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글이 몇개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옛날 글 올려봅니다ㅎ


  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이다. 즉 길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다. 대개 우리 여정의 종착지는 길 밖의, 혹은 길 옆의 어떤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길 밖에 혹은 길 옆에 있는 우리의 목적지 안에도 항상 길이 있다. 모든 건물에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길이 있고 강에는 물길이 바다에는 뱃길이 있다.

  우리가 목적한 곳은 길이 아니지만 우리가 목적한 어느 곳에도 길은 있는 셈이다. 노자가 ‘道’라는 단어를 사용한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길의 이러한 속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자가 첫 구절부터 道可道非常道를 전제한 것은 그만큼 언어의 한계를 경계하자는 취지일 테다. 체계의 구조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언어. 노자는 이 반쪽짜리 도구들의 항목을 훑다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道를 뽑아 들었다. 역시 그만한 저작물을 생산해낸 능력만큼이나 빛나는 재치 아닌가. 길이 최종 목적지가 아닌 것처럼 道라는 단어는 의미의 종착역이 될 수 없다. 언어, 즉 기호는 체계의 구조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데 반해 그 지시대상인 자연은 체계가 구획해 놓은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고 경계선 자체가 되거나 여러 구획에 걸쳐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는 등 신출귀몰한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여 노자는 도를 가리켜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확정하지 않고 ‘저기에 있는 것 같다’라든가 ‘현묘할 뿐이다’라고 모호하게 서술하는 데서 그친다. 대개의 사람들은 언어의 가시성(可視性)에 눈이 부셔 손가락 저 편의 달까지 시야가 닿지 못하는데, 가시적 언어 말고는 시공을 초월해 소통할 도구가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즉 확정해 서술하는 순간 언어의 가시성이 내뿜는 강한 빛에 달은 가려지고 우리의 의식은 손가락 끝을 벗어나기 힘들어지기에, 차라리 눈의 초점을 풀고 손가락도 달도 아닌 어느 곳을 흐릿하게 응시할 것을 주문하는 셈이다.         

  한편 길이 목적지가 아님에도 목적지의 구성요소로 항상 자리하는 것처럼 道는 우리 앎의 여정이 가는 곳 어디에나 깃들어 있다. 그러하지 않다면 만물의 이치일 수가 없잖은가. 이때 노자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점, 도란 존재자가 아님을 일깨운다. 길이 목적지가 아니듯 도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그것은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형체도 없고 어떤 실질적 쓰임도 없는 것이라야만 한단다.   

  물을 담은 그릇은 물을 담고 있는 쓰임을 얻는다. 이때 이 그릇은 ‘물을 담는 용기’라는 의미를 부여받아 체계의 구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채 박제되고 만다. 박제되었기에 만물의 들판을 거닐 수가 없다. 결국 이 쓰임을 얻은 그릇은 물 이외의 어떤 것도 더 이상 담을 자리가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만물을 능히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가능성이 소멸되어버린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물의 이치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만물의 어느 형상도 어느 쓰임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길이 목적지가 아님은 도의 비어 있음(쓰임이 없음)과, 그럼에도 목적지마다 저마다의 길이 있음은 도가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빈자리를 가진 것, 그리하여 능히 만물에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연상관계로 볼 수 있다. 또한 길은 목적지가 아니므로 쓰임이 없고 쓰임이 없음으로 해서 한 자리에 박제되지 않으며 그로 말미암아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물론 길이라는 것이 만물의 근원이나 궁극의 진리를 상징할 수는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지시대상은 나름의 쓰임을 부여받아 현상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 뿐이고, ‘길(道)’이라는 기호가 구조의 체계에 속박되어 있음은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道는 노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어떤 것(혹은 현상)의 보조관념일 뿐이다. 다만 道를 뽑아 든 노자의 비유적 서술 솜씨가 참으로 재치 있으면서도 이치의 혈맥을 시원하게 짚어주고 있다는 점을 새기고 싶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