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닥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절대적인, 기독교의 신 같은 존재가 내려와 말할 자격이 있는 당신과 없는 당신을 구분해 주었으면 좋겠다. 근대 이전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전지전능한 신은 모든 판단기준이 되었고, 언어 위에 군림하여 집적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지금 니체의 담담한 선언 이후에 신의 자리에 이성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 현대, 이성은 힘을 잃고 언어는, 말들은 공허하게 넘쳐, 이리저리 흩날린다. 언어는 오염되었다. 광고와 같은 언어의 이미지(사진과 같은)화, 스펙터클화는 언어에서 깊이를 삭제했으며, 오직 충격적인 이미지로서 작용한다. 미디어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말초적인 쾌락과 폭력적인 충격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에 맞서는 전략을 창조해야한다. 언어를 말할 자격은 언어의 내용 보다 선행한다. 말할 내용이 있어도 자격없는 자는 닥쳐라. 그 자격이란게 윤리든 도덕이든 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수준에서는 아직 생각해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가해자는 진실 그리고 사죄를 제외하고 어떠한 발언권이 없다.(적어도 나는 내 기준의 모종의 윤리를 따르는듯 하다.) 모두 닥치거라. 가해자에게 비난할 권리따원 없다. 국가권력의, 천민자본주의(혹은 신자유주의)의 부당한 폭력으로 희생당한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말할 수 있는건 오직 진실과 사죄이다. 그 이외에 것은 모두 개소리이다. 방관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방관은 다른 형태의 폭력이므로. 더이상 언어를 오염시키지마라. 성폭행범이 말하는 윤리가 공허하듯이, 가해자가 말하는 주장역시 공허하며 흩날린다.
다른 하나의 수단은 나는 역시 문학도인 관계로 문학에서 길을 찾는다. 이제 진실을 들어내고 잘 포장하는 문학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이 오염된, 이미지화된 혹은 영화화된 언어로 부터 진실을 감추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깊이, 어어의 다층을 은유를 지키는 최후의 요새일 것이다. 문학은 이 은유, 암시 같은 문학적 기법을 통해 함부로 진실이 소비되지 않도록 지킨다. 그래서 나는 시를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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