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길
“경식아, 경식아, 왔구나!”
김청은은 고등학교에서 돌아오는 김경식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경식은 미소를 짓고는 방에 들어갔다.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는 김경식과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김청은은 남매 사이임에도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신통치 않아서 중소 도시의 공장 지대에 살고 있는 중이었다. 김경식과 김청은의 방은 여자 아이돌들의 브로마이드로 도배되어 있었다. 모두 김청은이 붙인 것들이었다.
김청은은 대단한 미녀로, 김경식을 볼 때마다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경식아, 라면 끓여줄까?”
“누나, 나 배 안 고파. 노래나 불러줄래?”
“소원을 말해 봐, 니 마음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 봐, 니 머릿속에 있는 이상형을 말 해 봐, 그리고 나를 봐~”
그렇게 김청은은 춤까지 춰가면서 유행가를 불렀고 김경식도 흥얼거리면서 박수를 쳐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런 뒤 김경식은 침대에 앉았다. 침대 옆엔 낡은 셀러론 계열 PC 한 대가 있었다. 김청은은 김경식의 팔짱을 끼고 달라붙어 앉아 말했다.
“가위!”
“보! 아, 내가 졌네.”
김청은은 김경식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뒤로 붙잡아 당겼다가 놓아 꿀밤을 선사했다. 김청은은 그러면서 하이 소프라노 톤으로 웃었다. 김경식은 그런 누나가 귀여웠다.
그때였다.
“청은이, 이 년아 또 그딴 노래나 부를래?”
소주에 반쯤 취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과외는커녕 학원 한 번 안 보냈음에도 전교 1, 2등을 오르내리는 김경식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김청은은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도 하위권을 맴돌았다.
“아빠, 또 왜 그래? 난 가수가 되고 싶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가수되려면 몸 팔아야 돼. 그런 거 절대 못 시킨다.”
“내 몸은 내 꺼야.”
“뭐 이 년이!”
아버지가 김청은의 따귀를 올려치려 하자 김경식이 그런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아빠, 취하셨어요. 술 깨신 다음에 다시 말씀하세요. 누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버지는 많이 취했는지 손을 거세게 흔들었다. 김경식은 그런 아버지를 상대했다.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좀 누그러졌을 때 김청은은 나가버리고 없었다. 이렇게 나가서 쏘다니다가 새벽 1시쯤에 들어오곤 했었다.
“찾으러 갈게요.”
길거리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필리핀,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흔했다. 잔인하고 난폭한 무슬림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법을 아무데서나 강요하는 극단주의자들인 무슬림들.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성폭행당한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에게 오히려 죄를 물어 명예 살인하는 무슬림들. 배타주의와 이중 잣대를 휘두르는 무슬림들. 치안이 약한 나라에서 와서 그런지 칼을 소지하고 다니는 무슬림들. 그리고 그런 무슬림과 위험성 면에서 아무 차이가 없는 다른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 그런 그들이 우글거리는 밤거리에 혼자 나간 김청은이 걱정되었다. 김경식은 칼을 휴대하고 홀로 길을 나섰다.
찾기는 어려웠고, 골목길은 미로와 같았다. 새벽 1시가 되어 집에 돌아갔지만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김경식은 이젠 술이 깬 아버지와 함께 재차 길을 나섰다. 아침이 밝으면 학교를 가야했지만 상관없었다. 새벽이 깊어감에 따라 머리가 쑤시고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새벽 4시 반이 되었다. 이제 버스 정류장 앞엔 첫차를 타려는 손님들이 모였을 것이다.
어느 버스 정류장 앞에서 외국인 노동자 몇몇이 발가벗겨진 채 쓰러진 여자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찾아냈다. 한 외국인 노동자 - 방글라데시인으로 보이는 - 가 여자와 성교하고 있었다. 서둘러 칼을 들고 달려갔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물러났다.
김청은이 배에 자상을 입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청은아!”
아버지는 침착하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와 김경식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찬찬히 노려보았다. 김경식은 자세를 잡았다. 185cm의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인 김경식이라 위압감을 풍겼다. 칼을 들고 있는지라 서로 섣불리 덤비지 못 했다. 숨어 있던 한국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왔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라졌다. 경찰차 경적이 울렸다. 뒤이어 119 구급차도 왔다.
김청은은 이미 몇 십 분 전에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자책했다. 김청은을 꾸짖은 것을 자책했고, 사업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집을 이런 곳에 구한 것을 자책했다.
“엄마, 아빠, 이럴수록 힘을 내야죠.”
장례식장에서는 부모를 위로하던 김경식은, 식이 끝난 뒤엔 방에 틀어박혀 쓰러져 누워 오래 울었다.
외국인은 해운대에서도 성범죄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성을 탐하는 무리라지만, 자신의 가족이 성범죄 중 최악의 경우를 당할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 했다.
김경식의 가족은 언론에 김청은의 죽음을 투고했다. 하지만 반응은 경기일보에서 하단에 짤막하게 난 것이 전부였다. 항의 전화를 해보니, 외국인 인권단체에서 그런 기사를 실으면 외국인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면서 항의를 해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외국인 인권단체에 김경식의 아버지는 항의했다.
외국인 인권단체 직원은 고압적으로 말했다.
“조선족 깡패 보내서 네 가족 몰살하기 전에 조용히 있어.”
다른 가족을 지키기 위해 김경식의 아버지는 항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경식은 슬픔 속에서도 일상에 충실하려 했다. 하지만 자꾸 심란해서 되지 않았다. 난자당해 죽은 누나 생각이 끊임없이 났다. 악몽은 예사였고, 눈을 감기라도 하면 누나의 비참한 시체가 어른거렸다. 김경식은 누나가 죽었을 때 경영학과에서 법학과로 진로를 틀려고 했다. 경찰대에 진학할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국가 권력이 김경식에게 사적 복수의 권한을 줄 리는 없었다.
“자퇴한다고?”
김경식의 아버지는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복수를 하려면 제도권에선 안 돼요.”
“너까지 이러면 난 어떻게 살라는 거냐? 고등학교는 마쳐라. 그래야 사람 구실하면서 산다...”
“알았어요. 하지만 졸업한 다음엔 내 마음대로 하게 해주세요.”
“그래. 고등학교만 마쳐라...”
1년은 금방 흘렀다.
김경식은 졸업했다. 1년 동안 놀다시피 했고, 수능은 보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김경식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 원동기 면허를 땄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엔 끊임없이 축구와 농구를 하면서 기초체력을 다졌다. 일진들의 인맥을 탐색해 보았지만, 조선족 깡패가 연루되는 경우가 있어 그만두었다. 조선족도 외국인 노동자의 일부일 뿐이었다. 아니 조선족은 중국인 중에서도 범죄 비율이 높은 부류에 속했다. 조선족은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니라 6.25 때 중공군의 일부 후손으로 우리나라의 원수들 출신이다. 조선족은 인육 캡슐을 들여오는 질 낮은 무리였다. 인간 같지도 않았다.
졸업 후 김경식은 집 근처의 2교대 공장에 취직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일찍 모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2교대 공장은 주야로 12시간씩 교대로 근무하게 했다. 생체 리듬을 파괴하여 내분비 교란을 일으켜 삶을 단축시키기에, 2교대 근무 보다 강도가 낮은 야근조차 WHO에선 발암물질로 분류되어 있음에도 사업주는 노동자를 2교대 근무시켰다. 외국인을 들여와 서민과 저임금 경쟁시키는 바람에, 공장의 근무조건과 임금은 좀처럼 개선되지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외국인은 매년 20조의 국부를 유출하고 있었고, 임금을 고착화시키고, 서민들 일자리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내수는 좀처럼 살아나지 못 했다. 외국인 때문에 공장 임금이 싼 바람에 젊은이들이 공장을 기피하니 기술자의 맥도 끊겼다.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조선족은 한국어 할 줄 아는 중국인임을 기회 삼아 한국인이 기피하지 않는 업종인 간병인, 음식점, 파출부, 청소, 운전에도 마구 진출하고 있었다. 덕분에 물가대비 소득이 너무 낮아져서 돈 못 버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니 출산율도 바닥인 것이 현실이었다. 김경식도 돈이 안 되기에 결혼은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였다.
김경식은 가끔 다른 공장을 다니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외국인들은 이미 돈을 내국인만큼 벌고 있었고, 3D 일은 기피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국인 보다 대우가 좋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김경식의 마음속엔 분노와 증오가 끓어올랐다.
김경식은 공장 일을 잘 해서 몇 개월 만에 주임이 되었다. 자원입대 형식으로 1년 일찍 지원했고, 덕분에 계속 다니던 공장에서 산업체 근무로 군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군복무로 해당되는 기간 동안에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돈이 많이 나왔다.
부모는 그런 김경식을 안타깝게 지켜보았지만, 이미 나가서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김경식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돈을 얼추 모으자 김경식은 사표를 썼다.
김경식은 킥복싱 학원에 등록했고, 학원 근처에서 웨딩 뷔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아직 번창하던 중학교 때 유도를 배웠던 김경식이라 기본은 되어 있었다. 김경식은 웨딩 뷔페에서 남자는 온갖 힘든 일을 하고, 여자는 입구에서 인사만 하면서도 남녀가 같은 임금을 받는 걸 보면서, 이미 자신의 세대에선 여자가 상위임을 실감했다. 치안과 고위직 진출을 뺀다면 여자가 더 대접 받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킥복싱 학원에서 김경식은 몇몇 동지를 모을 수 있었다. 모두들 외국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경식은 사이버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땄고, 그 학위를 바탕으로 채권 수심 회사에 들어갔다.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합법적인 업체였다. 김경식의 부모는 이제 정신을 차리나 보고 좋아했지만, 김경식에겐 외국인의 정보를 보다 쉽게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어느 날 김경식은 출퇴근 및 유사시 용도로 산 중고 카니발을 타고 퇴근하다가 혼잣말로 욕을 했다.
“씨발! 문재인이!?”
문재인은 조선족 선원들 6명이 한국인 선원들 11명을 학살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조선족들을 변호하고 살뜰히 챙겨 주었던 인권 변호사였다. 문재인의 주군이던 노무현은 시위를 하는 세력이 지지 기반이라면서 탄압하는 걸 꺼리는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노무현 당시의 법무장관 강금실은 외국인의 지문 날인을 폐지해서, 불법 체류자가 넘쳐나도록 만들어 놓았다. 외국인의 인구 대비 살인율은 내국인의 7배나 되는데도 잡기 힘들게 만들어 놓아 버린 것이다. 이명박은 2011년 말에 와서야 외국인의 지문 날인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란 물결이 광화문 광장을 뒤덮었다. 김경식에겐 누나 김청은의 죽음을 조롱하는 악귀들의 향연으로 보였다. 저곳에 카니발을 돌진시키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김경식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김경식은 다만 가방 속에 있는 너클을 만지작거렸다.
문재인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경식의 아버지가 목을 매달았다. 새누리당에서 이자스민이 당선되었을 때에도 자살을 생각하던 그였다. 하지만 더욱 극렬한 다문화 찬성론자인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자 우울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김청은이 죽은 이후로 사업은 더욱 어려워져 결국 문을 닫은 상태였다. 김경식의 아버지는 사업에 흥미를 내지 못 했다. 김경식은 어머니와 함께 장례식 없이 바로 벽제 화장장에서 아버지를 화장했다. 단 둘 밖에 없는 떠나보내는 길이었다. 남은 재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바다에 뿌렸다. 껍데기만 남은 듯한 어머니를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내버려두고 김경식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얽어 놓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상경했다.
이미 외국인의 평균 임금은 150만원이 넘었다. 하지만 내국인은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허덕이는 사람이 생산직 중 30%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의 실업자 수는 500만 가까이 되고, 전체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월 200만원도 못 버는데도 김대중 이래로 외국인을 닥치는 대로 수입해오고 있었다. 적십자병원에선 불법체류자에겐 공짜로 진료해 주면서 내국인에겐 돈을 받았고, 불법체류자에겐 건강보험공단에서 치료비 1000만원씩 지원해주면서 내국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끔찍한 역차별이었다. 거의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 외국인이 내국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 자체가 역차별인 것이다.
시간은 흘러갔다.
김경식은 자신의 투 룸 전세방에서 삼겹살을 상추에 싸먹고 소주를 기울이면서 외국인에게 앙심을 품은 킥복서들과 친목을 다짐했다.
2013년이 되자, 문재인이 외국인에 대한 지문 날인을 또 다시 인권을 말하면서 없애버렸다. 그때에 맞춰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은 민주노총에게서 지원 받아 서울 광장에 모였다. 쇠파이프, 죽창, 화염병, 화염방사기 등등의 살상 무기로 외국인들은 중무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불법 폭력 시위 현장에 들고 나오는 장비들 그대로였다. 다른 모든 다문화 추구한 국가들에서 일찍이 그랬듯이 외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국인과 같은 임금을 보장하라!”
“노동조합 건립을 보장하라!”
“여권 없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하라!”
외국인들은 그렇게 외치면서 화염병을 던져 서울 광장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뒤이어 그들은 도로로 나섰다. 청와대를 향해 그들은 버스도 다니는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고 화염방사기에서 불을 뿌리면서 진군했다.
경찰들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다른 국내 시위대에게 그러는 것처럼 물대포나 발사하고 방패로 찍거나 철봉만 휘둘렀다. 테이저 건 같은 새로운 무기는 사용조차 못 했다. 경찰들이 몇몇 들 것으로 실려 나갔고, 2명의 경찰이 죽었다. 예전처럼 언론은 경찰의 피해는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은 오직 외국인 불법체류자가 피투성이가 된 사진만을 크게 보도했다. 한국에서 언론은 사실 관계를 가지고 조작하여 선동하는 기관으로 전락해 있었다.
외국인들은 상점 유리를 때려 부수었고 테이블을 둘러엎었다. 외국인들은 개인 무장인 칼을 가지고 행패를 부렸다. 한국인에 의한 시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이번 시위에 모인 외국인들은 후진국 출신들이었다. 후진국일수록 범죄율이 높고, 여자를 차별하고,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 더욱 높은 비율로 있기 마련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다문화의 해악 때문에 다문화를 반대하는데, 대한민국만 다문화를 외치고 있었다. 외국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국가는 문화에 동질성이 있어야 국가이다. 다문화는 이질적인 사회를 만들자는 것 밖에 안 되는 법이었다. 따라서 다문화는 국가를 부정하는 짓이다. 내국민 속에 다른 나라 국민을 들여와 국가의 정체를 망가뜨리는 짓이다. 하지만 이미 외국인이 140만 이상 들어 와 있었다.
몇몇 전철역에선 외국인들이 여중생, 여고생 심지어 여자 초등학생을 마음껏 성희롱하고 강간해 죽여도 대한민국엔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들 외국인들의 나라들의 문화에선 강간은 죄악이 아니었다. 그래도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에서 보도할라치면 자본과 인권단체가 가로막았다. 외국인 가운데 가장 비율 높은 건 중국인이다. 삼성 연구소에서 추진하는 대로 중국인 1000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전쟁 없이 한국은 중국에 합병된다. 하지만 자본은 외국으로 뜨면 그만이다.
2000년대 중반에, 한국인의 성금까지 받아 챙긴 필리핀 노동자 하나가 여중생을 강간 미수하자 화를 내면서 수십 차례 칼로 난자해서 죽인 사건은 아예 묻혔었다. 그런 언론이 외국인이 내국인에게 당한 것만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수원 토막 조선족 식인 살인마 우웬춘 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바가 없는 언론의 작태였다. 소년 소녀 가장과 독거노인은 자살을 하고, 자국민의 출산율은 바닥을 치는데, 다문화에는 마구잡이로 지원을 퍼붓고 있었다.
김경식은 무리를 모았다.
“우리도 우리가 있다는 걸 알려야 해. 안산드레아스로 가자.”
안산드레아스는 안산시 원곡동에 대한 은어였다. 안산시 원곡동은 수도권에서 외국인에 의한 폐해가 가장 심한 곳이었다.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불러 모아진 외국인에 의한 강력 범죄가 끊이질 않았고, 외국인이 한국사람 보다 많이 살았다.
부자들은 경호원들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때문에 외국인들은 오직 서민층에게만 강력 범죄를 저질렀다. 부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서민층을 약탈하고 있었다.
김경식은 안산시 원곡동으로 갔다. 도착하니 한낮이었다. 거리는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상점가엔 온통 외국의 글씨들이 간판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파퀴벌레다.”
어떤 나라에서든 환영 못 받는 파키스탄인으로 보이는 외국인 하나가 비척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강간당한 여자를 명예 살인하는 인권 후진국으로, 어느 나라를 가든 강간을 일삼아 같은 무슬림 국가를 포함해 그 어떤 나라도 받아주지 않았다. 파키스탄 여자의 70%는 강간당한 경험이 있을 정도다. 오직 호구 나라인 대한민국에서만 받아준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외국인이 담벼락에 대고 오줌 싸는 것이 보였다.
“쳐죽여 버려!”
김경식이 외쳤다. 패거리들이 우르르 너클을 주먹에 끼고 내렸다. 외국인의 등 뒤쪽으로 찬찬히 접근했다. 김경식과 패거리들은 외국인을 둘러싸고 마구 때렸다. 외국인은 금새 피범벅이 되었다. 외국인이 소리를 지르자 김경식은 후퇴를 명령했다. 곧 외국인들이 몰려 올 수 있었다. 김경식의 카니발은 조용히 거리를 빠져나갔다. 작은 승리였다.
김경식은 홀로 자신의 방에 들어 왔다. 오후의 햇살이 적막한 방벽에 쓸쓸히 드리워져 있었다. 누나의 얼굴이 문득 어른거렸다. 누나 김청은과 동거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누나가 안 죽었다면, 김청은은 가수가 되어 출근을 하고, 김경식은 복학한 대학생일 터였다. 김경식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저녁 뉴스에 김경식의 백주 테러가 크게 보도되었다. 묻지 마 범죄인 거 같다는 해설과 함께 외국인 혐오를 걱정하는 뉴스였다.
“에라 씨발 놈들.”
김경식은 커피 잔을 벽에 집어던졌다.
“내 누나 죽인 새끼 아직 못 잡았어! 아나운서 씨발 년아! 그때까진 다 죽여 버릴 거야!”
[2012.10.29.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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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
아니 니 문장은 괜찮은데 내용이 좆이야 좆 좆 좆!!!!!
별 생각없이 소설쓰는 것 같음.
투척형 소설이랄까
오로지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만 급급한 문장이라 조금만 읽어도 피로감이 느껴져요. 독자는 니그라토님한테 수업을 듣는 학생이나 설교를 듣는 신자가 아니잖아요.
소설이 논설이 될 필요까지는 없지만 직관을 받침하는 근거 정도는 짜맞춰야 하지 않나 싶어 문장은 그냥그냥인데 구성하고 내용이 문제
처음엔 좋은데 왜 갈수록 이상해져 무슬림부터 너무 막 나가는 것 같어. 김청은이라는 이름도 바꿨으면 좋겠어. 김청은은이렇게 되니까 어색해
너무 사상적으로 갈려는 게 보였음 WHO에서부터 재미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