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논리학
 
(x.yz...1 / 뒤에 오는 숫자는 앞의 함수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2.1은 2에대한 첫번째 설명, 2.11은 2.1에대한 첫번째 설명이다. 6.121123은 6.12112에 대한 3번째 설명이다. )

 글을 정독하시기 전에 말씀드리자면, 논리학적으로 삶은 고통이다라는 전제로 삶의 무의미함과 내가 죽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서술한 글입니다. 
 
 
1. 삶은 고통이다.
 
2.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궤변이다.
 
3. 죽음은 경험할 수 없으며, 인간이 알 수 없는 사변적 개념이다.
 
3.1 사변적 개념인 죽음은 삶을 멈추게 한다.
 
3.11 죽음은 무(無)이며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비가치적 상태이다.
 
3.2 죽음은 존재 자체가 무(無)이다. 이는 즉, 삶을 멈추게 한다.
 
3.21 그러므로 태어나기 전인 상태, 즉 가치중립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본능에 의한 수동적 필연적 귀결이다.
 
3.211 태어나기 전인 상태는 고통을 받지 않는 상태임을 뜻하며, 이는 곧 결핍의 인지가 불가능한 상태를 뜻한다.
 
3.212 태어나기 전 상태는 무(無)의 상태와 같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선험적으로나 후험적, 그리고 과정으로서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3.2121 무(無)란 즉,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비가치적이다.
 
3.21211 비가치성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없다.
 
3.2122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본능이다. 그 이유는 사람은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싫어도 멈출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이 언젠가 마주해야할 ‘운명’이다.
 
3.21221 무(無)의 회귀 본능은, 거스를 수 없으며 피할 수도 없기에 필연성을 전제한다.
 
3.3 죽음은 의지의 소멸이다.
 
3.31 의지는 살고자하는 맹목적인 욕망이다.
 
3.311 의지는 맹목적이지만, 사람은 맹목적이지만은 않다.
 
3.312 즉, 의지의 맹목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3.3121 그렇기에 자의성이 있는 의지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3.31211 그 이유는 나는 살기 위해 이 글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312111 의지는 선험적으로 존재해야한다고 봐야한다.
 
3.3121111 의지는, 왜냐하면 인간의 근본을 자처하고, 이 의지의 맹목성 덕분에 인간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3.31211111 그 단순한 예시로서, 배가 고플 때 울고, 자신에게 무언가 결핍된 상태일 때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신호로 대상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312111111 이는 의지의 맹목성에 의한 본능적 행동이다.
 
3.3122 그렇다면, 인간의 근본은 자처하는 이 ‘의지’의 자의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3.3221 의지의 자의성은 인간의 ‘이성’에서 발인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3.32211 내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성이란, 인간의 능력 중 하나로 오성, 감성과 나뉘어진 경험이전과 이후에 각 사물을 인지할 수 있고, 무언가를 이분법 적으로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는 즉, 칸트가 제시하는 이성과는 정의가 상이하다.
 
3.322111 이성의 정의가 상이한 이유는, ‘경험’의 차이에 있다.
 
3.3221111 내가 경험에 차이를 둔 이유는, 이성이란 선험적으로 무언가를 인지하고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3.3221112 경험에 앞서 무언가를 판단 하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다. 이는 이성이라고도 말 할 수 있지만, 본능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가능한 영역이다.
 
3.32211121 그렇다면, 의지의 자의성은 본능의 영역인가 이성의 영역인가를 봤을 때, 내가 제시하는 이성, 즉 경험 이후에 무언가를 판별하는 능력이다.
 
3.322111211 그 이유는 사람은 삶을 경험하기 이전에,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태어나자마자 죽고싶어 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생을 경험한 이성적 판단하의 자의성의 존재가 생긴다.
 
3.3221112111 자의성이 있는 의지는 ‘현대적 의지’이다. 삶을 경험하고, 여러 지식을 습득하여 자기 자신을 ‘인식’의 대상에 올려둘 수 있는 존재는 ‘인간’외에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면, 이 현대적 의지는 존재할 수 있다.
 
3.322112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선험적 판단 능력이 없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정의이다.
 
3.3221121 그 이유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명백히 있기 때문이다. 예시로서, 칠판을 긁는 소리, 시끄러운 소리, 흉측한 것, 이런 것을 ‘좋다’, ‘싫다’라고 여기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자 본능의 영역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3.32211211 즉, ‘이성’의 정의는 ‘경험’에 앞설 수 있으며, 경험 이후에도 있을 수 있는 가치중립적 상태인 것이다. 가치 중립이란, 편향되지 않은 것을 뜻하며, 양 쪽에 해당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4. 고통의 근원은 삶이다.
 
4.1 삶을 멈추는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4.11 고통은 한 순간 잊을 뿐이지,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여전히 고통을 지속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항시 음수이다.
 
4.111 음수로서의 인생은 고통이다.
 
4.1111 인생은 고통이 전제되어 있기에 절대값이 아니다. 음수보다 높을 수 없고 고통은 인생의 전제이다.
 
4.112 고통을 잊는다라는 표현은 사람이 ‘살아있다’라는 말을 잊는 것과 같이, 인간의 존재가 부재가 아닌 이상 ‘삶은 고통이다’라는 말은 항상 전재되어있는 명제이다.
 
4.113 고통의 지속은 그 값이 역동성을 자아내어 인간이 고통속에서 안주하지 못하게 하고 고정적이지 않다.
 
 
4.2 고통은 인생에 전반적으로 전제되어있는 기본 상태이다.
 
4.21 고통이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인식하는 순간부터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본능적 맹목적 의지의 발현을 뜻한다.
 
4.211 인식이란, 어떠한 것, 과정, 명제 등 인식 ‘가능한‘ 것에 한한다.
 
4.2111 어떠한 것에 대한 ‘인식‘은 즉, 말 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4.21111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인 논리철학논고에서는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는 인식 가능한 것에 대한 한계를 논하지 못하는 맹점을 지닌다.
 
4.211111 즉, 그림이론은 그림으로 모사할 수 없는 것애 대해서는 말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대상의 한계를 논하지 않았다.
 
4.21112 형이상학은 그림으로 모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탐구이지만, 이것에 대한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곧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4.211121 그렇기에 형이상학은 가치폄하가 안되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에대한 논제를 논의하게 해줄 수 있는 ‘인식‘론적 트리거다.
 
4.2111211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형이상학은 곧 어떠한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시발점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4.21112111 즉, 그림으로 모사할 수 있는 명제 혹은 어떠한 것은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인식‘이다.
 
4.2111212 형이상학은 그림으로 모사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 이는 즉,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논의이다.
 
4.211213 형이상학은 다른 말로 풀이하자면,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논한다고 볼 수 있다.
 
4.2112131 ‘인식‘의 한계인 이유는, 인간이 어떠한 사변적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형이상학이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해 ‘인지’하는 것은 인간의 ‘감성‘이다.
 
4.21121311 즉,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활용한 ’인지’의 한계이다.
 
4.211213111 그러므로 그림으로 모사할 수는 없으나, 인지가 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궤변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과 과정을 논하는 메타적 차원의 교류(언어)이다.
 
4.212 인류인식과정학에서 논했듯, 인식이라는 변수를 통해 맹목성을 자의성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함수다.
 
4.2121 즉, 고통의 근원지는 인생에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맹목적 의지의 발현이지만, 이를 인식함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자의적인, 즉 현대적 의지의 발현으로 인한 ‘고통‘이다.
 
4.21211 [변증법적 행복과 현대적 의지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논문에서 나는 임마누엘 칸트가 제시한 ‘물자체’를 쇼펜하우어가 계승하여 ‘의지’라는 개념으로 해석하여 인식론적 해석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 점을 차용하여, 나는 이 ’의지‘의 개념에 집중하였다. 삶과 의지는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개념으로 행복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알맞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행복을 논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맹목성은 너무나 많은 행복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생명체의 걸림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의지’의 개념을 계승하여 인간의 의지는 맹목적이지 않은 자의성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현대적 의지’다. 인간의 자의성을 논문에서 논하였고, 즉 인간의 행복은 결핍을 채우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4.212111 결핍은 가치중립적 상태이며, ‘인식‘하는 순간부터 이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허나 이를 채우는 과정은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이 결핍을 언제 채울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는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
 
4.212112 그 이유로 단편적인 예시로, 배가 고픈 상태 즉, 결핍이 생기지만, 기근과 같은 상황으로 인해 내가 언제 이 결핍을 채울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는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이다.
 
5. 삶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죽음 혹은 소멸이다.
 
5.1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 혹은 소멸로 이루어질 수 있다.
 
5.11 고통은 삶을 지속하지 않음으로서 멈출 수 있다.
 
5.111 고통은 즉 삶의 가치를 음수로서 형용할 수 있고, 죽음은 상황을 불문하고 확실한 절대값으로 생각할 수 있다.
 
5.1111 절대값이란 죽음 자체가 사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해진 값이 아니다. 그저 ‘양수‘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5.1112죽음과 고통의 의미는 상수로서의 ‘값’을 지닌 것이지, 그 뜻에서는 객관적으로 수학적 의미만을 시사한다.
 
5.11121 그러므로 논리학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인간에게 있어 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자면 이는 곧 더욱 높은 값을 지닌 쪽으로 선택의 방향이 나아갈 수 밖에 없다.
 
5.2 해방이란 고통을 받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즉, 인간의 죽음은 소멸을 뜻한다.
 
5.21 고통이 없는 세상(상태)는 소멸된 상태와 같다.
 
5.211 즉, 소멸된 상태는 고통스럽지 않음으로 평온한 상태이다.
 
5.2111 평온함이란 무가치적 해방과 비슷하게 역동적이지 않은 고요한 상태의 중립적인 세상이다.
 
5.21111 소멸은 즉 고통의 역동성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5.21112 평온한 상태라는 것은 즉, 역동적이지 않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닼
 
5.3 주체가 없는 상태는 세상이다.
 
5.31 세상은 맹목적이면서 선험적 종합명제이다.
 
5.32 세상은 맹목적이지만, 인간은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맹목적 인과성에서 탈출할 수 있는 존재이다.
 
5.33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의 맹목적 세상에서 살고있지만,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의성을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맹목성과 자의성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이다.
 
5.33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수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맹목적, 즉 본능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고, 자살은 자신의 자의성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자의성이라고 볼 수 있다.
 
5.332 ‘과정‘이란 시공간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상태‘를 지칭한다. 즉, 죽음이란 과정을 끝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대상을 후험적인 존재로 만든다. 이는 곧, 세상은 인간이 ‘인식‘하기 전 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현재 이 세상은 선험적 종합명제이면서 ’과정’속에 있는 상태이다.
 
5.3321 자의성이란 주체가 자의성을 ‘인식‘을 통해 얻었다면, 이는 객관적이지 않더라도 주관을 통해 자의성을 인식하게 되므로, 맹목성을 벗어나게 된다.
 
5.3322 죽음이 어째서 후험적 개념인지를 논증하기 위해서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는 명제로 설명 가능하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기에 나는 세계의 의지이기 때문에, 표상이 바라보는 의지의 죽음은 필시 후험적이다.
 
5.33221 의지의 죽음이 후험적일 수 있는 이유는 세계의 선험적 종합명제성을 입증할 수 있는 증명이기도 하다.
 
5.33222 나는 즉, 세상의 의지이다.
 
5.332221 나의 의지의 표상은 나(물리적)이다.
 
5.3322211 즉, 나(물리적) 대상의 죽음은 나의 의지의 소멸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나의 죽음의 후험성을 입증할 수 있는 논증을 할 수 있는것이다.
 
5.33222111 태어나기 전인 상태인 무(無)의 상태(선험성과 후험성이 둘 다 포함되어 있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와 죽음의 후험성은 다르지만, 그 뜻은 달리하지 않는다.
 
5.332221111 의지의 죽음으로서 생기는 후험성에 의한 무(無)는 존재하기 전의 무(無)와 달리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로는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두 의지의 부재는 값이 같기 때문이다.
 
5.332221111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수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맹목적, 즉 본능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고 자살은 자신의 자의성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자의성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론은 참이 된다.
 
5.332221112 무(無)의 회귀 본능은, 거스를 수 없으며 피할 수도 없기에 필연성을 갖는다는 것 또한 증명될 수 있다.
 
5.3322211121 즉, 사람은 죽음을 대가로 인생을 살아간다.
 
6. 소멸한 자는 세상으로부터의 부재이다.
 
6.1 고통은 삶을 음수로 귀결시키지만,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6.11 소멸은 즉, 죽음이고, 죽음은 곧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6.2 세상으로부터의 부재의 의미는 사변적 ‘상태’를 지칭한다.
 
6.21 사변적 상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전이다.
 
6.211 말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함을 누락시켜서는 안된다.
 
6.212 즉 사변적인 것은 그림이론으로 하여금 말 할 수 없지만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6.2121 사변적이면서 의미를 갖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이 세상에는 의미 있는 사변적 존재들이 즐비하다.
 
6.21211 신, 양심, 인간성 등이 사변적 존재의 의미를 대표적으로 갖는다고 볼 수 있다.
 
6.212111 그러므로 죽음은 0, 소멸은 Null의 값이면서 서로 사변성을 지니지만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6.21212 어떠한 것의 의미는 고정적이지 않다.
 
6.212121 의미는 ‘상태‘와 ’맥락‘에 따라서 변화한다.
 
6.212122 이는 ‘미끄러진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6.2121211 그렇기에 고통과 죽음의 사변성으로 인하여 정확한 값을 측정할 수 없게 되어있다.
 
6.21212111 사변성에 의한 모호함이 값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오류를 자아내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6.212121111 이는 즉,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이유에 대해 증명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6.2121211111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삶을 지속하는 것은 궤변이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6.21212111111 여기서 말하는 궤변은, 사변적 명제에 대한 교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논리학적인 궤변을 뜻한다.
 
6.2121211112 역설적이게도 삶을 계속 사는 것에 대한 이유를 확인할 수 없다면, 이는 곧 죽어야한다는 것은 참이라고 볼 수 없다.
 
6.21212111121 삶을 사는 것과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세상으로부터의 부재의 존재의 당위성이 여기서 발생한다.
 
6.212121111211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는 죽음과 같지 않다. 논리학적으로 0과 Null이 같지 않은 것임으로 부재의 당위성은 자의성에 의한 타살이 아닌, 존재론적 회의성의 맹목적 욕망의 의지의 발현이다.
 
6.212121111212 존재의 부재의 사변성의 중요성만이 죽음과의 차이를 뚜렷하게 그 의미를 지칭하며, 의미적으로 ‘상태’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특성을 지닌다.
 
6.2121211112121 즉,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은 언어로 모사할 수 없기에 침묵하는 것이나, 이것에 대해 중요성을 논하는 것 만큼 인생에 있어서 큰 논제가 없다.
 
6.21212111121211 그 이유는 인간은 과정속 시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대상’이므로 ‘사태’와 ‘상황’을 조성할 수는 있지만, 이는 선험성에도 후험성에도 속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은 인간의 중대한 ‘방향성’에 대해 논하는 논제를 배제한 편협한 시각이다.
 
6.212121111212 하지만 삶의 이유는 ‘진리’만이 아니라는 변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6.212121111213 ‘행복’이라는 사변적 변수가 인생의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인생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6.2121211112131 행복과 그에 준하는 지대한 삶의 이유는 결핍을 충족함으로서 오는 ’과정‘으로부터의 산물이기에, 과정속에 살고있는 대상(인간)으로서는 삶을 지속할 이유가 될 수 있다.
 
6.2121211112132 인간이 살고자 하는 어떠한 행동과 그 의미의 기저는 행복과 연관이 있다.
 
6.21212111121321 그 이유는 ’행복‘이라는 변수는 삶을 사는 데 이유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6.212121111213211 즉 행복의 기원은 인간의 어떠한 것이 대한 성취를 위해서이다.
 
6.2121211112132111 단순한 예시로, 이 글을 적고있는 나는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증멸함으로서 얻는 성취감과 논리적 완벽함을 증명함으로서 얻은 성취감이 곧 행복으로 치환될 수 있다.
 
6.21212111121321111 이는 즉, 성취감 외 자신이 만족할만한 감정을 얻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는 행복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6.2121211112133 하지만, 이 ‘행복’이라는 것과 그에 준하는 감정은 항시 음수상태의 인생에의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게 하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6.21212111121331 다시 말 하자면, 음수성 즉, 삶은 고통이다 라는 전제는 유효하며, 죽음의 의미에 의한 변수의 개입으로 ‘죽어야한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6.212121111213311 여기서 말하는 ‘음수성‘은 하나의 결핍으로서도 볼 수 있다.
 
6.2121211112133111 즉, 이 결핍을 채우는(부재) 것이 변증법적 행복, 즉 평온한 상태로서의 귀결을 시사한다.
 
 
 6.2121211112134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인지 아니면 자의성에 의한 선택인지 논증해야만이, 제 1명재 ‘인생은 고통이다’를 설명할 수 있다.
 
6.21212111121341 인간은 본래 의지의 발현으로 인한 맹목적인 존재로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의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관점은 궤를 같이하나 의미가 약간 다르다.
 
6.212121111213411 ’인간은 행복하지 않기에 행복을 추구한다’라는 명재는 맹목성을 기반으로한 의지의 상태이다.
 
6.2121211112134111 즉, 행복하지 않은 상태, 행복을 충족하지 못 한 상태, 행복을 충족하더라도 삶은 음수성을 지속하기에,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재는 참이다.
 
6.21212111121341111 그러면 맹목적이지 않은 삶은 행복한가? 라는 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앞서 서술했던 ‘인식‘의 변수성으로 인한 자각이 자의성에 의한 고통을 받는 존재로 격상할 뿐이다.
 
 
6.3 즉 부재의 의미는 Null이라는 값이 고정된 의미가 아니다.
 
6.31 그러므로 죽음과 부재의 요청은 변화하기 때문에 인간은 의미가 있든 없든 ’상태‘와 ‘상황‘에 따라서 이를 요청할 수 있는 존재이다.  
 
6.311 요청의 기준은 자신의 사변적인 삶의 값이 자신이 생각한 값보다 아래에 있을 때 가치가 변화하는 시점의 값의 변동으로 인한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이다.
 
6.3111 즉, 임계점은 세상의 부재를 소망하는 결핍의 인식이다.
 
6.31111 결핍의 인식은 그 결핍이 채워지고자 하는 맹목적 욕구의 발현이다.
 
6.311111 하지만 ‘인식’은 맹목성을 자의성으로 바꾸게 해주는 변수이다.
 
6.311112 그렇기에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는 자의성에 의한 실행 욕구이다.
 
6.3111121 욕구는 즉, 맹목성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6.31111211 부재의 의미와 중요성을 자각(自覺)하고 부재의 대한 요청은 즉, 맹목성의 범주를 넘는, 즉 할 수 없는 것임을 뜻한다.
 
6.3111122 그렇기에 자살은 즉, 자의성에 의한 타살이다.
 
6.31111221 자의성에 의한 타살은 극단적 소각욕구의 발현이다.
 
6.311112211 극단적 소각욕구의 발현은 무언가를 없애버림으로 얻는 이득이 없애지 않는 것 보다 이득일 때 발현된다. 이는 즉, (나의)죽음으로 인한 세상으로부터의 부재가 낫다는 것이 참이다라는 것을 입증한다.
 
6.3111122111 정확히는 나의 삶은 고통으로 인하여 이미 음수에 있음을 전재했고, 이 음수의 값은 즉 죽음 혹은 소멸로 인하여 Null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인 음수보다 Null이 내가 앞서 말한 ‘평온’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에 이는 참이다.
 
6.32 부재의 의미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그 전재조건이다.
 
6.321 부재의 Null의 값은 당연하게도 없다.
 
6.3211 즉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의 핵심 내용인 게임이론의 형식으로 설명하자면, Null은 ‘없음’을 뜻하지만, 의미는 변화한다.
 
6.32111 인생의 음수성과 세상으로부터의 부재의 값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없다.
 
6.321111 하지만 의미의 변화는 단순한 예시로 1은 한 개를 지칭할 수 있으며 동시에 숫자 1을 의미할 수 있음으로, 수학적 계산식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6.3211111 즉,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는 누군가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인생의 고통(음수성)은 부재를 요청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6.322 삶을 지속함으로서 고통의 값과 부재의 의미를 대조해 봤을 때, 의미가 있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 고통의 음수로서의 가치 발현의 인과적 산물이다.
 
6.3221 즉, 인간은 이분법적분리본능의 발현으로 인한 인과적 선택은 시공간의 과정속 맹목적 의지의 선택이다.
 
6.32211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가치를 부여하고 맹목적으로 존재의 여부를 알려고 한다. 이는 이분법적 분리 본능이라고 설명가능하다. 왜냐면 이 글 자체가 이미 이분법적으로 진리를 해체하고자 하는 나의 인간으로서의 맥목성을 논하기 위해서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322111 이는 ‘보편진리 탐구’가 아닌 ‘가치 논증 본능 논고’라고 칭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 본능은 ’현대적 의지의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을 막기 위한 무의식적 행위의 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나는 인간이 삶을 지속하기 위한 어떠한 행위든 간에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을 저지하기 위한 이분법적 분리 본능의 발현이 인간의 내재된 행동 기저라고 간주한다. 이는 곧, 변증법적 행복과 맞닿아있다.
 
6.32212 ‘인식‘은 이러한 맹목성을 자의성으로 바꾸는 변수이지만, 이분법적분리본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는 맹목적이다.
 
6.322121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앞서 서술했듯, 인식의 트리거가 되기 때문인데,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을 통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자의성의 맹목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6.3221211 자의성은 맹목으로부터 발생하여 ’인식‘을 통해 그 본래 의미를 쟁취할 수 있으나, ’인식‘을 통하지 않은 자의성에 의한 선택은 맹목성이다.
 
6.32212111 자의성의 맹목성을 논하는 것은 메타인지적 분석에서 한 층 더 높은 시선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을 시사한다.
 
6.322122 즉, 이분법적분리본능과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행동을 상위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는 논리를 전제로 하여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자의적이다.
 
7. 사람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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