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예수가 정신이 잘못된 걸까요? 어떻게 예수가 한 번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는 사탄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을까요? 더 깊은 진실은 예수는 일반적으로 “사탄”이라는 말을 특정한 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순수한 직관력을 통해, 예수가 높은 진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것은(다른 일부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만약 예수가 높은 진동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높은 의식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는 나 역시도 이와 같은 높은 의식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에게는 이것이 사실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와 동일한 의식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오직 현재의 의식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여행으로, 예수가 나를 데려갈 수 있도록 해야만, 가능해지게 됩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요소, 즉 하나의 의식상태를 버리기 위해, 그러한 의식상태에 기초하고 있는 자아를 죽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다음의 문구를 살펴봅시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가 나를 “따라오려거든(coming after)”이라고 말했던 것은 예수가 보여주었던 의식상태, 즉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신비주의의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외적이고, 지적인 지식을 제공해줌으로써, 학생들이 시험을 통해 그러한 지식을 별 생각 없이 되풀이하고, 졸업장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목표는 학생들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예수가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지적인 이야기를 재치 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 많은 신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성취한 것과 동일한 수준의 그리스도임을 학생들이 획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복제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여러분은 예수가 스승으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여길 거라고 생각하나요?


예수를 따르는데 무엇이 필요할까요? 여러분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임에 이르는 길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4개의 팔(arms)로, 즉 하위의 4개 몸체들로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각각의 몸체 속에는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추락한 존재들이 만들어놓은 환상을 마음의 4개 층들에서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는 것).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이 말은 현재 지니고 있는 환상들에 기초하여, 여러분이 특정한 자아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아는 완벽해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종교를 따른다는 측면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관계없이, 그러한 자아는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추락한 존재들이 만들어낸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임에 이르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의식의 144단계라는 나선형의 계단을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단계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자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다면, 즉 이러한 하위의 자아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예수와 결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 이러한 하위의 자아들을 버리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정말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only begotten Son of the Father)”란 개인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의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상승한 상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이원성에 빠져, 길을 잃게 된 이후, 당초의 순수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입니다.


대부분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현재의 자아를 죽게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태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문구를 통해, 베드로가 분명히 어떤 정신적인 이미지, 즉 예수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어떻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당국으로부터 많은 굴욕을 당하게 될 거라고 말했을 때, 이러한 이미지는 베드로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이상적으로는, 이러한 불일치를 이용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이미지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를 의심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결국 죽게 하고, 다음 단계의 의식으로 올라서려고 했어야 했습니다. 그 대신에,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이러한 이미지를 예수에게 투사하고자 했으며, 예수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따라주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의 추종자였다는 것을 세 번이나 부정함으로써.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이러한 정신적인 이미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바로 예수가 실제로 “사탄”이라고 불렀던 의식입니다. 이것은 추락한 존재들의 특징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지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는 여기에 태어날 권리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설사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추락한 존재들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정신적인 이미지에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여기에 반박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도 물질의 높은 밀도를 포함하여, 지구에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포함하여, 예수가 행했거나, 말했던 많은 것들은 집단적인 정신이미지, 즉 물질의 높은 밀도로 인해, 우리가 특정한 한계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이러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현재와 같은 물질의 높은 밀도는 집단의식으로 인해 생겨난 산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집단의식을 끌어올림으로써, 물질의 밀도를 낮출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으로서는(현재의 의식 수준으로), 많은 것들이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면(그리스도 의식으로는), 모든 것들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