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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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밤 나는 수지와 홍대 앞에 있었다. 놀이터에는 막걸리를 마시며 밤새 난장을 피우는 펑크들이 있었다. 징 박힌 라이더자켓에는 페니와이즈 같은 밴드 로고나 아나키 마크 패치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몇몇은 미끄럼틀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 중 붉은 모호크 머리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술 취한 녀석으로부터 기타를 빌렸다. 수지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기타가 엉망인 탓에 조율을 해야 했다. 나는 그녀를 벤치에 앉히고 나도 그 옆에 앉아서 잭 존슨의 노래를 연주했다. 놀이터가 시끄러운 탓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미끄럼틀 위에 술 취한 펑크 몇 명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녀 옆에 바짝 붙어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나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수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꼈던 적이 별로 없었어. 언제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또 누군가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어. 이상하지? 근데 난 행복이란 것을 처음 스테이지에 섰을 때 느꼈어. 밴드와 끝내주는 노래를 연주하면서 기타솔로를 치는 순간 처음으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존재한다는 어떤 증명 같은 것을 느꼈지. 끝내주는 기분이었어. 내 진짜 인생은 그 곳에서 시작됐고 내 삶은 스테이지 위에서만 존재 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순간은 언제나 짧았고,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허무하게 끝나버리지. 방금 전의 기억은 신기루처럼 느껴지고. 그러면 난 무대 아래의 비참한 나로 다시 돌아오는 거야. 공연 다음날 늦은 오후에 눈을 떴을 때 느껴지는 적막감과 허무함은 끔찍해. 플로어 아래로 내려오면 난 죽어 있는거야. 일상 속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졌어. 그런데 이제는 변한 것 같아. 너를 알게 돼서 말이야. 너와 함께 있으면 매 순간, 일분, 일초, 그리고 그걸 무수히 쪼갠 시간들까지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너랑 있으면 음악이 없어도 언제나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아. 아무런 애정도 없는 무거운 짐 같던 내 삶에 처음으로 소중한 것이 생겼어. 그래서 살아갈 의미가 생긴 기분이야. 모든 것이 의미 있어졌어. 네가 지난번에 사줬던 초콜렛 포장지도 소중해서 버리지 못했어. 나는 이 모든 순간을 한껏 느끼고 싶어. 살펴보고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맛보고 모두 기억하고 싶어. 그리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 혹시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예컨대 이건 음악이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연주되는 거고 넌 계속해서 춤을 추는 거야. 멈추는 일 없이. 스테이지에서 내려올 필요도 없고, 그 아래의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아. 스테이지 위와 아래의 세상은 하나가 된 거니까. 널 만나서 이것을 알게 됐어. 네 덕분에 나는 완전해지는 기분이 들어. 너를 좋아하고부터 매일, 매 순간 나는 무대에 있는 것과 같으니까.” 이 말들은 내 입 속을 한없이 맴돌다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하고, 어두운 목구멍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대신 나는 실없는 농담 몇 마디를 던지고 그녀와 같이 키득대며 웃었다.
어느 날 월요일 아침, 나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교복을 입었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왔다. 하늘이 우중충했다. 도무지 기력이 나지 않는 날씨였다. 동네 주민들은 항상 우울해 보였다. 낡은 아파트와 담벼락을 바라봤다. 한 줌의 정도 남아있지 않은 이 동네가 지긋지긋했다. 철근과 콘크리트 덩어리의 괴물같았다. 집 앞 벤치에 앉았다. 초록색으로 도색 된 벤치는 페인트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이 동네는 무슨 미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지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학교에 갈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나는 그렇게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무엇엔가 이끌린 것처럼 서울로 향했다. 수지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다. 텅 빈 열차는 한참 동안이나 덜컹거리며 나를 서울로 데려갔다. 서울은 멀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고 기분 좋았다. 명동 역의 계단 위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지의 작은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약봉지 때문에 그녀의 하얀 손이 더 작아보였다. 감기로 고생하고 있던 나를 위한 약이었다. 우리는 잠시 손을 잡고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서 도넛을 먹었다. 그날 난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수지가 모든 것을 계산해야 했다. 그리고 훌라걸즈라는 일본영화를 봤다. 나는 그 영화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파극 같았다. 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수지는 그런 나를 보고 키득대며 웃었다. 영화가 끝나고 로비로 나오며 나는 하품을 했다. 수지는 기지개를 펴면서 그 영화가 지루했다고 했다. 내 핸드폰은 종일 쉴 새 없이 울렸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학교나 엄마로부터 걸려온 전화겠지. 우리는 조금 걷다가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말 없이 서있었다. 아쉬웠다. 이 달콤한 세계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수지에게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우린 새끼 손가락을 걸고 그때 같이 살자고 약속했다. 시간이 늦어 떠나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상의 빛깔은 파스텔 톤에서 점점 어둡게, 차가웁게 그리고 선명하게 바뀌어 갔다. 핸드폰을 열었다. 전화가 수십 통 와있었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모두가 내가 가출했다고 생각 했다. 내가 여러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엄마에게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추궁 당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나 엄마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툭 던지고 후회했다. 침대에 누워서 수지와 연락을 했다. 그녀는 몸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그녀에게 감기를 옮긴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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