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php?id=2eb5d928e0c13da27cbedbb405&no=29bcc427b38b77a16fb3dab004c86b6f113d37b1bcb96f755b6c03c5684ab77fe56522e67d999905f7a2e31039134c95ff22cbb93fc0544cd75ceaf1cb6af918945048



5-(6) 31편  32편 33편 34편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일에 기가 쭉 빠진 청명은 다시 씻고 나서도 한동안 소파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어. 침대엔 명대가 누워있는 터라 갈 엄두가 안 났지. 물론, 그렇다고 얌전히 침대 위에 박혀만 있을 명대가 아닌지라 소파에 반쯤 누워있는 청명에게 쪼르르 쫓아왔어. 혹시나 아직도 옷을 안 입고 있을까봐 흘끗 봤더니, 알몸은 아니지만 가운만 걸치고 있으니 이거나 저거나 진배없어. 목구멍으로 한숨을 쏟아 부으며 팔을 들어 눈을 가렸어. 눈 감기 전에 시계를 봤는데 곧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 더 막막하지. 명대는 여전히 갈 생각이 없어 보여.


"집은."

"하루 더 외박할래요."

"...."


집 주인이 그래도 된다고 한 적도 없는데 당당하게 대꾸하고는 반대편 소파에 대충 던져둔 청명의 자켓을 끌어 가져왔지. 늘어진 그를 당겨 앉히곤 팔에 자켓을 꿰어주는데 청명의 기분이 이상해서 명대를 거절하며 알아서 입겠다고 했어.


"어때요."

"뭐가?"

"나 아까 엄청 현모양처 같지 않았어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뭐예요?"


본인이랑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단어를 매치시키려 하다니. 안 어울린다는 것도 아니고, 무섭다고 표현하는 청명이 마음에 안 들어 길게 노려보더니 이내 긴 다리를 쭉 펴서 낮은 테이블 위에 올리며 입을 내밀었지.


"하긴. 난 그런 거랑 안 어울려. 난 섹시한 거지."

"...어서 집에나 가."

"교수님 빨리 출근 안 해요?"

“학교 안 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굳이 허리를 꾹 누르며 아프다고 말하는데, 그에 헛기침한 청명은 아프다는 애한테 학교 가라고 억지 쓸 수도 없어서 영 미적지근한 반응을 했지. 전혀 아픈 기색이 없는데. 손목의 단추를 잠그면서도 못 믿는 기색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을 느껴 일부러 허리를 과하게 꼬며 신음했어.


“으으응, 너무 아프다.”

“....”

“허리랑 엉덩이가 왜 이렇게 아프지?”

“갔다 올게. 사고치지 말고 있어.”

"내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누가 들으면 제가 매일 사고치는 줄 알겠어요."

"그럼, 아니야?"

"아니죠. 출근 안 해요?"


뻔뻔하게 본인은 사고를 치지 않는다 하는 거에 기가 막히지만, 명대 말대로 출근해야하니 더 이상 이야기를 끌지 않기로 했어. 푸욱 한숨을 내쉬곤 잡지를 성의 없이 뒤적이는 명대의 머리를 쓰다듬었지.


"어쨌든... 얌전히 있어."

"알았으니까 빨리 갔다 와요."

"정말 오늘 집에 안 갈 거야?"

"그렇다니까."


하루 더 외박하면 명대 형님들이 전화 할 거 같은데. 거의 극성에 가까운 두 형님들을 알고 있으니 답답해서 한숨만 나와. 하지만 엄살일지 몰라도 아프다는데 억지로 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거기다 자꾸만 어제 일에 거기다 그런 꿈을 꿨는데 일어나자마자 바로.. 한 것도 마음에 걸렸어. 나이 많은 본인이 죄지...


"좀 더 자고 있어. 갔다 올 테니까."

“다녀와요, 여보-.”

“....”


명대가 일부러 콧소리를 내며 여보오옹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리자, 당연히 청명의 표정이 와자작 구겨져. 끔찍한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으로 아예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쳐대는데, 장난이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진심이 담겨 있었던 터라 바로 삐져서 끌어안고 있던 쿠션을 그에게로 집어던졌어. 가슴팍에 퍽 맞고 떨어진 쿠션이 발치에 떨어지고, 하나도 타격이 없는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곤 쿠션을 들어 소파 위에 올렸지.


“진짜 갔다 올게.”

“그러시던가.”


여보에 대한 반응이 영 좋지 않아 명대의 대답도 순식간에 180도로 변화했는데, 거기까지 케어할 정신이 없는 고교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섰어.


일부러 본인이 제일 자신 있는 45도 각도로 고개를 꺾고 있던 명대의 얼굴도 쿵 닫히는 문소리에 편안한 자세로 돌아왔지. 좀 삐지긴 삐졌지만 그렇다고 명대의 여보 소리에 고청명이 응, 여보 나도 사랑해. 하는 건 좀.. 너무 안 어울리잖아.


허리와 엉덩이가 아파서 학교에도 못 간다던 명대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체를 옆으로 쭉 당기며 허리 운동을 했어. 좀 뻐근하긴 한데 아픈 건 아니지. 이 명대님이 고작 몇 번 한 걸로 허리가 아파서 학교를 못 갈 정도일까 봐. 그냥 학교 가기 싫어서 꺼낸 변명일 뿐이야. 아침이라 선선한 날씨가 마음에 들어서 다시 고청명의 방에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고 커튼도 맨 끝으로 걷고 침대 위에 바로 드러누웠어. 아픈 건 아닌데 피곤하긴 피곤해. 베개 위로 뺨을 부비고 제대로 충전을 안 해서 간당간당한 휴대폰에 충전기도 꽂고 인터넷을 켜서 저녁식사로 좋을만한 음식을 검색했어. 레시피들을 줄줄 읽는데.. 이게 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친절하게 하나하나 사진 올리고 설명해주는데, 봐도 모르겠어. 딴 사람들은 다 이게 이해가 되는 거야? 이거만 봐도 무슨 말인지 아는 거? 그냥 남이 요리하는 사진을 보는데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포기하고 다시 드러누웠지. 이따 다시 보지 뭐.. 아직 오전인데.. 그러고 보니까 열한시 다 돼가네.


침대 위에서 대자로 뻗어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시간을 보내다, 문득 어제 고청명이 사랑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어. 씨. 말해주려면 좀 크게 말해주지. 못 들을 뻔 했네.


실은 못 들을 뻔 했다기엔, 신기할 정도로 그 작은 소리가 명대의 귓가에 선명하게 닿아서 놓칠 수가 없는 부분이었어.


‘사랑해.’



고청명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거란 기대조차 없었는데.

정말로.

해줄 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어제 그렇게 자신감 없이 굴면서 흑역사 쌓은 보람이 있네. 그거 계속 걸려서 아침부터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간 건데.

그러고 보니까 고청명 아까 앞치마 매고 있었잖아. 앞치마도 어디서 자기 같은 거 구해 와서는... 앞치마 입은 거 엄청 귀여웠는데. 맨날 그 앞치마 입었으면 좋겠는데. 왜, 알몸에 앞치마 같은 거...


살짝 그을린 피부 위에 하얀 앞치마만 걸친 고청명을 떠올리는데.. 졸리는지 잘 생각이 안 나. 일어난 지 몇 시간 지났다고.. 하지만 잠이란 게 자면 잘수록 졸리니까. 고청명의 누드에이프런과 레시피는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봐야겠어. 꾸물꾸물 이불을 몸 위에 덮고 새우처럼 몸을 마는데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지. 받기 싫어. 하지만 확인도 안 하려니 혹시나 고청명일까봐 휴대폰을 들었는데, 명루야. 아 뭐야.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은 채로 통화 버튼을 눌렀지.


“왜?”

─ 학교냐?


엄청 툴툴대는 말투로 시작했는데 명대가 짜증 부리는 게 어디 한두 번 일이어야지. 명루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어.


“아니. 교수님 집인데?”

─ .....

“나 잘 거야. 끊어.”

─ 학교는?!

“내가 학교 안 나간 게 하루 이틀인가 뭐.”

─ 명대 너 진짜 말 좀 들어라 좀..

“아, 또 잔소리 하려고 전화한 거야? 끊어!”

─ 오늘!!


적반하장으로 얼굴에 철판 깔고 막나갔지. 어디서 학교 안 나가는 게 자랑이라고.. 하지만 실은 명루에게도 명대가 학교 출석을 찍느냐 마느냐보다 다른 더 중요한 게 있어서 넘어가기로 했어.


“어?”

─ 오늘 집에 들어오는 거냐?

“음.. 형 하는 거 보고.”

─ 뭐? 형한테 무슨 말버릇이 그래.

“형은 동생한테 말버릇이 뭐야 그게? 듣는 동생 기분 나쁘게. 집에 내일 들어갈 거야. 끊어!”


아주 눈뭉치 하나 던지면 구르고 굴려서 눈 바위를 만들어서 집어 던져 공격을 하는데, 명루가 이길 방도가 있나. 끊지 말라고 하기도 전에 명대가 먼저 통화를 뚝 끊어버려서 명루는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 말곤 쏟아지는 울분을 풀 곳이 없었지. 후우. 후우우. 후우우.. 참자. 참아야해. 명대 자식 성질 건드리면 더 집에 안 오려고 할 거야.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리고 이마를 쥔 채로 심호흡을 했어. 옆에 앉아 통화를 다 듣고 있던 아성이 눈썹을 위로 올리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일어났지. 기다란 아성의 손이 두꺼운 명루의 어깨 위에 닿았어. 아프지 않게 천천히 주물러주며 형님을 타일렀지.


“그러게 제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화를 안 하고 어떻게 버텨! 누님도 내버려두라고 하고, 너도 그렇고. 정말 이 집에 제정신인 건 나뿐이냐?”

“저도 제정신인데요?”

“하아..”


명대랑 또 통화하는 기분이 들어 뒷골이 당기는 것 같아. 이 집에 제 정신은 나뿐인 게 맞구나. 마른세수를 하자 아성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 대답했지.


“누님도 그냥 적당히 포기하신 거예요. 명대도 이제 스무 살인데 어떻게 저희가 하나하나 다 체크를 해요.”

“명대 시간표 분 단위로 외우는 놈이 할 말은 아니다.”

“...외우긴 하지만 언제 들어가고 나왔는지 까진 안 보잖아요.”

“그거나 그거나.”


그 때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빡 힘이 들어갔지. 명루가 으윽. 하고 신음하자 아성은 모른 척 다시 말을 이었어.


“어쨌든, 저도 누님도 현실을 직시하는 거죠. 명대 저 성격에 시집간다고 하겠어요? 웬만하면 양인도 때려눕히고 다니는 애인데, 학교 나가기 싫어해도 고교수 수업엔 꼬박꼬박 나가잖아요.”

“마음에 안 들어. 나이가 너무 많잖아. 그리고 결혼은 꼭 안해도 되는 거고.”

“그건 그렇긴 하지만.. 명대가 좋아하잖아요.”


다른 조건은 다 완벽해도 나이 하나가 걸리는 건 아성도 마찬가지야. 띠동갑은 너무하잖아. 대여섯 살 차이도 아니고.

목소리가 작아지고, 눈을 깜빡인 아성은 혀를 차곤 대답했어.


“그래도 명대가 좋다는데 어떡하겠어요.”

“그러니까 문제야. 대체 열두 살 많고 무뚝뚝한 남자가 뭐가 좋다...”


왜 명대가 고청명을 좋아하고 그렇게 따라다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려다보니, 명대의 생명을 구해준 게 고청명이니 더 할 말이 없지.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 점은, 명루뿐만 아니라 명공관 모든 가족들이 청명에게 빚을 지고 있고 늘 감사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거랑 사귀고 결혼하는 건 다른 문제야.


“팔 아프겠다. 그만해라.”

“명대 저렇게 학교 안 나가다간 잔디 깔아주고 들어간 학교에서도 재적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고교수 말은 듣잖아요. 작심 일주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며칠 꼬박꼬박 나가긴 했고..”

“아성이 너라도 내편 좀 들어.”

“고교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명대에게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에요.”


어깨 위에서 손을 떼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어. 아성이 한참 어깨를 주물러줬지만 피곤함은 가시지 않는 것 같아. 어제 도통 잠을 못 자서... 하. 정말 명대가 고청명과 사귀는 걸 가만히 두고 봐야만 하는 건가. 나이가.. 나이차이가 너무....



***



한 편 형에게 주먹한방 날리고 꿀잠을 자고 일어난 명대는 눈 뜨자마자 또 고청명 생각에 입 꼬리를 실실 올렸어. 아까 아침 한다고 앞치마 맨 거 진자 귀여웠는데.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요리 실패해서 당황한 것도 귀여워 미칠 것 같아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 정신 차리고 휴대폰을 들었어. 완충된 폰에서 충전기를 뽑고 다시 저녁만찬으로 좋을 음식을 찾아보는데 영... 영..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봐도 모르겠어. 못해도 세시쯤부턴 시작해야 뭐라도 완성할 수 있을 테니 빨리 시작해야하는데. 어떡하지.. 잠깐 고민에 들어간 명대는 갑자기 후거가 번뜩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어. 얘도 학교를 안 간 건지 뭔지 전화 걸자마자 바로 연결이 됐지.


─ 뭐.

“싸가지 없긴. 전화 예의가 그게 뭐냐?”


좀 전에 자기가 형한테 어떻게 했는진 까─맣게 잊은 모양이야.


─ 뭐, 내가 뭐!

“싸가지 없다고. 아, 야 나 지금 고청명 집이야.”

─ 그게 뭐.

“나 어제 교수님이랑 잤어.”

─ 무, 뭐? 진짜? 헐.. 교수님 어떡해..

“교수님 걱정을 왜 해? 내 걱정을 해야지 내가 지금 허리가 얼마나..”

─ 시끄러워 말 하지 마! 생각날 거 같으니까..


남의 성생활에 대해서 요만큼도 알고 싶지 않으니까! 후거가 이러쿵저러쿵 투덜대는 걸 무시하고 말을 끊은 명대가 바로 고청명 자랑을 시작했어. 어제 얼마나 섹시했고 오늘 아침에 밥한다고 앞치마를 맸는데 얼마나 귀여웠는지.. 

청명이 어제 사랑한다고 말했던 건 꽁꽁 숨겨두고. 그건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아. 혼자서만 알고 있을 거야.


─ 알았다. 알았어. 고교수님 귀엽고 섹시하다고?

“넌 몰라도 돼.”

─ 알 생각도 없는데 네가 말 한거거든요? 아. 아 맞아!

“뭐가 맞아?”

─ 야.

“왜?”

─ 나 임신했어.

“어"


침대에서 일어서서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임신 소리에 눈이 크게 뜨여. 뭐? 임신? 거울 속 놀란 자신의 눈과 마주쳤지.


─ 아까 아침에 병원 갔는데 임신이래. 삼주 째랬어.

"와... 부럽다."

─ 미쳤냐? 부러울 게 따로있지.

"나도 고청명 애 임신하고 싶어. 그럼 고청명이 어쩔 수 없이 나랑 결혼해주겠지?"


대체 왜 고청명은 이렇게 잘생기고 완벽한 명대님에게 아직도 결혼하잔 말을 안 하는 걸까. 사랑한다고 말도 해줬으면서 바로 결혼하자고 덧붙여야하는 거 아냐? 명대 기준에 완벽한 명대의 얼굴을 거울 속으로 보다 손가락으로 거울 속에 비치는 코를 꾹 누르곤 돌아섰지. 근데 진짜 진심 부럽다.. 와.. 임신... 

그 때 명대에게 여보옹 소리를 들었던 고청명처럼 진저리치는 듯한 후거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쏟아졌어.


─ 미친놈이.. 남의 인생 망하게 만들려고 작정하네.

"나랑 결혼하는 게 왜 망하는 건데? 나 엄청 완벽하지 않냐? 조신하고, 얌전하고, 섹시하고, 귀엽고 집에 돈도 많아."

─ 끊는다? 헛소리 좀 그만해.

"근데 넌 임산부가 욕해도 되냐? 애도 너 같은 성격으로 나오면 어떡해?"

─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그리고 정의 구현하는 거라 괜찮아. 아기도 이해해줄거야.

"미친놈."


정의구현이란 말을 비웃으며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았어.


─ 하여튼 임신한 거 하나도 안 좋아. 나 이제 맛있는 거도 못 먹고 살도 찌고 배도 엄청 나올거야.

"고청명이랑 결혼 할 수 있다면 난 열 명도 낳을 수 있어."

─ 진짜 지독하게 미친놈.. 교수님 너한테 잘못 걸린 거 같아.


열 명이라도 낳겠다는 말에 어깨를 부르르 떤 후거는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베개를 들어 끌어안았어. 내 주변에 이런 또라이가 곽건화 말고도 또 있었다니. 또라이인 줄 알긴 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어.


─ 근데 나 어떡하지. 아직 시부모님이랑 부모님한테 말씀 못 드렸어. 아마 우리 아빠랑 엄마가 아저씨 엄청 혼낼 거 같아.

"나도 심각한 문제 있어."

─ 뭔데?


부모님한테 말하는 건 정말 큰 문제라서 푸념하는데, 명대 쪽에서 목소리를 한껏 깔며 정말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꺼내는 거야. 덩달아 후거의 귀도 쫑긋 섰어. 왜. 고교수님 거기 크기가 너무 작아서 못 느꼈나?


"밥하고 싶은데 할 줄을 몰라."


하지만 그런 자극적인 이야기가 아닌, 힘 빠지는 소리를 해대는 터라 쿠션을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어. 노란 꽃이 그려진 쿠션이 잔뜩 구겨졌지.


─ 사먹어!

"사 먹기 싫어. 고청명한테 요리해주고 싶단 말이야."

─ 그냥 사서 네가 했다고 뻥쳐.

"그걸 믿겠냐고!"

─ 나보고 뭐 어쩌라고!


또 이게 염장질이네!


"너 밥 할 줄 알지?"

─ 왜 나는 뭐 맨날 밥 해다 나르게 생겼어?

"아니.. 넌 그냥 뭐든 다 잘할 것 같아."


뾰로통한 투로 대꾸했어. 이게 지는 도련님이라 밥 할 줄 모르고 난 아니니까 잘 할 것 같다는 의미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눈을 가늘게 뜨는데 눈치와 말싸움으로 질 일이 없는 명대는 바로 후거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휴대폰 너머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지. "후거 넌 공부도 잘하잖아. 원래 공부 잘하는 애들이 요리도 잘해." 근거 없는 이야기, 고교수를 봐도 전혀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데 중요한건 후거의 기분을 붕붕 뜨게 하는 거니까. 치켜세워주는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후거는 입술을 밝게 올리며 대답했어.


─ 진짜? 하긴.. 내가 좀..


공부 잘한다는 몇 마디에 순식간에 삐졌던 마음이 살살 녹는 게 웃겨. 진짜 살면서 쟤만큼 다루기 쉬운 애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물론 그게 귀엽긴 한데. 이 기세로 꼬셔봐야지.


"너 잘하면 나 좀 가르쳐주면 안 돼?"

─ 뭘? 요리?

"어. 교수님 아까 출근했어. 지금 교수님 집인데.."

─ 네가 요리하겠다는 거야? 야. 불이나 지르지 마. 그냥 사먹으라니까. 사람을 몇 번이나 똑같은 말 하게 하는 거야. 그냥 근처 식당가서 싸와서 접시에 담아내고 네가 했다고 뻥쳐.

"누가 그걸 믿겠냐? 장난해?"


그런 대답 들을 거면 괜히 너한테 아부도 안했지. 예상보다 쉽게 나오지 않아서 짜증이 허리 위로 솟았으나 조금만, 조금만 더 꼬셔보고..


─ 흐으음. 뭐 할 생각인데?

“그것도 모르겠어.”

─ 돈도 많으시니 캐비어 주스는 어떠신가요?

“그런 것도 있어? 맛있어? 정력에 좋아? 장어 이런 거도 넣을까?”

─ 아니 그냥 막 뱉은 건데? 왜? 교수님 정력 별로야?

“아니 쩌는데? 완벽한데? 대단한데? 거기도 큰데? 얼굴 닮아서 거기도 잘생겼는데? 우리 어제랑 오늘 완전 신혼부부 같아. 교수님이 나 주려고 아침 만들었는데 요리 진자 못하더라.”

─ 으응.. 예에....

“반응이 왜 그래 짜증나게. 하여튼. 가르쳐줘. 가르쳐달라니까?”

─ 맡겨놨냐? 내가 네 식모야? 인터넷에 치면 다 나와. 귀찮아.


아, 이게 진짜. 엄청 튕기네.

침대 중앙으로 올라간 명대는 아빠다리를 하고 폰을 고쳐 받았어. 이불 끌어안고 있으니까 더워서 침대 끄트머리에 둔 에어컨 리모컨을 겨우겨우 손을 뻗어 들어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었지. 가을에 에어컨이라니. 근데 더운 걸 어떡해.


“봐도 모르겠으니까 너한테 이러는 거지. 알면 너한테 전화했겠어?”

─ 내 생각엔.. 그냥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러모로.

“아, 진짜 이게 정말. 짜증나 죽겠네. 아까 똑똑하다고 한 거 다 취소다. 멍청이 후거야.”

─ 뭐? 이게 진짜! 나도 짜증나거든?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드러누운 명대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의 모서리를 노려보며 삐죽댔어. 알랑방귀 뀌면서 꼬시려 했더니 더럽게 안 넘어오네! 저게 다 쟤가 유부남이라 그래. 이래서 유부랑은 놀면 안 되는 거야. 뻐근한 허리를 한번 비틀고 말했어.


“어쨌든, 임신 축하한다.”

─ 어? 어.. 뭐.. 고맙다..

“나 교수님 생각해야해. 끊어.”


얼떨떨한 반응에 명대가 픽 웃고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어. 한 번도 남이 먼저 끊게 두질 않지. 갑작스런 축하와, 이어진 통화 종료에 정신이 덜 든 후거는 뒤늦게야 명대가 전화 끊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 질 떠올렸어. 진짜 고청명 교수님한테 완전 미쳤구나 쟤가. 처음부터 그 생각 하긴 했지만.. 교수님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어.. 쟤라면 진짜 임신해서 강제 결혼할 것 같아.


휴대폰을 내려놓고, 계속 말을 했더니 목이 마른 것 같아 주방으로 가서 물 한잔을 마시고 나니 목도 좀 낫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 같아.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맑아진 머리에 임신 소식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걱정이 속속들이 생겨났지. 어떡하지.. 우리 아빠 경찰이라 힘 쎈데.. 아저씨 뼈도 못 추릴텐데....


한편, 잠깐 외출한다고 해놓고 그대로 퇴근해버린 예비아빠도 그 문제로 걱정이었어.

거의 무단 퇴근에 가까운 행동에 전화로 아버지에게 한참 혼나고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 서재에 박혀서 남은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까 고민이었지.


인터넷 창에 [남성 음인 임신 초기]를 검색해놓고 탭 마다 글을 띄워 보는데.. 이거야 외워두면 되지만 정작 어른들께 어떻게 설명을 해드리지. 처가는 현관에서 부터 무릎을 꿇을까... 아니면 바로 엎드려서...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대역죄인 인건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라, 이마를 쥐고 한숨을 토해냈어. 일에도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인터넷과 프로그램을 번갈아 켰어. 후거 임신.. 스무살.. 임신.... 대학교 1학년.. 단어들이 입체화 돼서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임신 초기 주의 점을 정리해놓은 사이트를 두 번째 정독 중이었지.


우울증. 무기력증. 감정이 널뛰고.. 예민해지며...


자기가 너무 무책임하고 무심했던 거 아닐까.

임신에 관한 글을 읽으니 전에 후거가 유산했던 때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 내가 좀 더 관심 있게 봤다면, 후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그 때는 정말... 남편 자격 상실이었지.


"하..."


내년 여름쯤이 출산 예정인가. 후거가 엄마가 되는 걸 무서워했던 것처럼. 건화도 아직 어린 나이에 벌써 부모가 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지.

내가 정신을 차려야하는데..

주먹으로 얼얼한 머리를 때린 그는 곧 인터넷 창을 지우고 프로그램 화면을 띄웠어. 일단은. 일단은 일부터 빨리 끝내고 생각하자.



***



“봐도 모르겠어..”


이러다 시간 다 갈 것 같은데 그냥 진짜 사서 내가 했다고 거짓말할까. 근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마저도 귀찮아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어. 교수님더러 오는 길에 먹을 거나 사오라고 할래.

집에 혼자 있으니 옷 입는 것도 귀찮아서 아까 가운 입은 그대로 돌아다니다가 내내 물만 마셔서 물잔만 싱크대에 한 가득이야. 그래도 이런 건 치워야겠지. 지금까지 설거지 해본 적 한 손에 꼽는데. 덕분에 고청명의 요리 실력만큼 대단한 설거지 실력으로 물컵 네 개를 씻는데 싱크대 위와 주방이 물바다가 됐어. 헤엄쳐도 될 수준이야. 이따 여기서 고청명이랑 수영연습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난장판이 된 건 보이지만 치우는 거 귀찮아. 내 방도 안 치우는데. 어차피 물은 증발하니까 교수님 올 때쯤이면 하나도 없을 거야.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지.


일말의 죄책감이나 걸리는 것 없이 주방에 줄줄 흘린 물을 무시하고 냉동실 문을 열었어. 아까 봤을 때 아이스크림 통 있었단 말이야. 열어보니 초코맛 아이스크림이 한 통 있었어. 열지도 않은 새거네. 교수님이 이런 것도 먹나? 초코 아이스크림 입에 묻히고 먹는 거 보고 싶다. 냉동실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수저 하나 달랑 들어서 소파에 앉아 TV틀어넣고 아이스크림 한 스푼씩 퍼먹으면서 티비에 집중했어. 티비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얼굴을 뜯어보며 우리 교수님이 쟤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계속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으니 손 시려서 가운의 소매를 길게 잡은 채로 먹는데 현관문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어.


누구지.


아직 다섯 시도 안 됐는데. 벌써 마친 건가. 교수님인가?

도둑이나 모르는 사람이라기엔 비밀번호를 한번 만에 맞췄을 리가 없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 까지 들렸어. 아. 교수님인가 봐. 아이스크림 통을 든 채로 일어섰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영화 속 남자주인공 보다 더, 더, 더 잘생긴 고교수가 아니라.


“.....”

“어.. 아, 안녕하세요.”


그 고교수의 누나 고금운이었어. 당황한 명대 말까지 더듬으며 겨우 인사를 했지. 그러나 현관 앞에 선 금운은 굳은 표정으로 명대를 바라볼 뿐,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들어오시라고 해야 하나.

초유의 사태에 선 명대는 일단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내려두고 옷을 정리하려다 지금 자신의 꼴을 마주했어. 아무것도 안 입고.. 그 위에 가운만.. 그마저도 혼자 있으니 매듭도 대충 묶어서 가슴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차림이었어. 사태를 알아챈 명대는 가운을 여미며 횡설수설 이야기했지.


“그, 저기 이건.. 제가 방금 씻고 나와서..”


전혀 방금 씻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가운만 입고 있는 거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어. 아니. 거짓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청명이는.”

“교수님은 학교에..”

“너 여기에 두고?”

“....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교수님 누나 너무 무서워. 교수님도 가끔은 무서운데 교수님 누나는 진짜 볼 때 마다 무섭단 말이야. 경영자 입장에 있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누나가 설명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무섭다고.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명대는 상대가 상대이다보니 차가운 얼굴의 금운에게 쫄아 소파 뒤로 쪼르르 도망갔어. 지금 옷 갈아입고 나와야하나.


“저 그럼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계속 가운 입고 다닐 순 없으니까.. 황제 앞에서 물러나는 시비도 아니고 뒷걸음질 치며 청명의 방으로 쏙 들어갔어. 금운에겐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 손님방이 두 개나 있는데 옷 갈아입는다고 저 방에 들어간 건.


“어이가 없어서...”


이사 첫 날, 아버지가 들리시겠단 말에도 괜찮다고 다음에 오라고 바쁘다고 하더니. 가족들 못 오게 해놓고 부른 게 애인이야? 최근 들어 동생에게 연속적으로 실망하다보니 이젠 화낼 힘도 없어. 금운은 없는 시간 쪼개서 밥도 안 먹고 굶거나 매일 사먹을까봐 집에서 반찬 싸와서 가져왔는데. 애인 집에 두고 일하러 갔다고. 아주 곧 있으면 살림까지 차릴 기세네.

답답한 숨을 푹 내쉬고 발을 들였어. 청명이 있으면 이야기 좀 하다가 가려 했는데 못 그러겠네. 반찬통을 담은 가방을 들고 주방으로 걸었어. 스타킹을 신은 매끄러운 발이 러그 위를 밟았지.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서며 가방의 지퍼를 여느라 바닥에 만연한 수영장을 발견 못한 금운은, 안타깝게도 매끄러운 스타킹 때문에 수영장 입수의 기회가 더 높아졌지. 한눈을 팔고 있어서 더더욱, 그녀에게 입수할 가능성이 높아졌어. 결국 예상대로 금운은 싱크대 앞에 물바다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가방에서 튀어나온 반찬통이 주방 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여기저기 부딪쳤어. 그 때 방 안에서 다급하게 옷을 입고 있던 명대는 아악 하는 신음과 이어지는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티셔츠를 목에 꿴 상태로 눈을 크게 떴지.


“미친. 망했다.”


안 봐도 비디오고, 첫 페이지만 읽어도 결말이 눈에 들어오는 상황이야.

밖에 나가기 싫어. 어떡하지.

하지만 일단 부축이라도 해주면 덜 미움 받을까 싶어 얼른 티셔츠를 아래로 내리고 뛰쳐나갔는데 옷이 물에 다 젖은 금운이 바들바들 떨며 일어서서 물을 닦아내고 있었어. 주방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반찬통이 보였지. 게 중에 몇 개는 뚜껑이 열려 바닥에 시뻘건 물을 흘리며 떨어져있었어. 명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


모른 척. 내가 안한 척...


“넘어지셨어요? 어떡해! 여기에 왜 물이 있지!”


과하게 연기를 하며 주방으로 달려가는데, 금운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화를 참아내고 있었어. 눈에 시퍼런 안광이 비치는 듯 해. 무섭다. 너무 무서워.... 겁쟁이 후거가 이 꼴을 봤으면 무섭다고 기절했을 거야.


“너 설거지했니?”

“네? 네..?”

“이거 물 네가 이런 거냐고.”

“그게..”

“물 샌 건 아닌 거 같은데.”

“그게...글쎄요...”

“청명이랑 사이좋게 치워.”


이를 갈 듯 대답한 금운은 명대를 지그시 쳐다보다 몸을 돌렸어. 노려본 것도 아닌데 무서워서 등골이 오싹해졌지. 우아하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주방을 나서던 금운은 아직 여전히 물바다인 바닥에 또 미끄러질 뻔 했어. 삐끗한 다리에 완전히 엉덩이에 혹이 날 뻔 했으나 다행히 옆에 서 있던 명대가 금운의 팔을 붙잡아서 넘어지진 않았지. 하지만 그마저도 짜증이 난 금운이 거칠게 명대의 팔을 뿌리치고 거실로 나가버렸어. 아야. 팔 아파. 뿌리쳐진 팔을 매만지며 따라갔으나 명대가 볼 수 있는 건 쾅─! 닫혀버린 현관뿐이야. 집 부서지는 줄 알았네. 현관문 닫히는 진동이 명대가 선 쪽 까지 찌르르 오는 것 같아. 여전히 아린 팔뚝을 만지며 다시 주방 쪽으로 가는데, 바닥에 쏟은 반찬들과 널브러진 반찬통, 그리고 온갖 가구에 다 튄 물을 보니 한숨도 안 나왔지. 분명 십분 전까지 엄청 행복했는데.


“왜 벌써부터 시집살이하는 거 같지.”


결혼하면 무조건 분가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