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재물로 삼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
1. 위선과 기만의 문화, ‘한국식 겸손’
한국 사회에서 '겸손'은 언어적 의무이자 인간관계의 일종의 매너 코드로 통용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수십 년지기 친구에게도,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런데 그 겸손이라는 것이 과연 진짜 '자기를 낮추는 행위'인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고도로 발달된 자기 과시의 형식이고, 타인을 도구로 삼는 일종의 ‘비교 전술’이며, 말하자면 정제된 폭력이다.
'내가 별로라서'라고 시작하는 말들이, 정작 그 ‘별로’라는 기준이 나에게는 엄청난 상대 우위로 작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집은 별로 넓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초라한 집을 떠올리며 기가 죽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집은 강남 한복판, 50억짜리 아파트였다. 그 말을 꺼낸 사람은 겸손한 척했지만, 나는 그 겸손 속에서 철저하게 비교당하고 있었고, 나 자신이 무언가 열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강제로 각인당하고 있었다.
겸손은 그렇게, 가장 정교한 계급 표시 도구가 된다. 그것은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지 않고도 상대를 배제하고 서열을 매기는 수단이다.
2. 겸손을 가장한 폭력의 기술
‘내가 주식을 너무 못해서 요즘 망했어.’
그 한마디에 진심으로 위로한 적 있다. “요즘 다 그래… 힘들지?”라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예수금이 20억이었다. 주식으로 날린 게 1억이었단다. 나는 수천만 원을 쏟아붓고 정말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는 중이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산의 어마어마함을 간접적으로 흘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 요즘 살이 너무 쪄서 미치겠어.’
그래서 다이어트 얘기로 공감해주면, 막상 들어보면 40kg. 나는 58kg.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그 말은 내가 내 몸을 부끄럽게 느끼도록 만든다. '너는 살이 진짜 찐 거야'라는 말을 정면으로 하지 않지만, 그 메시지는 겸손이라는 옷을 입고 조용히 내 안에 박힌다.
‘우리 남편 그냥 회사 다녀.’ 그런데 회사가 구글 본사.
‘나 키 작아, 167밖에 안 돼.’ 그런데 나는 158.
‘우리 오빠 키도 작아, 180 정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스스로를 작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우위를 감추고, 듣는 이를 교묘하게 눌러 앉히는 방식으로 겸손을 활용한다.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포장할수록, 듣는 나는 더더욱 위축되고 열등감을 느낀다. 이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교묘한 위협'이다. 상대를 쳐내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무기력하게 만들며 무너뜨리는 심리적 도식.
3. 나를 ‘재물’로 삼은 사람들
내가 어릴 때 겪었던 어떤 엄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친구의 엄마는 나를 늘 ‘자랑의 보조 수단’으로 썼다. 내가 산수 시험에서 80점을 맞았을 때, 그 아줌마는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얘가 산수를 그렇게 잘해요! 이번에 80점 맞았대요!”
그 말을 들으면 얼핏 나를 칭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 말을 통해 자기 아들을 더 부각시키는 장치를 만든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은 산수 90점이었으니까. 나는 80점을 자랑스러워해야 했고, 그녀는 자기 아들의 90점을 “아유, 걔는 산수 잘 못해요”라고 말하면서, 내 앞에서 겸손한 척했다. 하지만 실은 그 겸손이, 내 성취를 끌어내려서 자기 자식을 더 부각시키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 엄마에게 무의식적으로 ‘재물’이었다. 아들의 우월함을 조명하기 위해 필요한 비교 대상. 아들이 빛나기 위해 필요한 어둠. 내가 받았던 칭찬은 결국, 그 아들이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음일 뿐이었다.
4. 대물림되는 기만의 유산: 그 아들과의 이야기
그 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나를 ‘알리바이’로 썼다.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들어간 날이면 “오늘은 걔랑 마셨어서 그래요”라고 변명했다. 나는 하루 일과 끝에 겨우 잠깐 얼굴을 비춘 것뿐인데, 그 하루의 타락 전부를 내 탓으로 만든다. 실상은 그는 매일같이 술에 쩔어 살았고, 나는 어쩌다 한 번 마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엄마는 “걔 만나면 애가 꼭 그 모양이 돼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원인’이 되었고, 그 아들의 일탈을 정당화하는 책임 분산 장치로 전락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평생 이용당했다. ‘나쁜 영향’의 주체로, ‘무능한 친구’로, ‘낮은 기준’으로, 그리고 ‘덜 예쁜 비교 대상’으로.
5. 겸손이라는 말에 붙은 사회적 가스라이팅
겸손이란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말하지 말라’는 강요로 바뀌었다. 내가 무언가 억울하다고 말하면 “그걸 왜 그렇게 크게 생각하냐”고 했고, 내가 어떤 성취를 자랑하면 “겸손 좀 해”라며 타박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겸손한 척 하면서 가장 잔인하게 자랑하고, 비교하고, 나를 조용히 짓밟았다.
이건 단순한 말버릇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허용된 폭력의 언어다.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문화적 통제 장치다. 너는 화내지 마라. 너는 말하지 마라. 너는 상처받아도 참아라. 이게 한국식 겸손이 말하는 메시지였다.
6. 결론: 나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나는 당신들 자식의 들러리가 아니고, 당신 남편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지를 돋보이게 만드는 장식도 아니고, 당신 몸무게 40kg의 상대 비교군도 아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내가 느끼는 상처는 정당하다.
겸손이라는 이름 아래 날조된 모든 기억들을 나는 이제 나의 서사로 되돌린다. 나는 비교 대상이 아니고, 누군가의 우월함을 설명하기 위한 ‘대비물’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구도, 재물도, 배경음도 아니다.
나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런 위선의 언어를 끝까지 파헤치고, 거기에 담긴 기만을 드러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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