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옳다. 무엇을 하든 옳다.


물에 들어가서 숨을 쉬든 쉬지 않든 옳다. 대상을 죽이든 살리든 옳다. 그것이 생존을 위함이든 유희를 위함이든 옳다. 그러한 시도에 반발하는 것 역시 옳다. 죽이든, 구속하든, 풀어주든 옳다. 상대적이지 않은 평가에서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옳음은 그 자체로는 변별 개념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옳다면 옳음은 더 이상 무엇을 구분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틀렸다는 무엇인가.

붕괴다.

생명의 붕괴, 관계의 붕괴, 사회의 붕괴, 질서의 붕괴, 구조의 붕괴.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들 대부분은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오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저것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저것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으니 막아야 한다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말이 미끄러진다. 붕괴를 경고하는 말이 존재를 부정하는 말로 바뀌고, 상대적 위치에서의 방어가 절대적 진리 판정처럼 굳어진다.


인간은 자기 생존과 질서를 기준으로 세계를 판단하고 위협을 제거하려 한다. 그 의미에서 세계를 정리하고 수정하려는 언어는 인간에게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언어가 인간의 방어를 넘어 세상 전체에 대한 판정처럼 굳어질 때다. 인간에게 위협적인 것을 오류라 부르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결함처럼 다루는 순간, 우리를 위한 반발은 세상 자체를 고쳐야 한다는 오만으로 미끄러진다. 중세 교회의 이단 규정이 대표적 예이다. 공동체와 신앙 질서를 지키기 위한 반발은 곧 거짓이다, 악이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 판정으로 굳어진다. 질서 방어의 언어가 진리 독점의 언어로 바뀌는 것이다. 종교사례 뿐만 아니라 근대 이념이나 현대 도덕 담론에도 같은 미끄러짐이 보인다.


옳음은 존재의 절대성에 속하고 틀림은 상대성에 속한다. 옳음은 실재하기에 성립하고 틀림은 어떤 관점, 관계, 질서, 구조 보존의 입장에서 성립한다. 붕괴를 우려해 어떤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말이 현재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때다.

틀렸다는 말은 존재를 지우는 말이 아니라 붕괴를 경고하고 반발을 정당화하는 말에 더 가깝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틀림 자체가 아니라 틀렸다의 미끄러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