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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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토요일 정오의 기분이 거리를 수놓았다. 나는 고즈넉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하우스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녀는 나에게 파마산 치즈를 건네며 내가 농담삼아 한 이야기에 한껏 웃어주고 있었다.
“하하하, 동혁 씨는 탐험가적인 기질이 있는 거 같네요. 뭐든 많이 알고, 뭐든 겪어봤으니, 내가 껴들 수가 없네요. 난 그냥 모험과 거리가 있는 평범한 여자일 뿐인걸요.”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나는 억지로 되지도 않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원래 내 직업이라는 게 다이나믹하고, 일화가 많은 직업에 속하잖아요. 남자라면 모험심이 있어야 하고, 모험심이 있다면 도전해서 성공해야죠. 그게 제 임무인걸요.”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입에서 오물대며 말했다. 그녀도 입에서 음식물을 오물대고 있었는데, 매력적인 보조개가 살갑게 패여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남의 심부름이나 고민거리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싱글벙글 귀엽게 칼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광견병에 걸린 고양이와, 메신저에 기록된 시어머니 뒷담화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그녀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주었다. 와, 정말 대단한 토요일이구나. 와인 잔에 창밖의 스토어 네온사인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을 살짝 돌리니 은하수처럼 한 점의 빛으로 합일되었다. 냄새를 음미하고, 마시고, 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네는 토요일이었다. 업무로 바쁜 문자나 메신저는 일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날만큼은 의뢰인들도 말썽을 피우지 않아서일까.
“치킨텐더 샐러드 좀 드셔보세요. 제가 이번에 스페인에 갔을 때 말입니다. 알람브라 궁전에 그저 마음이 툭 이끌려서, 끌려가 버렸습니다. 그 곳의 이국적인 정취와 내리쬐는 햇살 아래 파릇한 구절초 향이 마음 물길을 흘러 내려가더군요. 저는 그 물길을 따라 고즈넉한 궁전 내부를 여행했습니다. 입구 부근에서 밀짚모자를 쓴 까무잡잡한 할아버지가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있더군요. 저는 망설임 없이 그의 악기 케이스에 3유로를 넣었습니다. 무슨 음악을 연주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죠. 알고 봤더니 그 할아버지가 연주한 노래는 온라인 게임 배경음악이었던 겁니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다시 악기 케이스에서 돈을 그냥 주워와 버렸습니다. 4유로를 주웠어요. 해미 씨가 그 할아버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나한테 욕지거리 하는 것을 들어봤어야 하는 건데.”
그녀에게 꿈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기상한 일화를 꾸며내 이야기할 때, 나는 내 스스로가 정말 일에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트릭과 기 싸움이 중요한 직업의 특성상 거짓 일화는 일에 굉장한 동기를 불어넣어 준다. 능수능란한 과거의 거짓 나부랭이는 상대방에게 강한 신뢰감과 호감을 주기 마련이다.
“어머, 스페인에도 갔다 오셨어요? 증권 컨설턴트가 해외 고객들에게 컨펌을 자주 해 준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라트비아, 이탈리아, 말레이시아, 스웨덴, (어디라고요? 맞다, 도미니카 공화국), 스페인 말고 또 가보신 나라 없나요? 나는 비행기 타고 가본 곳이라고는 우리 어머니가 사시는 포항인데.”
그렇게 의미 없는 대화가 끝나고,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형식적인 프로포즈를 해버렸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놀랐고, 식당 매니저는 관습적으로 우리의 형식적인 사랑에 박수를 보내 주었다. 분위기에 취했고, 술에 취했고, 아름다운 여름에 취해버려서, 우리는 서로의 집으로 갈 힘이 없었다. 근처 호화로운 작은 호텔에서 격렬한 애정의 행각을 벌였다.
“꽤나 힘이 좋으시네요!”
“그래요? 난 채식주의자라 힘이 없다고들 그러는데, 많이 약하시네요!”
절정에 다다르고 정신이 혼미해져왔다. 많은 기억들이, 실루엣들이, 추억하고 싶지 않은 영상들이 눈가를 스쳐갔고, 그래서 성적 욕구가 살짝 죽어버렸다. 나는 결국 사정을 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 모습들은 아내의 살갗이었을까? 아내의 원망과 증오? 그녀는 아쉬운 듯이 드러누워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해한다는 표정과, 안쓰럽다는 표정이 한 데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진짜 나를 탐험가 정신이 투철한 기업인으로 알고 있고, 침대 위에서 조루증에 걸린 것 같은 모습을 보고 나선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알고 있나 보다. 그녀는 아름다운 알몸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고, 나는 드러누워 강장제 두 알을 먹고, 준비해 온 유자차를 두 잔 탔다. 유자차를 담는 아름다운 꽃무늬 컵 두 개가 전등 빛을 받아 반짝 거렸다. 정말 아름다웠다. 이 정도 컵이라면, 부르는 게 값일 텐데. 호텔에서 일반 사람들의 끈적거리는 성관계나 보고 있을 수준의 자기가 아니었다.
“꽤나 비싸 보이죠? 아까 들어오면서 봤어요. 예사롭지 않은 것이 진기명품에 나가면 값 좀 받을 것 같은데. 이 손잡이 부근을 좀 보세요. 미세하게 깨진 게 굉장한 역사를 담고 있는 것 같네요. 고작 중견 호텔의 그릇보관함에 썩혀 있을 만한 것이 못 되는데요. 호텔 담당자에게 선물로 달라고 해 볼까요?”
나는 대꾸 없이 그 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컵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다분히 완벽한 형태의 밑받침 때문도 아니었고, 은은한 은색의 유약 때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무언가 떠오르는 인상을 가벼이 건네주었다. 빌린 물건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때처럼 말이다.
“무언가 떠오르는 거 같아요. 컵에서 그리운 것이 생각나요.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코코아를 타줬을 때, 첫 입을 대었을 때의 느낌. 그 알싸한 무언가가.. 생각나네요..”
그녀는 나와 컵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사소한 것을 보아도 깊은 진지함이 우러나오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려나. 하지만 나는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정말 그 것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어렸을 적 재밌게 했던 씨디 게임을, 30년이 지난 뒤 다시 해보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찾지 못했던 것을 이사할 때 찾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압구정 자택까지 바래다주고, 나는 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막 오후의 고즈넉한 말기에 걸린 해가 한강 수면을 알알이 터뜨리고 있었다. 그 수면에서 터진 빛은 낮에도 보이는 별 같았다. 교통 정체는 언제 빠질지 모르는데,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라디오로 빅뱅의 ‘바보’를 틀어놓고는 핸들에서 손을 놓았다. 근처에 철교가 있어서 지하철이 오가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 왜 그 컵이 나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킨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차들은 일정한 리듬으로 서행하며 앞차와 간격을 좁혀 갔다. 나도 생각의 흐름을 좁혀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여전히 꽉 막힌 도로 상태처럼, 마음 또한 정리가 안 되어 꽉 막혀버렸다. 아련하다. 그 무언가여. 제발. 내게 모습을 드러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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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일요일이 지난 후, 다시 업무를 보기 위해 회사로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대로변 끝부분 횡단보도가 이상하게 꺾이는 지점에서, 할머니 한 분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살짝 속도를 늦추어가며 상황을 면밀히 보았다. 할머니는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미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최소한 중상이었다. 그 옆에선 3명의 청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서 있었다. 경찰과 응급대원이 아직 오지 않은 걸 보니 사고가 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어이없게 단명해버린 우리 엄마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어머니는 53세의 나이에 홀로 생을 마감하셨고, 나는 그 옆에서 홀로 울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채 끝내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에 향초를 꽂아놓고는, 그대로 목을 매셨고, 나도 엄마를 끌어 내리고 그곳에 목을 갖다 대 보았지만, 결국 눈물만이 매달려 흔들거렸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좋은 노래 몇 곡을 듣고, 양배추튀김 몇 조각을 씹어도 보았지만, 출근길의 비애는 좀처럼 가시지 않아 안타까웠다. 햇살이 이렇게 좋은데 말이다!
초콜릿 공장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회사 정문에 들어섰다. 주차장이 너무 좁아 불편했다. 나는 대신에 깔끔한 주택가 부근에 불법 정차를 했다. 구호를 외치는 파업 단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가 비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휘파람을 불고 시계를 보며 지하 3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와, 회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다른 엘리베이터보다 높이가 살짝 낮았다. 그리고 조명이 매우 어두워 굉장히 음침했다. 밤에 타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을 정도로. 문이 닫히기 전 멀리서 경비가 나를 보고 있었다. 회사 경비는 아직도 나를 불법 침입 외부인으로 보았다(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 경비는 아니었다. 흥신소에는 경비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경비의 따가운 눈초리가 같이 타자고 뛰어오는 것 같았다. 지하 3층에 도착하자 강렬한 조명이 어둠에 내리깔렸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출근 번호표를 돌리고, 내 사무실로 곧장 직행했다. 그 사람의 주소는 아직 내 뒷주머니에 있었고, 언제든 전화하거나, 주소로 찾아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김칫국이지. 로봇 토끼는 누가 만들었는지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으며, 내 사무실 입구에서 두 앞발을 들고 서 있었다. 디즈니에서 본 토끼와는 차원이 다른 외모였다. 일단 무서웠다. 나는 발로 살짝 토끼를 찼다. 토끼는 레일을 따라 움직였고 레일에 고정되어 있어 내가 발로 차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새벽녘에 도착한 의뢰들이 5건이나 있었다. ‘세탁소 업체 고발’, 무슨 여기가 변호사 사무소야? 이런 업무는 도저히 못 해. ‘간통하는 남편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세요.’ 간통은 이제 지겨워. 언제까지 러브모텔을 들락날락 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보통은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들이었지만, -궁극적인 의뢰-로 인해 하찮아 보였다). 불길한 예감을 놀리기라도 하듯, 마지막 업무 칸에는 ‘실종 프로젝트’라는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메일을 클릭하고는, 살짝 간이 떨어질 뻔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흑백의 배경과 컬러 전경색 조합의 사진이 바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사진은 음산한 산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길은 나무가 무성한 곳에서 끊겨 보였다. 그 곳을 클릭하라는 듯이 아이콘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주변에 귀신이라도 있나 살펴보며 그것을 조심스레 눌렀다. 그러자 장미와 국화와 백화와 별 꽃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이펙트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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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
여자의 캐릭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힘이 좋으시네요!"에선 솔직히 좀 깬 듯. 조루증이라는 단어는 솔직히 그 자리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함. 지루면 몰라도. 상황을 면밀히 본다는 건 너무 잔인한 표현 아닐까, 상태를 살폈다 같은 표현을 썼으면 어땠을까 생각함.
그리고 전체적인 감상으로는, 꽤 괜찮음. 어차피 이 정도 분량에서 무슨 스토리의 전개를 기대하는 것도 욕심이 과하다 할 것이고, 내가 지금 이루마의 sometime...someone...를 듣고 있어서 그런지 식사를 하는 장면은 꽤 괜찮게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