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도그마를 살펴보자.

'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명제는 종합 명제로, 현재 인류의 지식 경계에서 광범위하게 참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기 위해 바다를 들쑤시고 다니며 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이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어의 존재 여부라는 탐구는 단순히 인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찰뿐 아니라 다른 지식과 모종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체와 물고기의 골격구조가 붙어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 진화론에 관한 지식, 수중 폐호흡에 관한 가능성 등, 만약 인어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수정해야 할 인류의 지식이 너무 많아진다.

콰인은 이렇게 하나의 명제는 독립적으로 평가받을 수 없으며, 하나의 명제는 인간이 가진 앎의 총합(set of knowledge)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명제를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뇌의 전반적 구조와 세포간의 관계를 무시한 채 뇌세포 하나를 똑 떼어내서 그것으로 인간의 지성을 연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쓰고 나니 적절한 예시는 아닌 것 같다.)

즉, 콰인은 우리가 한 명제가 참임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기존 우리의 지식 체계 전반을 수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경제성 평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경제성 평가는 정도의 차이만 있지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이 판단불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상 - 번개

주장1. 토르의 망치질

주장2. 음양의 조화

주장3. 전자기학

위의 주장 중 적어도 대다수의 인류는 주장 3를 수용하여 기존에 갖고 있던 세계관을 수정했다. 하지만 주장 4와 나머지간의 근본적 차이는 없고, 주장 4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수많은 지식의 흐름에 더 잘 부합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수정에서 과연 분석명제는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아래를 보자.

명제: 여기에 있거나 여기에 없다.

위의 논증은 배중률(x=y or not y)에 기반한 것으로, 오랜 시간동안 절대적 참, 즉 분석 명제라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등장하고, 전자는 관찰되기 전까지 공간 상에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즉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이 중첩되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배중률은 항상 참인 명제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즉슨 종합명제와 분석명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성질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재밌게 봤으면 좋겠다. 이해 안 가는 거 있으면 물어봐


이만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