중간 혹은 제 3자는 배제된다는 원칙이다. 즉, 모순관계에 있는 두 생각이 모두 틀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맞다와 틀리다는 명제이며 모순관계에 있는 말이므로 어떤 명제도 참과 거짓 중 한 가지에 반드시 포함된 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세 가지 원리들은 모두 모순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기본 원칙인 것이다.


그런데 위의 형식논리의 원칙들로 증명된 것들은 항상 참인 항진명제와 같이 동어반복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A는 A이다'와 같은 명제처럼 어떤 가능한 사태와 어떤 불가능한 사태와도 모순되지 않기에


동어반복과 같은 명제는 사실상 현실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


즉, 이런 형식논리는 어떤 문(文 또는 명제)이 주어지고 그것이 바른지 어떤지의 여부를 논할 때에


그 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형(形)만으로 진위를 판단하는 논리이기에 정적이며 변화(운동)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

그런데 형식논리와는 다르게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변증법의 기본적인 구조는 정(正)과 반대되는 반(反)의 갈등을 통해 정과 반이 모두 배제되어 합(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합은 또 다시 모순적 면모를 지닐 수밖에 없으므로 합'은 다시 '정'이 된다.


변증법에서는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다 보면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모순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이한 형식논리와 변증법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통합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변증법에서의 정을 +n로 반을 -n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정과 반의 합은 항상 0이 되는데


이를 통해 (1, -1), (2, -2), (3, -3)... (∞, -∞)과 같은 변화가 설명되고 결국 이는 '0은 항상 0이다'의 동일률과 같다.


즉, (1-1=2-2=3-3...∞-∞=0)인 것이다. 즉, 존재나 변화에 모순을 인정한다면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나 변화는 곧 현상적인 것이며 그 안에 모순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물리적으로도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주가 동일률을 따르면서도 변증법적이라면 우주적 진리가 형이상학적인 것들과 형이하학적인 것들 사이의


구조적 과정에서 변하더라도 항상 0이기에 동일률과 같이 우주는 항상 진리임이 설명된다.


진리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논리적으로 진리임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이 체계(우주)가 완전하다면 이 체계는 모순적이다.’ 인 것이다.




변화가 연속일 경우 빛의 절대속도는 매우 이상한 현상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 발생하면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하죠.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에는


호기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에까지


호기심을 가졌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호기심이란 결국 왜를 묻는 행위이죠. 그런데 그 현상에 대해서 설명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물리학자들은 왜 빛이 절대속도인지조차 생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그러하니 왜 그런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고 말이죠. 그러나 옳은 자세란 자연(현상)이 그러하다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왜인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리고 결국 빛이 절대속도인 이유는 미시나 거시의 구분이 따로 필요없이 입자나 질량체의 변화가 불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속도에는 상대속도와 절대속도가 있습니다. 광속이 절대속도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광속도 상대속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죠.


사실 광속이 상대속도여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제 속도가 10m/s이고 당신의 속도가 20m/s라면 제 기준으로 당신의


상대속도는 10m/s인게 당연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빛의 속도는 당신에게나 저에게나 똑같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속도가 29만km/s라고 해도


당신이 관측한 빛의 속도는, 10m/s로 이동하는 제가 관측한 빛의 속도와 같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빛의 절대속도가 정말 이상한 현상일까요?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빛의 절대속도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변화가 연속이어야 한다는 인간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즉, 빛의 절대속도가 이상한게 아니라 인간의 변화가 연속이어야 한다는 그 고정관념이 이상한겁니다.


변화가 불연속이면 빛의 절대속도는 매우 당연한 현상이 되고 말이죠.


예를 들어 어떤 물체가 120분의 1초당 1cm씩 불연속 변위할 때 그와 동시에 다른 물체가 2cm씩 불연속 변위한다고 해보죠.


변화가 불연속인 것을 느끼지 못할 경우 인간이 보기엔 마치 두 물체의 속도가 다른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매 순간 두 물체는 정지해 있을 뿐입니다. 실질적인 예로는 디지털 영상이 있습니다. 또 디지털 게임의 캐릭터들을 변위를 생각해보세요.


결국 변화가 연속일 경우 빛의 절대속도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되지만 변화가 불연속일 경우 빛의 절대속도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면


변화가 불연속인 것이 현상적으로 옳다는 것이죠. 결국 양자역학을 물리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광속이 왜 절대속도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반복하자면 옳은 자세란 자연(현상)이 그러하다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왜인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는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