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벤치 위에서



  갈매빛의 나무들이 푸른 하늘을 빼곡히 가리는 오늘입니다. 구름 몇 점이 신난 강아지처럼 뛰놀고, 영원했으면 하는 레몬 빛깔의 햇빛이 데우는 정오의 벤치. 사랑하는 짝을 위해 열창하는 새들, 그에 맞춰 귀뚜라미 합창단이 조용히 반주하는 이 곳, 이 곳에서 저는 다소 생뚱 맞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할 때면, 미칠듯한 괴로움에 온종일 몸부림치곤 했습니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란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알아차릴 때마다, 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절실히 필요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목적 없는 것은 없을 거라 굳게 믿으며, 지금껏 치열하게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죽지 못해 산다는 그딴 멍청한 변명 이외의 정당한 근거를 원했습니다.  제발 내가 죽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대답해달라고 애원하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오랜 고민의 시간이 지나고, 지금에서야 저는 저 나름대로의 어설픈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고민으로 힘겨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디 그만 슬퍼하기를 바라며. 


 누군가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실건가요? 행복, 사랑, 건강, 돈, 명예 등, 인간이 삶의 가치로 채택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에 따라 어느 누구는 테레사의 삶을 살 수도, 또다른 누구는 일론 머스크의 삶을 살 수도 있지요. 삶은 곧 출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삶의 가치는 그 판단 기준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집단 생활의 동물이며, 이는 자연스레 현대인에게 절망적인 의문을 유발합니다. 이 수많은 가치들 중에서, 우리 삶의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어떠한 삶의 가치를 선택한다 한들, 그 것이 정말로 옳은 가치인지, 나중에 후회하진 않을지 수많은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향한 욕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넘쳐흐르는 가치들의 홍수 속에서 어떠한 선택지가 정답인지 알려달라는, 비참한 심정으로 욕망해나갑니다. 누군가는 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라는 길을 선택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본인 손으로 삶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했는지 알지 못한 채 후회만 하다 죽어야하는 방랑자 같은 존재일까요?


  위 이야기는 인생의 종착지에는 어떠한 본질적인 삶의 가치가 있을거라 전제한 내용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관점을 바꿔봅시다. 과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자체가 애초에 없는 것이었다면, 어떨까요? 삶의 가치를 ‘찾는다’는 말은 곧, 삶의 가치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미 신과 같은 절대자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했다는 것이지요.  즉, 삶의 가치를 찾는다는 말은 이미 최고의 인생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그리고 운명론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설령 우리가 절대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객관식 시험지에 불과할겁니다. 하나의 가치만이 정답이고, 나머지 가치들은 모두 오답인 이 세계가 어찌 찍신이 필수인 난센스 시험지,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세상이 거짓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은 신(= 절대자)의 섭리대로 흘러가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라 흘러갈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도, 당신이 이 글을 읽는 것도, 서서히 선선한 바람이 스치는 것까지 이미 아주 오래 전 결정된 이야기일수도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우리를 영원히 고민의 굴레에 빠트릴 것만 같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이 물음에 제가 내린 어설픈 답변은 또다른 질문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믿어서, 좋을 것이 뭐지?’,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신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내가 거대한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없죠. 죽음 뒤에는 정말 천당과 지옥이 있는지, 아니면 윤회를 통하여 개구리로 태어날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믿을 뿐입니다. 애시당초 논리적 사고만을 앞세우던 인간에게,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질서의 성립이 곧 생존과 직결됐던 역사가, 혼돈은 두려운 것이라 유전자에 각인시켰기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인류는 알 수 없음의 혼돈을 질서로 개편하기 위해 하나의 방안을 마련하게 됩니다. 바로 ‘믿음’이라는 체계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믿음으로써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크나큰 사실을 잊게 됩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도구에 불과한 개념이었다는 것을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이 둘 중 한 명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각자의 삶에 맞게 각자의 ‘믿음’을 선택하는 것 뿐이죠. 자신의 두려움을 최대한 없앨 수 있는 도구로서 말입니다.  신이 있을지 없을지, 인생의 진리가 있을지 없을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속 캐릭터가 자신이 영화 속에 있음을 결코 인식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알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늘 제가 당신께 제안드리는 것 역시, 그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믿음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믿으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사실 이런 질문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감히 제가 제 믿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랜 고민 끝에 제 삶의 믿음을 이렇게 정해보았습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우리가 직접 그려나가는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의미가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개척해 나가는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 믿음의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인생이 누군가 이미 그려둔 컬러링 북이 아닌 흰 도화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밑바탕에서부터 본인이 차근차근 그려나가야 하기에 컬러링 북에 비해 분명히 고통스럽겠지만, 그렇게 완성해낸 그림은 어떤 그림과도 같지 않은 나만의 독자적인 그림으로 거듭날 수 있을거라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나만의 그림, 나만의 음악, 나만의 이야기, 그리고 나만의 인생으로 말입니다.


 사랑스런 하늘은 어느덧 오렌지향을 머금은 햇빛을 보내옵니다. 싸구려 투명 컵 속의 차는 이미 식어버린지 오래네요. 그럼에도 하늘로 날아가지 않은 컵 옆 면의 물방울 하나. 반짝이는 그 모습이 어쩌면 내 인생의 잉크는 아닐지 미소 짓게 만드는 하루입니다.

우리 인생이 거대한 이야기임을 잊지 않길 바라며.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또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____ 일개 고등학생의 미진한 글쓰기입니다. 비판해주실 점이 있다면 꼭 피드백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