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이 전적으로 주관적이라는 말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문화마다 규범이 다르며 시대에 따라 도덕 판단도 변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만으로 선악이 전부 취향이나 사회적 합의에 불과하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대상에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역사 내내 사실 문제에서도 자주 틀렸고 과학적 진실에 대해서도 오래도록 의견이 갈렸다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도덕에서도 마찬가지다.
판단이 갈린다는 사실과 정답이 없다는 결론은 전혀 다른 말이다.

객관적 도덕을 옹호하려면 처음부터 도덕 전체를 한 번에 증명하려 할 필요가 없다.
훨씬 강한 방식은 최소한의 객관적 악이 존재한다는 점부터 세우는 것이다. 그 최소한의 출발점은 아무 보상도 없이 의식 있는 존재에게 가해지는 순수 고통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 고통은 단순히 “싫어하는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당사자에게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를 그 자체로 제공하는 경험이다.
뜨거운 것에 손이 닿으면 즉시 빼려 하고, 숨이 막히면 공기를 찾고, 극심한 통증이 오면 그것을 멈추려 한다.
이 반응은 문화 교육의 산물이기 이전에 의식 있는 존재가 고통을 겪을 때 드러나는 구조적 특징이다.
즉 고통은 단순히 어떤 이들이 우연히 싫어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회피 이유를 발생시키는 상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고통은 취향과 구별된다.

상대주의자는 여기서 곧바로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매운맛을 즐기고, 누군가는 고통을 참으며 성취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마조히즘적 성향도 보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이런 반론은 핵심을 비껴간다. 사람들이 감수하거나 심지어 선호하는 것은 대개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과 결합된 다른 가치다.
성취, 쾌감, 흥분, 의미, 정체성, 자기극복, 관계적 만족이 거기에 붙어 있기 때문에 감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긍정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얻는 다른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 보상도, 의미도, 쾌락도, 목적도 없이 가해지는 순수 고통 자체를 좋은 것으로 취급하는 의식 있는 존재는 거의 상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고통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는 말은 실제로는 순수 고통의 객관적 악성을 반박하지 못한다.

또 다른 상대주의자는 “도덕은 문화마다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금기, 성 규범, 가족 제도, 처벌 방식, 명예 개념은 문화마다 다르다.
그러나 문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도덕의 핵심 바닥까지 전부 상대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언어가 달라도 신체 손상은 손상이고,
전통이 달라도 극심한 고문은 괴로움이며 종교가 달라도 불필요한 공포와 절망은 당사자에게 해악이다.
문화는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를 만들 수는 있어도 불필요한 순수 고통이 당사자에게 해악이라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문화 상대성은 도덕의 모든 층위를 흔들 수는 있어도, 최소한의 객관적 악까지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상대주의자는 또 “사실에서 당위를 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가장 강한 철학적 반론 중 하나다.
실제로 “사람들이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만으로 곧장 “그러므로 고통은 나쁘다”라고 말하면 논리적 점프가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한다”가 아니라, 고통이라는 경험의 성격 자체가 당사자에게 그것을 피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즉 이것은 외부 관찰자가 취향을 집계하는 문제가 아니라, 경험 내부의 규범적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고통은 “인기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당사자에게 반대 이유를 발생시키는 상태”다. 바로 그래서 순수 고통의 악성은 단순 다수결이나 사회적 기호와 다르게 취급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진화가 우리를 그렇게 설계했을 뿐이지, 거기에 객관적 도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성향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설명은 그 성향의 규범적 의미를 자동으로 지워주지 못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도 진화의 산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학적 진리나 논리 법칙이 환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통 회피 성향이 진화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설명은
왜 의식 있는 존재가 그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하는지에 대한 발생 원인을 말해줄 뿐이다. 그것은 그 경험이 당사자에게 실제로 해악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논거가 아니다.
기원이 무엇이든, 극심한 고통은 여전히 당사자에게서 벗어나야 할 상태로 주어진다.

어떤 상대주의자는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정신병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나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남의 고통을 나쁘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객관성의 반박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수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수학 명제가 무너지지 않듯,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고통의 해악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감 결여는 객관적 도덕의 반례가 아니라, 
도덕 인식의 결함 사례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감각이 마비된 사람이 뜨거움을 못 느낀다고 해서 화상이 해롭지 않은 것이 아니듯,
도덕적 둔감성도 대상의 객관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식자의 결함을 보여줄 뿐이다.

또 하나 자주 나오는 반론은 자살이다. “어떤 사람은 삶보다 죽음을 택하니, 고통 회피가 절대 기준일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자살은 오히려 반대로 읽어야 한다. 사람은 대체로 생존을 원한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이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속되는 고통이 그만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살은 고통 회피가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생존 본능보다도 고통의 중지가
더 강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순수 고통이 얼마나 근본적인 회피 대상인지를 드러내는 사례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도덕 전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정의, 자유, 권리, 책임, 진실, 자율성 같은 가치들은 단순히 고통의 양만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오히려 논증을 더 조심스럽고 더 강하게 만든다. 주장할 것은 “모든 도덕은 오직 고통으로만 설명된다”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방어력 높은 주장은 이것이다.

아무런 정당화도 없이 의식 있는 존재의 순수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은, 그만큼 객관적으로 나쁘다.

이 명제는 전면적인 공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성립할 수 있고, 문화 차이를 인정해도 성립할 수 있으며, 의견 불일치를 인정해도 성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명제의 핵심은 사회가 무엇을 칭찬하느냐가 아니라, 고통이라는 상태 자체가 당사자에게 해악으로 주어진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선악이 전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사람들의 도덕 판단이 자주 어긋난다는 사실, 문화마다 규범이 다르다는 사실,
도덕 이론들이 서로 경쟁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일치 아래에서도 최소한 하나는 남는다.
 
불필요한 순수 고통은 나쁘다. 

이것조차 부정하려면, 고통이 왜 문제인지가 아니라 문제 자체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의식 있는 존재의 경험을 완전히 공허한 것으로 취급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 지점에서 상대주의는 관용이나 겸손이 아니라, 현실의 해악을 개념적으로 지워버리는 입장이 된다.

그래서 정확한 결론은 이렇다.

도덕의 모든 내용이 단번에 객관적으로 확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불필요한 순수 고통의 악성만큼은 단순 취향이나 사회적 유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지점에서 객관적 도덕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