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기다림의 계절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겨우내 계곡을 가득히 매운 정적을 깨고 물줄기가 힘차게 흘러내렸다.


아침해가 가까워졌다는 증거겠지만 계곡물이 완전히 열리려면 한참은 걸릴것이다. 계곡 구석구석에 아직 녹지않은 눈꽃들이 여전히 자태를


뽐내며 반짝였다. 오히려 녹기시작한 눈꽃이 온기에 흔들리며 빛을 발하는것이 장관이었다.


주인모를 계곡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지가 몇년이다. 필시 이름도 주소도 없는 계곡일터, 무슨일인지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스스로를 집배원이라고 밝힌 그는 생전 받아본적이 없는 편지를 한장 주고 갔다. 귀신이 곡할노릇이다. 아니 오히려 사람의 무서움을


알았다고 해야할까? 발신자의 이름이 적힌곳을 보았다. 전혀모르는 이름이다. 편지를 펼쳐 내용을 보았다.




 나의 이름은 XXX입니다.


나는 이 계곡을 포함한 주소지 XXXXXXXXXXXXX의 6개의 산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해당되는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자격을 심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보냅니다.


제가 있는 위치에 대한 단서는 편지에 동봉되어 있는 쪽지를 참고하여 주십시오.


만약에 제가 있는 곳으로 오지 못하시거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의 주거지가 옮겨질 수 있음을


알립니다.



편지봉투 안에는 두번접은 빨간색 쪽지가 있었다. 펼쳐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 장난같지 않은가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섭다. 계곡은 꽤나 깊은 산속에 있었지만 충분히 걸어서 도착할만한 거리에 슈퍼마켓이 있고


고속도로도 있다. 6개의 산이라.. 하지만 넓어봤자 얼마나 넓을까? 6개의 산이라고 모두 이어져있을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빨간색 종이가 단서고 그는 딱히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역시나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내 존재를 알고있으며 이렇게 비밀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려는 것일까


몇년을 이곳에서 이러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않는다. 계절이 여러번 바뀌는것을 겪었으므로 몇년이 지났다는 것정도는 알겠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글을 읽고 능동적으로 움직여줄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단서 또한 너무나 난해하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금이라도 삶을 실감했다는 기쁨을 주었다는 점에서 편지의 저자이자 이 계곡의 주인에게 조금이나마


감사한다. - 하지만 아마 당신을 보러갈 일은 없을 것이오 -


그렇게 생각을 멈추었는데 눈에 무엇인가 붉은 것이 스처지나갔다.


분명히 붉은 것을 보았다고 생각한곳을 다시 보았다. 자세히보고 또 앞으로 걸어가면서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필시 무언가 잘못본것이리라.


아니다.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숲의 그림자에 가려 자세히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몸을 틀자 붉은것이 다시 보였다.


 '토끼다!'


알 수 없는 흥분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흥분에 취해 쾌재를 부르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토끼의 몸통에 사각형으로 붉은 염색이 되어 있었다. 필시 이것이 단서일 것이다. 보아하니 이 토끼가 저절로 내 갈길을 인도해주지는 않을것이고


토끼를 산채로 잡아보면 무엇인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산짐승을 잡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토끼를 몰며 낮은곳으로 계속해서 유인했다. 그러나 토끼의 움직임이 무엇인가 이상하다. 어딘가 다친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절뚝거리는 모양이


어딘가 다친모양이다. 가엾은것 제 주인잘못이다. 만약 이 토끼가 야생토끼가 아닌 집토끼라면 이런 추운겨울에 방생한 행위는 그렇게 잔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토끼는 이내 지친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설사병이라도 걸린듯 곧 죽을듯이 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목덜미를 잡아 들었으나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염색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염색이 되있는것이 아니라


살을 통째로 오려내어 붉은 근육이 꿈틀거리며 보이는것이었다.살이 도려내진지 시간이 좀 지났는지 피가 흐르지는 않았으나 그의 생명관에


대해 매우 경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더 충격은 잠시후 목덜미를 붙잡힌체 부르르 떨고있는 토끼녀석을 뒤집어 보았을때 찾아왔다.


토끼의 배에는 얼마되지 않은 듯한 커다란 수술자국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검은색 마커로 쓴듯한 화살표와 'OPEN' 이라는 표시는 나를 경악케


했다.


살아있는 토끼의 뱃속에 단서가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 내 주변의 모든 환경을 주시하고 있는 커다란 음모의 중심속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자가 원하는것은.. 하필 나를 만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서른살이 되던해 나에게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연구부장의 얼굴이 스처갔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호기심이 다시한번 나를


깨웠다. 어차피.. 당시 모든것을 가진 나에게 자제심이 없었듯 지금 충분한 호기심과 용기를 가진 나에게는 더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나는 방금전까지 누워있던 허름한 오두막 속에 기어들어가 녹슨 칼과 통조림 몇개를 챙겼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돌몇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벗어두었던 옷가지 몇개를 껴입고 나머지는 허리춤에 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