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휴버트 셀비의 원작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1950년대의 미국, 뉴욕에서 서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는 브룩클린,
- 그곳은 현재 흑인들의 주거주지라는 정보도 얼핏 들은 적 있다. - 의 풍경과 정서를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은 내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 말한다면 그것은 과도한 오만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에 살고 있는 지상의 거주자들 중 대다수는 그들과 비슷한 삶을 탄생때부터 선고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전혀 아니지 않을까?

그 누가 나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프란츠 파농)>"이 아니라고 힘주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겠 는가?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 수 있는가? 카메라는 그러한 '세상의 변경', -남아메리카나 남아프리카나 서남아의 그곳이 아니라 - 우리들의 세계 주변에도 있음을, 우리들의 내부에도 있음을 담담하게, 그리고 아주 냉정하게 비추고 있다. 변경은 어느 곳에나 있다. 단지 우리들은 그곳이 그런 곳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할 뿐이다. 힘주어 믿을 뿐이다.

신은 가까이에 있고, 항상 우리의 고통을 위무하시며,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의 삶은 그저 잠깐 지나가는 과정의 길일 뿐이라고, 굳세게 믿고 또 믿으려 들지만 - 하지만,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 지상에서 헤맨다<(기형도)>


2.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쓰여졌던 배경은 1920년대의 미국이다. 그리고 그곳의 현장도 '브룩클린'이라고 얼핏 들었다. - 미안하게도 나도 그 책을 아직 목록에 끼워두고 있을 뿐이다. -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흘렀음에도 브룩클린을 에워싸는 공중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정경도 그다지 바뀐 것이 별로 없는 듯 하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그곳에 일자리가 다시 찾아들어오며, 들어줄 이 없는 자아의 정당성을 막막한 허공에다 외치는 것을 포기하고, 단지 한 입의 끼니를 얻기 위해 한 움큼의 푼돈을 쥐기 위해 뇌신경의 세포를 압착하는 중노동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온 세상에서 값싼 노동자들이 몰려온다.

아직 그 시대에는 이민자들이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스크린 속에는 유색 인종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백인들이 떠나간 그 자리를 흑인들이나, 동남아시아의 소수 인종, 혹은 레바논이라던지 파키스탄과 같은 곳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채워나가고 있을 것이다. 게중에는 한국인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만 브룩클린은 여전히 그대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도시는 그런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이 있어야만 성장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지저분한 슬럼가에서 풍겨 나오는 너덜너덜한 향취를 습착하면서 성장한다.

종말의 악취는 그 거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변에서 떠나질 않지만, 그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계는 멸망의 경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질 않는다. 단지 멸망은 그곳에 있는 거주자들에게 찾아올 뿐이다. 신의 뜻을 거역해서 심판의 나날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내기만 소망 했던 이집트의 거주민들처럼, 종말은 그들의 곁에 어느덧 불시착을 한다.

노조 파업운동을 주도했던 결사 대원이었던 해리 블랙에게 그것은 그가 주도했던의 모든 헌신의 대의에 아무런 대가도 지분하지 않은 채 그의 곁으로 불시착했고, 사랑이런 이념을 철저히 부정했던 거리의 창녀 트랄라에게도 사랑은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찾아왔고, 그녀속에 불시에 솟아오른 것처럼 불길처럼 꺼져버렸고, 종착은 그저 멸망일 뿐이었다.


3.


트랄라에게 있어서 '브룩클린'과 '맨해튼'이라는 두 지역의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는 과연 비례하는 거리였을까? '빔 벤더스'에게 텍사스의 '파리'라는 지역은 단지 지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텍사스'와 프랑스의 '파리'라는 각각의 도시가 한 폭의 만화경 속에 중첩될 수 있다는, 그래서 시공의 '동시성'이 그저 낭만주의적 시대의 향취를 환기하는 개념에 불과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울리히 에델은 현실과 환상의 이율배반적 모순에 더 크게 주목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은 우리들의 내면속에 영원토록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불가해한 이질성 때문에 융화하기 힘들다. 항상 그것은 용해되고 또다른 형태의 새로운 물질로 이행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안에서 융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원자들이지만, 또한 우리의 욕망은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또다른 무언가를 꿈꾼다. 그 꿈이 우리를 배반할 지라도, 누군가는 그 꿈을 또다시 꿀려 할 것이다.


4.


프란츠 카프카에게 프라하의 유대인 게토 지역 '요세포브'는 그의 감방이고 그의 요새였다. 골렘의 작가 메이링크에게 있어서 그곳은 "악마적인 지하 세계였으며, 고뇌에 찬 빈털털이들의 장소였고, 그 자체의 불결함이 그곳의 철거를 숙명처럼 초래하고 있는 곳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인종 청소의 계획에도, 그 지역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벽이 무너지자 그곳의 사람들은 철조망으로 그 벽을 대신했다.

그들이라고 탈출을 꿈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을 받아들여줄 '아르헨티나(미국 드라마 '덱스터'에서 한나 멕케이와 덱스터가 동반도주하여 안착하길 염언 했던 꿈의 낙원)'의 또다른 이름인 '팔레스티나' 이 세상의 지도 어느 곳에 있음을 그들 또한 모르진 않았겠지만, 지구는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것이다. 우리가 안착할 '에덴 동산'은 신기루처럼 멀리있고, 다가 섰다 할 때쯤에는 결국 그들이 원래 서 있던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될 뿐이지 않은가?

'브룩클린을 떠나는 마지막 출구'는 그래서 다시 '브룩클린으로 도착하는 마지막 비상'구가 되는 것이다. exit의 어원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는 번역 순수주의자들의 지적은 그래서 황망하기 그지없다.


5.


지금 이 시간, 나의 정신은 '신경안정제'의 몽환적 힘에 압도되어가고 있다.그래도 나는 이 순간의 내 감정을 놓아버리고 싶지가 않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시퀀스가 그랬던 것처럼, 빌딩 속에서 레플리컨트의 임종의 순간에 그의 영혼과 함께 떠나며 비둘기가 날아올랐을 때 유일하게 비추었던 햇빛의 순간처럼, 브룩클린에도 한 쌍의 가족이 만들어지고, 한 생명이 태어난 후, 그리고 파업의 시간이 끝나고 노동자들이 일터 돌아가는 그 시퀀스에서 유일하게 아침의 여명을 비추어 졌다. 해가 지고 다시 뜨는 것처럼, 삶은 계속 그렇게 순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에 기생하며 브룩클린은 지금도 팽창하고 있을 것이다. 도시에는 오직 도시의 영광과 위엄만이 있을 뿐이다. 그 도시를 세운 인간 존재들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작동하며 언젠가는 소모품이 될 뿐이다. 그 속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상념이란 고고한 관념은 단 한푼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융합하고 다시 분해될 것이다. 이 소란스럽고 지저분한 인생들의 투쟁에서 발현되는 에너지를 흡수하며 도시는 계속 팽창할 것이다. 음험한 태양은 고층 건물위로 떠오르며, 그 아래에는 '지옥의 변경'이 날마다 새로이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