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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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피곤한 일들에 맞닥뜨려야 했다. 담임교사는 노발대발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러운 태도로 대화를 시도했다. 난 그게 더 불편했다. 어쨌든 그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담임과 대화를 원만하게 마무리 했다. 그리고 나는 학교를 계속 다녔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게 되는 바람에-원래 강제였지만 난 도망 다녔었다-수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내가 옮긴 게 분명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9, 답답한 교실에 앉아있으면 삶의 모든 의지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 없이 배가 고팠다. 창가에 앉아서 운동장을 바라봤다. 저녁 교실의 끔찍한 남자냄새. 창문으로 이따금 상쾌한 가을바람이 살며시 들어오곤 했다. 수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냄새가 떠올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서랍에서 아이팟을 꺼내 1979를 들었다. 그녀와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게 아쉬웠고, 때로는 불안했지만 나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을이 끝나갈 쯤이었다. 수지와 데이트를 했다. 그날 저녁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을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들이 우리 머리 위를 비췄다. 수지는 내가 생일날에 선물해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예뻐 보였다. 늦가을 저녁의 약간 차가운 공기, 공원의 수목들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풀 냄새, 내 손 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등의 감촉. 조용히 걷다가 이따금 한 두 마디씩 주고받는 말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조금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가을 밤. 아름다웠다. 수지의 뺨이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그녀가 입고 있던 스웨터보다 더. 그녀의 따뜻한 볼을 만지고 싶었다. 키스를 하고 싶었다. 나는 끝내 하지 못했다.

한동안 서로가 바빴다.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전처럼 잘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멀어졌다. 연락의 횟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수지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종종 연락을 하는 나에게 항상 차갑게 대하곤 했다.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가 좋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수지가 보고싶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뽀득뽀득 소리 나게 눈을 밟으며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따뜻한 핫초코도 같이 마시고 싶었다. 어떻게든 관계를 예전처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서툴렀고,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괴로웠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나는 지쳐버렸다. 더 이상 수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불분명하고 애매하게 시작한 것처럼, 불분명하고 애매하게 끝나버렸다. 나는 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게 없었다. 서서히 그녀를 잊어갔다. 후에 다른 이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보건데 그때 수지는 아마 다른 남자를 만났던 것 같다. 겨울이 끝나기 전,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이듬해 봄날 저녁 나는 홍대 앞에 있었다. 수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녀도 홍대에 있다고 했다. 잠시 얼굴을 보기로 하고 놀이터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우리는 의미 없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 놀이터는 여전히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우리는 서로의 귀에다 대고 말을 해야 했다. 그녀에게 아직도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 물어봤다. 수지는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지,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안았다. 수지의 냄새가 났다. 특유의 비누냄새. 내 포옹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움은 그녀를 한동안 힘들게 했다. 이것이 그녀를 만났던 마지막 기억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