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 붙일 수 없는 불행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불행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이 왜 불행한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무엇을 고치면 나아질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소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불행의 정체는 대부분 ‘조급함’이다. 그리고 이 조급함은 단지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생산하고, 유지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조급함이 일상에 너무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당사자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치 미세먼지가 심해도 평소 공기와 차이를 못 느끼듯, 여러분들도 역시 조급함이라는 대기에 길들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 한국인들은 어떤 외부의 계기—예를 들어 외국 생활이나 완전히 다른 삶의 리듬을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를 통해서야 비로소 “내가 그동안 너무 조급하게 살아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2. 조급함은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조급함은 단지 느긋함의 부족이나 시간 관리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과 삶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정신적 압박감이다.
조급함은 사람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상황에서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단기적인 손해를 두려워한 나머지 장기적으로 더 바람직한 선택을 포기하게 만든다. 조급한 사람은 항상 ‘지금 당장’에 매몰되어, 한 발짝 뒤에서 전체를 조망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주식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모두 잃는 경우가 있다. 중장년층의 경우에도 회사에서 나온 후에 자영업을 하다가 그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잃는 사례가 있다. 겉으로 보면 이런 사례들은 무모한 개인의 실수 같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지금이라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영영 낙오한다”는 공포가 있다. 청년층에게는 재산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감, 중장년층에게는 지금의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뒤쳐진다는 공포가 사람들의 뇌를 지배한 결과, 조급함이 이성적 판단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3. 조급함은 가난에서 오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조급함은 경제적 빈곤의 산물이 아니다. 나 역시 한때 이 조급함의 원인을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을 다니며 나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훨씬 느긋하게, 그리고 때로는 훨씬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중남미나 동남아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빈곤한 환경에 있었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초조함이 없었다. 그들은 불안에 쫓겨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며 살았다. 물론 그 사회들에도 나름의 구조적 압박과 고통이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한국에서처럼 ‘조급함’이라는 특정한 형태로 발현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삶의 리듬과 판단 기준이 있었고, 그 안에서 충분히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조급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계층 이동 가능성이 선진국 중에서도 낮은 편이라는 사실이다. 즉, 한국은 실제로 계층 이동이 잘 일어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다”는 서사를 내면화하고 있고, 그 서사에 쫓기며 산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의식은 고성장 시대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급함의 진짜 메커니즘이 드러난다. 한국 사회가 생산하는 것은 실제 기회가 아니라, 기회가 있다는 환상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지금 잡지 않으면 영영 놓친다”는 공포와 결합한다. 실제로는 올라가기 극히 어려운 구조이면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 가능성의 환상이 의무가 되고, 그 의무의 실패가 수치가 되는 곳. 이것이 조급함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핵심 구조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나아졌음에도 훨씬 더 조급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급함의 원인은 실제 결핍도, 실제 기회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회를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서사, 그리고 그 서사에 부응하지 못할 때 돌아오는 구조적 비난이다.
4. “남에게 피해 주지 마라”는 말의 위선
조급함은 단순히 내면의 압박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을 벗어나려는 개인을 다시 끌어들이는 외부의 통제 장치가 있다. 한국 사회는 조급함을 도덕적 언어로 포장하여 확산시키는데, 그 대표적 도구가 “남에게 피해 주지 마라”는 말이다.
만약 어떤 개인이 조급함을 버리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템포대로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곧바로 이 말과 맞닥뜨리게 된다. 재산을 모으는 것을 게을리해서 나중에 가난뱅이가 되어 사회에 짐이 되면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논리이다.
이 말은 겉보기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 원칙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관찰하면, 대부분은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개인의 삶을 간섭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실질적 피해 여부를 따지기보다, ‘내가 불쾌하다’는 감정을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앞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중에 가난해져서 사회에 주는 피해가 그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만큼 치명적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사업하다 파산해서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사업을 할 자유도 제한해야 하고, 자동차 매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니 운전도 제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려면 사회 공익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커야 한다. 단순히 급하고 바쁘게 살지 않는다고 남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피해’란 사실이 아니라 편견이며, ‘공익’이란 특정 집단의 불쾌함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어떤 행동이 실제로 해를 끼치는지와 무관하게, 집단이 싫어하면 그것은 ‘피해’가 되고, 개인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판단의 기준이 사실이 아니라 정서이며, 책임의 주체가 행위자가 아니라 분위기인 셈이다. 이것이 조급함의 외피다. 사회가 심어놓은 속도에서 이탈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도덕적 제재.
5. 비판은 넘치고, 책임은 없다
조급함을 유지시키는 또 다른 장치는, 비판에는 적극적이지만 그 비판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이 사회의 기묘한 습성이다.
누군가가 병역 거부를 표명하거나, 노키즈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마스크 해제 이후에도 마스크를 벗는 것에 대해 입장을 밝히면, 주변에서는 곧바로 “그건 공공의 피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피해’인지, 단지 자신의 불편함을 도덕적 언어로 치환한 것인지는 성찰하지 않는다.
그 구조를 정직하게 풀어쓰면 이렇다. “나는 이것이 싫다. 그러나 단지 ‘싫다’고 말하면 내가 편협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 ‘공익’이라는 말을 가져와서 너를 비난하겠다.” 감정을 원리로 위장하고, 개인의 불쾌를 사회적 정의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조급함의 궤도를 이탈하려는 개인에게 특히 가혹하게 작동한다. ‘다르게 산다’는 선택은 곧 ‘잘못 산다’로 번역되고, 번역의 근거는 논리가 아니라 다수의 불쾌감이다.
6. 제도화된 무책임
한국 사회는 ‘말 안 해도 알지’라는 비언어적 압력을 선호한다. 명시적 규칙 대신 암묵적 분위기로 사람을 통제한다. 그 결과, 명확한 기준도, 명확한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선택을 제한하되, 그로 인해 누군가가 불행해지면 “그건 네 선택이잖아”라고 말한다. 압력은 구조가 행사하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한다. 조급함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속도를 강요하고, 그 속도에 짓눌려 쓰러지면 “자기관리 실패”라고 판정한다. 이중적이며 무책임한 구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착하게 살라”는 말은 “타인의 기분을 건드리지 마라”는 뜻일 뿐이며, 그 ‘기분’은 어떤 원칙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항상 조심스럽게 읽어내야 하는 사회적 기류에 달려 있다. 그것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한국인들은 그 실체 없는 공기에 질식당하고 있다.
7.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는 법
한국 사회는 개인의 내면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조급함, 도덕적 압박, 공익이라는 이름의 궤변, 그리고 무책임한 사회적 분위기.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지금 나를 짓누르는 것이 나의 나태함인지, 아니면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심어놓은 조급함인지를 구분하는 것. 그 구분만으로도, 대부분은 불필요한 자기 비난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다.
조급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게으르게 살겠다는 뜻이 아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속도가 아닌, 자신의 속도를 되찾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이 가능해지려면, ‘빨리빨리’를 미덕으로, ‘뒤처짐’을 죄악으로 만들어놓은 이 구조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
당신의 불행은 당신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불행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누구의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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