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를 손에 꼭 쥐고 울다가 지쳐서 또 바닥에서 잠들었어. 잠결에 계속 곽이사를 찾는데 넓은 집에는 혼자 덩그러니 누운 후순이밖에 없었어.
바닥에서 자는 건 꽤나 불편한 일이야. 도우미 아주머니가 깨워서 다시 일어나니 허리가 꽤 아팠어. 어제오늘 너무 울었나봐. 눈이 퉁퉁 부어서 제대로 눈 뜨기도 힘들었지. 욕실로 들어가서 찬물에 얼굴을 씻는데 눈에 닿는 찬물의 느낌이 꽤 좋았어. 퉁퉁 부운 눈에 딱 좋은 온도였지. 어제 술먹어서 그런지 피부가 푸석해졌어. 술말고도 속상한 일이 있었으니까.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였지. 후순이는 아주머니한테 시원한 콩나물국을 부탁해. 아주머니는 군말없이 들어줬어. 집에 오자마자 후순이가 바닥에서 잠들어 있더니 부엌으로 가니 식탁에 널브러진 캔들이 잔뜩 있는 거야. 네 캔은 비워져있었고, 다른 캔들은 따지도 않은 채 있었지. 보아하니 요즘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봐. 도우미 아주머니는 뭘 물어보고 싶은데 이쪽에선 뭘 물어보면 바로 잘릴지도 몰라. 그냥 후순이가 원하는대로 말없이 콩나물국을 끓여주기로 해.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후순이는 씻었어. 씻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까했거든. 그런데 씻어도 별 차이는 없었어. 후순이 속만 더 썩어들어갔지. 다 씻고 나오니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나 있었어. 누구지? 잠금화면을 해제하니 대학동기인 게이의 번호가 찍혀있었지. 얘가 무슨 일이지? 후순이는 동기한테 전화를 걸었어.
-여보세요?
[후순아!]
오랜만에 통화하는 동기의 목소리는 꽤나 밝았지. 너 요즘 괜찮냐부터 시작한 통화는 처음엔 무거웠지만 점점 갈수록 이십대가 가진 그 특유의 발랄함으로 번져갔어.
[후순아, 오랜만에 한 번 만나야지.]
-어? 어 그럴까…?
[너무 집에만 있으면 더 우울해져. 밖에 돌아다녀야 상처도 아무는 거야. 내일 붕붕이도 나오는데. 어때?]
-어…그래. 그럼 나도 갈게.
[사모님, 오실 때 우리 기 안죽게 우리랑 비슷한 옷 입고와야돼요. 우린 아직 학생이야.]
꺄르륵 웃는 동기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를 끊었어. 내가 너무 집에만 있나봐. 후순이는 옷장을 뒤져 내일 입고 갈 옷들을 골랐지.
다음날, 후순이는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났어. 다들 서로 반갑다고 꺄꺄거렸지. 결혼해서 중간에 자퇴한 후순이와 달리 동기들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 맛집 알아놨다고 후순이를 끌고 가더니 잔뜩 주문시켰어. 먹자! sns에 올릴 사진들을 찍고 나선 먹기 시작했지. 솔직히 후순이는 먹는게 입에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곽이사 생각을 안할려고 노력했지. 애들 얘기에 맞장구 쳐주다가 누구는 잘지내고 있냐, 누구는 취업했다더라에서 후순이는 말문이 턱턱 막혔어. 점점 갈수록 동기들의 대화에서 후순이는 멀어지는 느낌이였거든. 이번 자격증 시험 떨어졌다부터 과제얘기, 졸업논문, 졸업사진…등등 얘길하는데 후순이는 너무 먼 얘기야. 작년에 결혼하고 나서는 자퇴서 던지고 학교에 관심가진 적이 없거든. 정확히 말하면 가질 수 없는 거였지만. 점점 후순이의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둘은 신경 안쓰나봐. 계속 서로 뭐가 그리 신났는지 꺄르륵 거리기만 했지. 붕붕이도, 게이도 후순이를 신경쓰지 못했어. 후순이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그냥 그릇만 달그락 거렸지.
후순아 너 왜그래. 그제서야 게이가 후순이한테 관심을 가져줬어. 아, 아니야. 그 말에 둘은 다시 또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어갔어. 후순이는 눈물이 돌 거 같았어. 어떻게 친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도 이리 외롭지? 외로우니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했던 사흘간 힘들었던 일들, 빛도 못본 아기까지 생각났지. 깔깔거리는 둘의 대화에 후순이는 화가 나기까지 했어. 이럴거면 왜불렀는데. 그래도 후순이는 계속 참았지. 삼십분이 넘도록 둘은 후순이를 신경쓰지 않았어. 후순이는 더이상 못견디겠어. 드르륵. 그제서야 둘이 대화를 멈춰. 후순이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얘기했지.
-나 이만 가볼게.
-야, 후순아. 우리 괜찮은 카페도 알아놨어. 이거먹고 가자. 방금 우리 늘교수님 얘기했는데…
-너네 나 왜불렀어?
-어?
-너네 나 왜불렀냐고!
후순이가 소리치자 가게 내의 모든 시선이 후순이의 테이블로 쏠렸어. 야 후순아, 왜그래. 붕붕이와 게이가 후순이의 팔에 손을 얹자 후순이가 팔을 쳐냈어.
-너네만 대화할 거면 날 부르지 말았어야지! 너네끼리만 만났으면 됐잖아!
-아니, 후순아 그게 아니고…
-내가 니네 들러리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나는 공기취급해도 되는 사람이니?
-후순아 미안해…우리가 너무 너한테 신경을 못…
-됐어. 나 갈래.
후순이는 지갑에서 지폐 세 장정도를 꺼내곤 가게를 나갔어. 후순아, 후순아! 뒤에서 붕붕이와 게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후순이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달려갔지.
-나쁜 기지배들…진짜 나빴어…
평일 공원에는 사람이 적었어. 점심시간도 훌쩍 지난 시간이라 소화시킬 겸 산책하는 직장인들도 적었지. 후순이는 공원 벤치에서 혼자 서럽게 끅끅 거렸어. 요새 눈물샘을 잠그는 꼭지가 고장났나봐. 눈물이 계속 터져나와. 오늘 붕붕이랑 게이 만난다고 숟가락까지 얼려서 붓기도 뺐는데. 괜히 그랬나봐. 이렇게 울거면 그냥 나오지 말껄.
우는 후순이 옆에 비둘기들이 점점 몰려들었어. 흐끅거리는 후순이 앞에 비둘기들이 자리를 잡더니 신기하게도 하트모양으로 앉았지. 후순이는 그 광경이 신기해서 우는 것도 잊고 비둘기들을 봤지. 더 신기한 건 비둘기들이 아주 새하얀 아이들만 있었어. 예뻐라. 후순이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걸렸지.
-예쁜 아가씨가 왜그리 울었누.
후순이 옆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맑은 목소리가 들렸어. 후순이가 고개를 돌려보니 왠걸. 대체 어느 시대 옷인지 분명히 청조보다 더 오래된, 아니 청조도 아니야. 삼국지에 나올법한 옷을 입고있는 미남이 서있었어. 새하얀 옷에 머리에 관을 올렸는데 어째, 얼굴이 꼭 곽이사를 닮았어. 오빠…? 후순이가 놀라 물었지.
-아가씨. 내가 꽤 젊어보인다지만, 이래뵈도 부인이 있다오.
-아, 아니, 그게 저…저희 남편이랑 쏙 빼닮으셔서요.
-세상에 닮은 사람 셋정도는 있는거지.
얼굴은 젊은데 하는 말투는 꽤나 오래산 사람처럼 말해. 후순이는 신기했어. 곽이사랑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을줄이야. 오빠한테 말해줘야지. 그 순간 후순이는 놀랐어. 그리고 다시 눈물이 고였지.
-아가씨, 슬픈일 있으면 울어요. 슬플 때 우는 건 결코 약한게 아니에요.
그 말에 후순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어. 곽이사를 쏙 빼닮은 사람은 후순이가 우는 동안 소매에서 모이를 꺼내 비둘기들한테 던져줬지. 몇십분쯤 지났을까, 후순이의 눈물이 멎었어.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후순이한테 손수건을 건내. 감사합니다. 받아든 손수건은 꽤나 옛스런 무늬가 새겨져있었지. 이거 설마 자수놓은 건가? 후순이는 받아든 손수건에 차마 코를 풀기 그랬어. 너무 예쁜 무늬였거든. 남자는 괜찮다그랬어. 후순이는 그 말에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곤 코를 킁하고 풀었지.
-젊은 아가씨가 뭐때문에 우는 지 모르겠지만…아가씨를 울린 게 사람이라면, 아가씨, 절대로 날 상처준 사람때문에 울지마요. 그 치들은 절대 아가씨가 얼마나 슬픈지 관심없어. 아가씨는 그냥 자기 사는 대로 살면 돼. 그런 이들때문에 울면 이리 예쁜 아가씨가 너무 아깝잖수.
후순이를 달래는 말이 참 깊이있는 말이였어. 감사합니다. 후순이는 남자의 말에 적지않은 위로를 받았지. 남자가 후순이한테 모이를 건내줬어. 한 번 저 놈들한테 뿌려봐요. 후순이가 모이를 비둘기들한테 뿌리니까 비둘기들이 파드득 날개짓을 하다가 모이를 받아먹었어. 남자가 손을 한 번 튕기자 비둘기들이 저 멀리 날아갔지. 그리곤 다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알록달록 예쁜 꽃들을 물어와 후순이의 무릎에 얹어줬어. 와아! 후순이가 처음보는 꽃들도 많았지. 다시 남자가 손을 한 번 튕기니까 비둘기들은 꽃을 그만 가져오고 바닥에 뿌려진 모이들을 먹기 시작했어.
-와, 저 이런 꽃들 처음봐요.
-저놈들한테 아가씨닮은 꽃들 가져오랬더니 예쁜 것들만 가져왔네.
남자는 기뻐하는 후순이를 흐뭇하게 바라봤어. 후순이는 남자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 감사합니다. 후순이가 일어나 구십도로 인사를 했지. 아, 저 이 손수건! 남자가 일어나 가려는 듯하자 후순이가 빌린 손수건을 내밀었어. 남자는 후순이를 보며 싱긋 웃었지.
-아가씨, 그 손수건은 가지고 있으세요.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때 돌려주어.
-그래도…
-나중에 또 만나게 될거요.
남자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저 멀리 걸어갔어. 신기한 사람이다. 후순이는 비둘기들이 가져다 준 꽃들을 잔뜩 안고 집으로 향했어.
집에 돌아왔어. 도우미 아주머니는 후순이가 가득 안고온 꽃들을 보고 놀랬지. 사모님, 이런 꽃들은 다 어디서 가져오신 거에요? 후순이는 헤헤 웃으며 누가 줬다고만 말했어. 아주머니는 유리병들을 곱게 씻어 꽃들을 꽂아줬지. 요즘 칙칙했던 집안이 밝아진 기분이였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주머니가 퇴근하실 시간이였지. 아주머니는 내일뵙겠다며 퇴근하셨어. 후순이는 핸드폰을 꺼냈지. 내가 붕붕이랑 게이한테 너무 예민했나봐.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문자가 한 통 와있었지. 발신인은 곽이사였어. 오늘도 외박한다는 소리겠지. 후순이가 잠금해제를 하자 문자내용이 보였어.
[우리 이제 끝내자.]
후순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어.
-곽건화 이 나쁜 새끼야!!
후순이는 집이 떠나가라 소리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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