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21세기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이해 못하겠다고, 취향에 안 맞는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사실 최근 10여 년간은 시를 많이 쓰지도 읽지도 않았기에 한국 시단을 아주 피상적으로 인식해 온 탓이 더 크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집으로는 과거의 김경주와 최근의 황병승 등 일부만 접했었다. 어쨌든 그들의 시는 내게 암호문 같았다.
나와 비슷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인지 문갤에는 최근 한국시단의 난해성 경향에 대해 성토하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 일부 글에선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를 제기해 공감과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했지만, 설득력이 빈약한 투정들이 더 많았다. 특히 오늘 올라온 '또람이'의 글에선 그런 경향이 뚜렷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시들의 공통점으로 "간결하고 쉽고 아름다운 언어"를 꼽았다. 아울러 그는 외국의 좋은 시들이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묘사가 없고, 상황은 절대로 명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동사. 그 움직임의 미학을 이용해서 글을 꾸미는데 한국 문학과는 차원이 다르게 아름답고 정교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18세기 낭만파 시인들"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물론 일부 수용할 만한 주장이다.
낭만주의 시는 당대적 고민의 소산이다. 그 경향 아래에 훌륭한 작품도 많겠지만 그러한 시풍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21세기의 젊은 시인들과 문청들에게 그런 경향을 주문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람이의 글 서두에 노벨문학상을 언급했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중 가장 유명하다고 봐도 무방한 T.S 엘리어트의 대표작을 보자.
II. 체스 놀이
그네가 앉아 있는 의자는 눈부신 옥좌처럼 대리석 위에서 빛나고,
거울이 열매 연 포도 넝쿨 아로새긴 받침대 사이에 걸려 있다
넝쿨 뒤에서 금빛 큐피드가 몰래 내다 보았다
(큐피드 또 하나는 날개로 눈을 가리고)
거울은 가지 일곱 촛대에서 타는 불길을 두 배로 해서
테이블 위로 쏟았고, 비단갑들로부터
잔뜩 쏟아 놓은 그네의 보석들이 그 빛을 받았다
마개 뽑힌 상아병 색 유리병에는
이상한 합성 향료들이 연고 분 혹은 액체로 숨어서
감각을 괴롭히고 익사시켰다
향내는 창에서 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극받아
위로 올라가 길게 늘어진 촛불들을 살찌게 하고
연기를 우물반자 속으로 불어 넣어
격자무늬를 설레이게 했다.
동박 뿌린 커다란 바다나무는 색 대리석에 둘러싸여 초록빛 주황색으로 타고
그 슬픈 불빛 속에서 조각된 돌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 고풍의 벽난로 위에는
마치 숲 풍경이 내다보이는 창처럼
저 무지한 왕에게 그처럼 무참히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변신 그림이 걸려 있다
나이팅케일은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적 적> 소리로 들린뿐,
그 밖에도 시간의 시든 꽁초들이 벽에
그려져 있고, 노려보는 초상들은 몸을 기울여
자기들이 에워싼 방을 숙연케 했다.
층계에 신발 끄는 소리,
난로 빛을 받아, 빗질한 그네의 머리는
불의 점들처럼 흩어져 달아올라
말이 되려다간 무서울 만치 조용해지곤 했다.
엘리어트를 상징하는 <황무지>의 2장 중 일부다. 이 시는 서양의 신화나 고전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이해하기엔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른다. 또람이의 설명과 달리 장황한 묘사가 주를 이루며 따로 주석을 달지 않는다면, 해설을 따로 읽지 않는다면 그 의도를 간파하기 쉽지 않은 구절들도 많다. 이는 이 시가 발표된 1922년의 상황, 즉 천만명의 사망자를 낸 1차대전 직후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낭만풍의 노래로 빚어내기엔 세상이 너무 황량했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끔찍했던 탓일 게다. 이처럼 시적 말하기의 방식은 시대에 따라 저마다 다른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다음은 1960년 노벨상 수상자인 생-종 페르스의 시다.
그리고는 눈이 왔다, 부재의 첫 눈이, 꿈과 현실로 짠 엄청난
나비의 피륙들 위에. 온갖 고통은 다 기억좋은 사람들에게 넘
겨주고, 우리의 관자놀이에는 린네르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그
것은 아침, 새벽의 잿빛 하늘 아래, 여섯 시 조금 전, 잠시 머
무는 항구에서처럼, 침묵의 거창한 노래들의 벌떼를 풀어놓을
은총과 은혜의 터전이었다. (중략)
뽑은 칼날의 첫 흥분같은 이 갓난 숨결의 구름떼를...... 눈
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놀라움을 말하겠다.
신령의 숨결에 사로잡힌 전설의 큰 올빼미처럼 제 깃털에 쌓인
벙어리 새벽이 그 하얀 다알리아 같은 몸뚱이를 부풀리고 있었
다. 그리고 사방에서 낭비의 잔치가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 그
래서 건축가가 지난 여름 쏙독새 알을 우리에게 보여준 그 테
라스를 향해 인사하기를!
- <눈> 일부
[출처] 생 종 페르스 <눈>|작성자 툭툭
[출처] 생 종 페르스 <눈>|작성자 툭툭
이 시는 눈이 오는 순간에 화자가 느낀 정서를 세밀한 묘사와 현란한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전체 진술의 70% 이상이 비유법이거나 비유적 진술에 관여한 어구들이다. 또람이의 표현을 빌자면, 몇 줄로 줄일 수 있는 시다. 순수시란 이처럼 일상어의 차원에서는 단 몇 마디로 축약할 수 있는 언술을 길게 늘여 쓰는 것을 그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인간 정서의 복잡하고 유동적인 면을 포착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나는 이 시에서 서정주나 김춘수의 시를 연상했다. 활동 시기도 비슷하고 시적 방식도 비교할 만한 구석이 많다고 본다.
그때 소하라의 저자는 글을 쓰고
낱말의 피의 그물을 열어
보이지 않게 흐르며, 오직
갈망으로만 불 밝힐 수 있는
별들의 피를 흘려 넣었다.
알파벳의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나고,
글자의 천사, 창조의 물방울이 담긴
태고의 수정,
그들이 노래했다.
(하략)
이 시는 1966년 수상자 넬리 작슨의 <그때 소하르의 저자는> 중 일부다. 이 시 역시 '소하르의 저자가 글을 쓴다'로 축약할 수 있는 언술을 비유와 묘사로 길게 늘인 형태다. 역시 메타포가 언술의 대부분을 이끈다.
시간의 부챗살이 접히고
이미지가 그림자를 거두어드릴 때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부유(浮遊)한다
죽음에 둘러싸여서, 기지개를 켜는
을씨년스러운 밤의 위협 속에,
가면을 쓴 끈질긴 죽음의
뜻 모르는 소음의 위협 속에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스며든다,
움켜진 주먹처럼, 안으로
안으로 익어 들어가 마침내
자신을 마시고 흘러내리는 과즙처럼
불투명한 순간은 둥그렇게 닫히고
안으로 성숙하고, 뿌리를 내려,
내 안에서 자라나, 나를 온통 점령하고,
나는 무성한 잎새들의 두런거림에 쫓겨난다,
나의 사유는 그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일 뿐이다,
나무의 은빛 수액이 나의 핏줄을 타고 돈다,
정신의 나무, 무르익은 시간의 과일들.
비교적 최근(90년)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의 작품(제목은 모름)이다. 검색 결과 파스의 시는 하이데거 철학과 연관해서 혹은 동양철학 및 불교적인 경향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자세히 연구한 것은 아니나 그의 시는 '말하려는 것'과 '말해진 것' 사이의 차이와 떨림, 그것에 대한 인식과 표현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이는 오규원의 날이미지나 비슷한 방법론을 밀고 나간 김혜순의 '몸시'를 연상케 한다. 알다시피 두 사람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이들의 방식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인 없다'는 포스트모던적 인식과 궤를 함께 한다.
이미 많은 언어들이 이미 말해졌고, 또한 많은 인식들이 완성되거나 진행 중이다. 일상어 진술의 차원에서는 더 이상 새롭고 신선한 표현을 찾기 어려워진 것이다. 알다시피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무리 빨라 봐야 1960년대 이후의 이론이고 그 영향이 예술 각 분야에 나타난 것은 70년대 이후이며 본격적인 양상은 80년대를 지나면서 꽃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오규원이나 김혜순의 시작 방식이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두 시인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교편을 잡으며 향후의 한국 시단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의 한 양상을 21세기의 시단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셈이다.
각설하고. 90년대 이후부터는 서구 시인들의 시에도 오늘날 우리 시단의 경향과 흡사한 면모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거리를 한껏 늘리려는 시도. 이미 말해진 것들의 범람에 대처하는 자세의 일면으로 보인다.
지독한 총상을 입었다.
그는 붉은머리 오리를 잡아 뜯다가
후두(목과 연결되어 있는 조류의 발성기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망가진 플룻에 매달린 마개와도 같은
그 후두
그는 후두를 불어 보았다.
갑자기
자신의 후두에서 울음 소리가 들린다.
- 셰이머스 히니, <노래>
거기 우리 있었다 천장 둥근 터널 속 뛰면서,
당신은 떠나는 당신 코트 차림으로 선두에서 속도를 냈고
나는, 나는 그때 쾌속의 신처럼 따라잡는 중이었다
당신을 당신이 갈대로 변하기 전에
혹은 어떤 진홍에 기습당한 하얀 꽃으로
코트가 마구 펄럭이고 단추가 하나씩
튀어나가 떨어지던 그 지나간 자국
지하철과 앨버트 홀 사이 그곳에서 말이다.
신혼여행하며, 야반도주하며, 졸업파티에 늦어,
우리의 메아리는 죽는다 그 복도에서 그리고 이제
나는 온다 헨젤이 왔듯 달빛 비친 돌 위로
행로를 되밟으며, 단추를 들어올리며
외풍 있는 램프 빛 역,
열차 떠난 그곳에서 마감한다, 젖은 선로는
헐벗고 긴장되었다 내가 그렇듯, 온갖 주의 기울여
당신 발걸음 좇고 돌아보면 지옥불이다.
- 셰이머스 히니, <지하철> 전문
[출처] 지하철, 셰이머스 히니|작성자 욥
1995년 수상자 셰이머스 히니의 작품 두 편이다. 결코 간결하지도 않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90년대나 21세기의 한국 시인이 쓴 시라고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의 시집 중 아무 거나 펼쳐 보면 이런 분위기의 시들은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이것은 과연 또람이의 표현처럼 "난잡하게 기교부린 시"일까. 아니면, 이 시들은 우리 시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일까.
난 이걸 문학사적 고뇌의 산물이라고 본다. 어떤 예술가든 자기 작품이 '이미 발표된 것'과 똑같거나 흡사하기를 꺼린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은 새로운 방식을 갈구한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류는 최근 수백년 간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분량의 '말해짐'을 쏟아냈다. 낭만풍의 노래하기만으로는 표절과 모방의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어진 시대란 얘기다.
또람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괜히 찔려서 욕하지 말고 진짜 순문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자. 순수한 문학. 순수한 글을 쓰도록 하자."
"진짜 순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21세기 한국 시인들의 노력을 '가짜 순문학'으로 폄훼하려는 발언인 듯하다. 나는 세계 시문학계의 흐름을 잘 모르지만, 그들도 우리 시인들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으며 우리 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이 글을 쓰기 전의 내 예상은 검색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를 점유했던 '노래의 시'에서 80년대를 기점으로 '탐구의 시' 혹은 '실험적 말하기의 시'들이 세계 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그것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어느 곳이든 낭만풍의 시나 고전시가적인 시는 존재한다. 우리 문단에도 그런 시인들과 작품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의 시에서 확인했듯 새로운 말하기, 신선한 말하기를 추구한 결과로 다소 난해해 보이는 시적 방법론도 다수 존재한다고 본다.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수준의 시대다. 인간의 뇌와 정신마저 과학의 메스로 해부하는 시대다. 그나마 영화나 게임 등의 분야와 호흡하면서 서사문학의 지위는 일정하게 지켜지고 또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와 지역을 막론하고 서정문학의 전통은 많이 와해된 걸로 보인다. 마르케스, 파르묵, 쿤테라, 쥐스킨트, 사라마구 등 독자들에게 꽤 익숙한 순문학 소설가들과 베르베르, 롤링 등 대중소설가들의 이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그만큼의 인지도를 갖춘 시인의 이름을 대보라. 내가 알기론 70년대에 작고한 파블로 네루다가 그런 지위에 있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결국 그런 시인이 없기에, 시인들이 실패하고 있기에 한심하다고 생각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수많은 시인들처럼 우리 젊은 시인들도 고민하고 있다. 또한 많은 문청들도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의 결과들을 그저 '중2병'으로 일갈하기 전에 자신의 앎에 부족한 점이 없는지 공부해 볼 것을 권한다.
날카로운 지적..
우와 이거 공유 좀 해도 될까요
ㄴ 네. 맘대로 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