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타자다. 내가 시를 읽을 때, 특히 시를 쓸 때(이와 비슷한 견지에서 습작생의 시를 읽을 때) ‘시적인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 시는 ‘나’의 생각을 어떠한 변형을 거쳐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시라는 것이 먼저 있다. 쉬운 말로 할 때 나는 장르로서의 시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장르라는 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형식이란 역시 필연적으로 제약과 맞닿아 있다. 물론 나는 형식과 제약은 동의어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만. 한시에서 각운은 하나의 제약인 동시에 그 제약에 맞춰 쓰여진 텍스트를 시로 성립시키는 조건이다. 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조차도, 제약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에 묶여 있다. 한편으로 제약이 없는 것은 시가 아니겠지만,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젝이 한계는 존재론적으로 초월에 선행한다고 말했을 때 의미한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그 제약, 장르, 형식…… 이런 것들을 하나의 실정적인 그리고 귀찮지만 따라야할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본질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시는 타자다. 거기 어딘가에 있는 다른, 독립적인 존재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 타자가 이끄는 대로 나를 맡긴다는 것이다. 나는 먼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쓰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시가 원하는 대로, 그가 길을 터주는 대로 쓰고 생각해야 한다. 아주 단순하게,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시가 아닌 것이다.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이든 시라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문제는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습작생인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길은 사후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한 편의 시가 한 편의 시로 완성된 순간, 그 텍스트가 걸어온 길은 시의 길이 된다. 시인들은 그렇게 시의 길을 따르며 자신이 따른 그 길을 만들어간다. 아마 거기에서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그리고 요구하는 시인의 주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라는 것의 완벽한 타자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길 강요받는다. 예컨대 어떤 특수한 맥락이 아니라면 시에서 ‘나는 슬프다’같은 말을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말을 포기하고 ‘시가 되는’ 다른 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진다.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의 주체성을 박탈해가는 대신 시는 다른 길을 터준다는 것이다. 그 길을 따라갈 때 나는 본래는 내 생각이 아니었던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단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나의 더 정확한 생각이며, 더 주체적인 나의 생각이다. 타자로서의 시 앞에서, 나를 박탈당할 때, 나를 박탈당하는 바로 그 양상 속에서만 시인으로서 주체성은 실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의 가장 간명한 정의를 ‘실패한 말’이라고 내리고 싶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의도의 어긋남’이라는 사전적 의미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사회적 주류와 비주류의 관계를 함의하는 실패, 어떤 식으로든 의미심장하게 ‘성공’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실패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흔히 문학적 담론에서 실패가 언급될 때는 대개 그런 식으로 과장되어 쓰인다고 생각한다). 시는 실패 속에서, 실패 그 자체, 그것이 가장 구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필사하다 손 아파서 적어본 글.


  걍 평소 생각하던 걸 떠오르는 대로 적은거라 조금 추상적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