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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에 묶일 수 없는 성질을 가졌던 것 같다. 나는 어딘가에 묶여 나머지 가능성들이 모두 닫혀버렸다고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거기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게 정말 일생동안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경우에만 그것에 순응한다. 정확히는 그것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한다는 행위에 묶이는 정도가 그것이 나를 묶고 있는 정도보다 크다면 순응한다. 자유를 향한 갈망에 묶인 채로 살아가는 이유가 그것이다.
한 갈래를 선택할 때 나머지 갈래가 닫혀버리는 것이 끔찍하게 싫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싶다. 사랑과 의미도 중요하지만 감각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그렇기에 삶의 방식을 정할 수 없고 나란 인간의 정체성을 확정지을 수 없다. 나는 나일 수 있는 내가 정말 많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모습들이 모두 나였으면 좋겠다. 행복해하는 나와 괴로워하는 나, 사랑을 하는 나와 냉소적인 나, 아름다운 나와 끔찍한 나… 모든 가치에 아무 차이가 없으므로 어떤 모습이든 다 되어보고 싶다.
그러므로 내겐 아무 의무가 없다. 행복할 의무, 괴로울 의무, 행복하지 못함에 괴로워할 의무, 괴롭지 않음에 행복해할 의무, 그리고 특정한 모습으로 살 의무도, 어떤 자극에 어떤 감각을 느껴야 한다는 의무도… 하지만 나는 실제론 그렇게 살지 못한다. 타인이 나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거의 모든 인간들은 타인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인간이기를 기대한다. 물론 나도 그렇고.
여기서 의무란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타인이 아니라 나다. 당신들이 바라는 모습으로 있어주고 싶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바람이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묶이지 않는 인간이니까. 나에 의해 만들어진 의무가 나에 의해 파괴된다. 타인은 그 과정의 희생자가 된다. 나의 이런 점을 혐오한다. 사실은 혐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겐 나를 혐오할 의무가 없었다. 만약 있다면 나에 의해 만들어진 의무일 것이다.
정말 나는 의무에 의해 나를 혐오하나?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이고 감각적인 혐오의 발생지가 있다. 나는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나를 혐오한다. 스스로가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에 나오는 분노로부터 혐오가 파생된 것이다. 나는 스스로가 아름다웠으면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이 아름답지 않다고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 뿐이다. 혐오는 분노의 배설물이다.
이런 점에서 혐오는 내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나의 의지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모든 욕망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모든 감각과 삶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와 그것들을 만들어낸 이 모든 구조가 사랑스럽다. 다만 그것들이 사랑스러운 건 멀리서 상상할 때 뿐이다. 확정되어 마주하게 되면 나는 무섭고 불안해진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무력할 뿐이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이런 상태로 이런 인간이겠지. 하지만 그렇다는 것마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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