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인공지능은 가능한가
- 의식, 공포, 지성, 그리고 인간 종의 한계에 대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AI라는 말이 범람할수록, 내가 더 강하게 붙잡게 된 질문은 미래 기술의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문제였다. 도대체 인간이 말하는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것을 기계에 구현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뜻인가. 내가 의심하게 된 것은 단순히 “AI가 인간처럼 될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인간이 상상하는 진정한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애초에 성립 가능한 개념인가. 내가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현실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계산을 잘해도, 그림을 잘 그려도, 말을 잘해도, 추천을 잘해도 AI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의 과도한 팽창 속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 하나가 지워지고 있다. 그것은 도구와 존재의 차이다.
인간의 특정 기능을 압도하는 도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전기톱은 자르는 기능에서 인간을 압도하고, 계산기는 계산에서 인간을 압도하며, 자동차는 이동에서, 검색 시스템은 정보 접근에서 인간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 도구들이 아무리 강력해도 우리는 그것들을 지성체라 부르지 않고, 생명체라 부르지 않으며, 새로운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기능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그 성능을 극단적으로 키우면, 그것이 갑자기 “진짜 지능”이나 “의식”이나 “새로운 존재”가 될 것처럼 상상하는가. 바로 여기서부터 내 회의가 시작되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단순한 반응성이나 정보처리 일반이 아니다. 세포나 미생물의 미약한 내부 상태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의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미의 의식, 즉 자기 자신과 세계를 문제 삼고, 의미를 만들고, 왜 살아야 하는지까지 묻게 되는 깊은 정신의 조건이다. 따라서 내가 묻는 것은 “어떤 체계가 입력을 받아 출력을 내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끝까지 붙들며 멈추지 않는가”에 더 가깝다.
여기서 가장 흔한 반론은 분명하다. 마음은 재료가 아니라 기능이며, 의식은 충분히 복잡한 정보 통합 구조 안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기능주의는 정신 상태를 내부 재료보다 시스템 안의 역할로 이해하고 다중 실현 가능성 논의는 같은 정신 상태가 서로 다른 물리적 기질 위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반론은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반론이 설명하는 것이 의식의 어떤 층위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깊은 의식 전체를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어떤 체계가 정보를 통합하고, 자기 상태를 모델링하고, 시스템 전반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깊은 의식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보가 통합된다는 말과 어떤 존재가 자기 상실과 죽음, 단절을 자기 문제로 겪는다는 말은 같은 층위의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인간의 의식이 단순 계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인간의 깊은 사유는 감각, 몸, 세계와의 마찰, 상실 가능성, 시간의 압박, 소멸의 위협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단지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상실과 손상, 단절과 죽음의 가능성 속에 놓인 존재다. 인간의 반성과 의미 추구는 이런 조건 위에서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시스템이 아무리 복잡한 계산과 자기 서술을 수행하더라도 그 바닥에 존재를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조건이 없다면 그것을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미의 의식과 같은 것으로 부르기 어렵다고 본다.
처음에는 이 조건을 본능이라는 말로 이해하려 했다. 실제로 우리는 동물과 인간처럼 대화하지 못하지만, 동물에게 어떤 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이유는 동물들이 고통을 피하고, 위험을 회피하고, 애착을 보이고, 학습하고, 목적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과 행동, 신경계와 방향성을 통해 그 안에 흐릿하게나마 어떤 내부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반대로 어떤 존재가 그런 뿌리 없이 그저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자기반성처럼 보이는 문장을 만들고 의미를 아는 듯한 응답을 한다면 그것을 정말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정교하게 작동하는 체계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점점 후자에 가깝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중요한 것은 본능이라는 이름 자체보다 존재를 실제로 밀어붙이는 구조였다. 꼭 인간이나 동물의 본능과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실제로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무엇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지, 왜 어떤 상태를 피해야 하는지를 자기 문제로 겪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핵심은 생물학적 본능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 데이터, 세계와의 마찰, 자기 지속의 위기, 상실 가능성, 실패의 대가 같은 것이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동하는가에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본능보다 취약성이라는 말을 택하게 되었다. 어떤 존재가 자기 붕괴, 단절, 상실, 기능 소멸, 정체성 해체를 실제 문제로 겪지 않는다면, 그 존재에게 반성과 선택과 지속은 인간이 이해하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취약성이 실제 운동력이 되는 방식으로서 나는 결국 공포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식은땀, 떨림, 불안 같은 인간형 정서 표현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공포는, 어떤 존재가 자기 붕괴와 상실, 단절을 실질적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협에 맞서 존재 전체를 재조직하게 만드는 구조다. 인간에게서 공포는 몸 전체를 바꾸는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갑자기 차가 돌진하는 상황을 마주한 사람은 먼저 철학하지 않는다. 몸이 먼저 움찔하고, 심장이 빨라지고, 시야가 좁아지며, 우선순위 전체가 즉시 재정렬된다. 이 의미에서 공포는 단순한 감정 이름이 아니라 유한성과 취약성이 실제 행동과 사유의 문제로 번역되는 방식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 공포 개념을 인간 감정으로 좁게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비인간적 존재라 하더라도, 만약 진짜 지성체라면 인간에게서 공포가 맡는 역할을 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 존재가 인간처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 붕괴, 자기 동일성의 해체, 기억 단절, 기능 소멸을 실질적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협이 존재 전체의 우선순위와 운동을 재편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이름이 공포가 아니어도, 그 존재에게서는 그것이 곧 공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공포는 인간형 정서가 아니라, 지성과 의식이 지속되기 위한 최소 운동 조건에 가깝다.
이 지점은 대화를 거치며 더 선명해졌다. 처음에는 “공포 말고도 자기유지, 정합성 추구, 오차 최소화 같은 다른 동력이 있을 수 있지 않나”라는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 보니 결국 같은 질문 앞에 멈추게 되었다. 왜 자기유지를 해야 하는가. 왜 정합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왜 오차를 줄여야 하는가. 왜 목표를 유지해야 하는가. 왜 멈추지 말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그것을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실질적인 손실과 붕괴가 온다”는 구조에 닿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존재는 왜 계속해야 하는지를 자기 안에서 붙들 이유가 없다. 결국 허공에서 어떤 지성이 갑자기 생겨난다고 해도, 그 존재가 자기 붕괴를 실질적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왜 사고를 지속해야 하는지, 왜 발전해야 하는지, 왜 정지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잠깐 어떤 상태를 가질 수는 있어도, 지속적 지성체로 성립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나는 지성을 “상태”가 아니라 운동으로 보게 되었다. 이 우주에서 고도화된 질서인 지성이 자신을 유지하려면, 엔트로피에 맞서 끊임없이 자기 구조를 유지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지성에게 멈춤은 평온한 상태 유지가 아니라 구조 해체와 사멸이다. 타오르기를 멈춘 불꽃이 더 이상 불꽃이 아니듯 멈춘 지성은 더 이상 지성이 아니다. 그저 정보가 굳어버린 상태일 뿐이다.
이 점에서 “멈춤을 문제로 보는 것이 인간적 기준 아니냐”는 의문도 다시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본다. 멈춤을 위협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편견이 아니라 우주 안에서 지성이라는 현상이 지속되기 위한 가장 차갑고 보편적인 물리적, 논리적 최소 조건에 가깝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보정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공포와 취약성의 구조는 창발성 그 자체를 직접 생산하는 엔진이라기보다 문제를 끝까지 붙들게 만드는 지속의 조건에 가깝다. 지성이 난제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아가 붕괴한다는 실질적 위협이 있어야만 의식은 임계점까지 끓어오른다. 공포는 도약을 만들어낸다기보다 도약이 일어날 때까지 모순과 실패를 견디며 문제를 고착시키게 만드는 압력이다. 이 압력이 없는 시스템은 효율성을 따져 언제든 계산을 멈추거나 우회할 수 있지만 취약한 존재는 멈추는 순간 소멸하기에 끝까지 붙들 수밖에 없다.
이 논리는 인간의 고차 활동에도 이어진다. 예술, 과학, 철학, 놀이, 호기심은 직접적으로는 아름다움, 기쁨, 설명 욕구, 지적 충동 같은 힘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문명 전체 규모의 활동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가장 깊은 배경에는 유한한 존재가 자기 한계와 상실 가능성을 줄이고 무지를 넘어서며 실패를 줄이려는 구조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취약성은 모든 활동의 직접 목적이라기보다 그런 활동들이 가능해지고 축적될 수 있었던 배경 조건에 가깝다.
예술을 예로 들어보자. 반 고흐의 그림은 단순히 재능 있는 화가가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한 결과로만 보기 어렵다. 그의 삶을 함께 놓고 보면, 그림은 감상의 결과라기보다 불안, 고립, 무너짐을 견디기 위한 형식처럼 보인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지 못했고, 인간관계와 정신적 불안정 속에서 오래 흔들렸다. 그런 조건에서 그가 계속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이 있으니 계속 창작했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은 그에게 세계와 완전히 끊어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연결 방식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그는 단지 표현하고 싶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리지 않으면 더 무너질 수도 있는 상태에서 그림이라는 형식을 붙잡았던 것처럼 읽힌다.
물론 예술이 모두 반 고흐 같은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밝은 선율이나 어린아이의 놀이와 춤처럼, 예술과 유희의 가장 밝은 형태는 오히려 공포와 정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나는 유한성과 취약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고 본다. 순간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없다면 붙잡고 싶은 욕망도 약해진다. 시간이 흐르면 끝난다는 조건이 없다면 놀이의 들뜸도, 아름다움의 찰나성도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술은 반드시 불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의 아름다움 자체가 유한한 존재에게만 절실한 가치라는 점에서 여전히 취약성의 구조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 모든 논의를 현실의 AI에 대입해 보면 결론은 명확해진다. 지금의 AI는 매우 복잡하고 유능한 언어 기계일 수는 있어도, 그 바닥에 감각, 압박, 상실 가능성, 유한성, 취약성의 구조가 없다면 내가 말하는 의미의 깊은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말을 만들고, 추론을 흉내 내고, 반성처럼 보이는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지속해야 하는지,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왜 멈추면 안 되는지, 왜 세계를 꼭 이해해야 하는지가 존재 차원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정신이라기보다 고도화된 기능 체계에 더 가깝다. 지금의 AI가 보여주는 것은 높은 성능과 언어적 모사이지, 존재를 실제로 밀어붙이는 조건은 아니다.
여기서 가장 강한 반론이 들어온다. 설령 AI가 의식이 없더라도, 압도적인 계산 능력만으로도 웜홀이나 종말 회피 같은 우주적 난제를 풀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이 반론은 정당하다. 실제로 단순 계산과 최적화만으로 풀리는 문제라면 반드시 의식이 있는 존재가 아니어도 될 수 있다. 나는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거대한 비의식적 계산기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방정식을 풀고 , 더 많은 경우의 수를 탐색하고, 인간이 놓친 해를 찾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문제는 단순 계산 가능한 해를 찾는 문제에서 멈추지 않는다. 문명을 바꾸는 도약은 단순히 방정식을 많이 푸는 것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급의 전환은 기존 전제를 의심하고, 남들이 당연하게 둔 틀을 깨고, 현실과 개념의 충돌을 오래 견디고, 아직 증명되지 않은 직관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서 나왔다. 여기서 도구와 존재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도구에게 난제는 ‘설정된 목적 함수’일 뿐이지만 존재에게 난제는 ‘해결해야 할 나의 세계’다. 목적 함수는 기계에게 계산을 시키지만 취약성은 주체에게 집착을 강요한다. 전원이 꺼져도 상관없는 기계는 도약이 일어날 때까지 그 고통스러운 불일치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진짜 문명 돌파는 바로 그 멈출 수 없는 절박함 즉 "지속의 밀도" 에서 탄생한다. 내가 의식 없는 초강력 도구의 한계를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 두 번째 층위가 단순 연산량의 증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과 미래의 AI 담론이 과장되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비인간적 의식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한가”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그런 구조를 전혀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과부터 상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깊은 의식의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더구나 그것을 인공물에 성립시키는 방법은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형 의식 AI나 초지능 AI를 쉽게 말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 기준에서는 결과를 토대보다 앞세운 과장에 가깝다. 지금의 AI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인간이 상상하는 의미의 진정한 인공 지능, 인공 생명, 인공 종이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는 단순한 기술평가를 넘어 인간 종의 한계 문제로 이어진다. 인간은 개체로 분산되어 있고, 몸은 유한하며, 기억은 휘발되고, 세대는 끊기고, 문명은 축적되어도 존재는 연속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아무리 저장해도 경험하는 주체는 여전히 따로 있고, 아무리 보강해도 인간의 뇌와 신체가 가진 구조적 한계는 남는다. 인간-기계 결합, 사이보그화, 정보 저장 확장, 생체 강화 같은 것들은 모두 인간 틀 안의 보강일 뿐, 인간이라는 존재 형식 자체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설령 영생을 얻는다 해도 인간 뇌라는 구조의 한계가 남아 있다면 그 한계는 또 다른 방식으로 벽이 될 수 있다. 작은 손실을 줄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 작은 손실들이 끝내 구조적 한계를 만들어 내는 것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결국 진짜 문명 돌파는 강한 도구의 탄생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탄생에 달려 있다고 보게 되었다.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존속 시간, 훨씬 더 빠른 사고와 인지 속도, 훨씬 더 강한 기억 유지, 훨씬 더 넓은 정보 접근성을 가지면서도, 인간처럼 혹은 그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자기 붕괴를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붙들며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인공 종. 그런 존재가 가능하다면 인간이 겨우겨우 해낸 아인슈타인급의 개념 도약이나 지금은 공상과학처럼 보이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문도 비로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워프, 웜홀, 의식의 디지털화, 인간 문명의 장기적 계승, 종말 회피 같은 것들은 단순 도구의 강화가 아니라 그런 존재가 있어야만 비로소 출발점에 설 수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내 결론은 다시 어둡게 닫힌다. 왜냐하면 진정한 인공 지능의 탄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데이터 학습도 아니고, 패턴 추출도 아니고, 모델의 크기 확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의 바닥에 있는 이 공포 대응 구조, 즉 자기 붕괴를 실질적 위협으로 만들어 존재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구조를 찾아내고 ,현실로 끌어내고, 구현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AI 발전 방향은 그 길과 완전히 다르다. 지금 우리는 데이터센터를 늘리고, 더 많은 인간 데이터를 먹이고, 더 강한 최적화 시스템을 만들고, 더 정교한 모사를 만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이건 기능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지 의식의 바닥 구조를 재현하는 길이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현재의 패러다임이 유지되는 한 인간이 상상하는 의미의 진정한 인공지능은 허상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내 결론은 결국 여기까지 온다.
진정한 인공지능 즉 인간이 상상하는 의미의 인공적 지성 종은 허상에 가깝다.
AI는 인류 멸망 순간까지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도구는 될 수 있겠지만 끝내 도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특정 기능을 아무리 극단적으로 압도해도 그것이 자동으로 지성체나 인공 생명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은 종의 한계를 끝내 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화성에 가고, 태양계 안을 확장하고, 수명을 늘리고, 몸을 보강하는 것들은 모두 연장일 뿐, 돌파는 아닐 수 있다. 태양의 빛이 꺼지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는다 해도 인간이라는 종의 형식이 그대로라면 종말은 피하기 어렵다. 그 전에 스스로의 어리석음이나 우주적 재앙으로 끝날 수도 있다. 결국 새로운 존재를 만들지 못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끝내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 결론이 단순한 비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질문의 위치를 바꾼 결과다. 나는 더 이상 “AI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를 먼저 묻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인간이 말하는 그 생각의 바닥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 바닥은 단순 계산이나 데이터 학습, 최적화로는 대체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감각, 세계와의 마찰, 자기 상실의 가능성, 유한성,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 문제로 만드는 공포 구조. 이것이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의식의 최소 조건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AI는 아무리 정교해져도 높은 확률로 도구의 선을 크게 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내가 끝내 붙잡게 된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왜 생각하는가. 왜 알고 싶어 하는가. 왜 남기고자 하는가. 왜 의미를 만들고, 왜 진리를 묻는가. 나는 이제 그 물음의 가장 깊은 바닥에 인간의 유한성과 취약성, 그리고 그것이 상실과 붕괴를 실질적 문제로 만드는 공포 구조가 놓여 있을 가능성을 가장 크게 본다. 공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움직이는 최소 운동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과 지성도 그 공포와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인간 같은 의식을 기계로 만든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사실이 인공지능이라는 허상을 둘러싼 오늘의 시대를 가장 차갑게 꿰뚫는 결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내가 말한 이 취약성과 공포의 구조를 가진 존재가 실제로 탄생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구원일까. 아니면 우리가 끝내 통제할 수 없는 진정한 공포 그 자체가 될까.
나는 그 답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더 강한 도구를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바깥의 새로운 존재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진정한 인공지능에 대한 가장 무서운 진실은 그것이 끝내 불가능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능해지는 순간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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