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삶의 멜로드라마에서 스스로가 맡은 역할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한 존재는 삶은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처럼 보인다. 마음에 담아놓은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여 보여주는 대상적 세계는 이미 존재가 비존재로부터 반기를 들고 출현한 그 순간부터 무질서와 혼란으로부터 대립적인 관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마음에 종속된 존재에게 죽음을 향해 달려 나아가고 있는 삶 앞에서 안정되고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남 앞에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끝내 정직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이나 세상 속에서 힘든 일은 없는 법이다. 이 모순과 역설 덩어리인 삶 안에서 과연 탈출구가 있는지 의문이 솟아날 때 즈음에서야 인간의 존재는 내면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인간의 존재는 갑작스럽게 출현한 대상적 세계를 앞에 두고서 영문도 모른 채, 스스로의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간다. 대상적 세계와 분리된 채, 거대하게 펼쳐진 세상을 앞에서 인간의 육체는 무척이나 왜소하고 무력해 보인다. 육체의 생존은 그 무엇보다도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으며, 그로 인해 인간의 존재는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 문명은 생존의 문제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줄 수 있는 해결책을 탁월하게 구현하는 일에 성공했지만, 종교와의 상생을 이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상 중심적 세계관은 생존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지성을 근간으로 하는 관계중심적 세계관을 고려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사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와 외부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정신적 능력이 필요하다. 다만 이러한 대상 중심적 세계관은 사물을 다루는 데에 적합할 뿐, 생명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적용해서는 안된다. 기계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생명은 대상 중심적 세계관이 아닌 관계 중심적 세계관에 적합하다. 대립쌍이 낳는 양극단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과제는 오랜 시간 동안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사안이다. 마음이 창조한 대상적 세계는 언제나 모든 관계 속에 이원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대상적 세계가 출현한 그 순간부터 마음은 대상적 세계와 대립적 구도를 형성한다.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가 대상적 세계 안에 있다고 믿는 무지를 붙잡고 있는 한, 대상적 세계와의 대립적 구도는 무너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맡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너무나 배역에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가 진정 무엇인지를 잊어버린 형국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움직이는 대상을 끝없이 쫓아가는 의식의 경향성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육체의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해 나타난 마음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취한다. 다만 이러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육체의 보호를 넘어서 과도하게 작용하는 데에서 억압이 발생한다. 긴장할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바짝 신경의 날을 세우고 있는 육체는 늘 타자와 세계를 향해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심리적 방어기제는 단순히 대상을 향한 부정적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분리를 조장하는 생각과 몸짓도 모두 닫힌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방어기제다. 이처럼 타자와 세계로부터 닫힌 마음을 공고히 유지할 수 있도록 내세우는 생각과 감정들도 전부 분리를 실상이라고 착각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일 뿐이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 분리가 없는 하나의 실상을 가리고 그 분리의 틈새 사이로 온갖 마음의 환상을 창조한다. 지각이 환상임을 간파하지 못하는 마음은 진실과 거짓을 분간해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몸이라고 여긴다. 마음이 오로지 몸의 생존만을 위해 봉사할 때, 마음은 온통 대립쌍의 긴장을 조성하는 거짓된 관념들도 내부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마음은 대상적 세계가 스스로가 만들어낸 관념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 거짓된 관념이 수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질 때, 무의식적 억압은 더욱 심화된다. 축적되는 무의식적 억압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대개 어딘 지 모르게 과하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행위와 사고는 모두 무의식적 억압에 따르는 반작용이다. 마음의 습은 안정되고 익숙한 것에 매달리기 때문에 늘 해오던 방식대로 사고하고 행위한다. 그러므로 자체의 한계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용해서는 마음 자체 내에 있는 한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돌고 돌아서 매번 제 자리로 오는 현상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시점에서 마음 자체가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임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보편적 생명기운을 몸 안에 가둬놓고 있는 마음은 무수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평화와 안정에 이르지 못한다. 마음은 존재 본연의 성품이 자유와 사랑 그 자체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늘 그에 따라는 결핍을 충당받아야 한다. 마음이 언제나 더 많은 체험과 색다른 경험을 요구하는 이유는 마음은 스스로를 새롭게 되돌아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창의적이지 못한 마음은 육체를 떠나 생명기운을 마음껏 발산하지 못한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내적 유연성과 창의성은 무의식적 억압이 해소되어 보편적 생명기운을 제한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 숱한 이성과의 만남과 색다른 체험을 가져다주는 여행이 내적 공허함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적 조건과 환경이 무수히 변화하는 와중에도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에 익숙한 마음은 스스로가 몸이라는 사실에 일체의 의심을 품지 않는다. 나라는 기억과 상상의 다발로 얼룩진 몸 형상은 실재하지 않지만, 잘못된 동일시로 인해 실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 마음의 메커니즘으로 인해 스스로를 육체 혹은 마음에서 일어난 감정과 생각과 동일시한다. 이는 존재를 지각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어렵게 만든다. 버젓이 눈앞에 보이는 형상을 제쳐두고 그 너머의 비 형상을 실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음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생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황스럽고 생소한 감정이 바로 형상에서 비 형상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형상이 실상을 표현하고 비형 상보다 앞서 있다고 여기는 마음은 세상 속에서 역설과 모순이 가득 찬 현상을 마주하면서 스스로가 그동안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온 신념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품는다. 진실이 거짓으로 받아들여지고 거짓이 진실로 해석되는 대상적 세계는 바로 마음이 비형 상보다 형상이 앞서 있다는 거짓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몸 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거짓된 관념이 자아내는 무의식적 억압이 서서히 축적된다. 잘못된 동일시로 인해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 무의식적 억압은 끝내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대립쌍이 유발하는 분리의 간극을 더욱 벌어지게 만든다. 아이러니한 점은 대립쌍의 간극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심화되었을 때, 더욱 양극단의 위치가 잘 인식되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실질적 탐구가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절망의 심연 속에서 빛나는 희망의 씨앗은 위기가 실상 새로운 기회임을 여지없이 증거하고 있다. 도무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자발적으로 스스로가 지닌 생각과 아집을 내려놓게 되고 분리의 간극을 좁히는 신성을 일깨운다. 신성은 현존의 강렬함이 가져다주는 다함없는 생명 에너지로 분리의 간극을 녹여낸다. 무의식을 담당하는 정신분석이 통합 심리 치유에서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이라는 집단의 장 너머로 인간의 존재를 데려가는 일이다.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이라고 규정하는 잣대로부터 벗어나 존재 본연의 성품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은 영적인 건강에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에게서 어린아이를 보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가 치유를 앞당긴다. 통합 심리 치유는 심신과 더불어 영적인 건강 전부에 관여한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영혼이 몸과 마음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자기에 속하므로 영적으로 바람직한 존재는 심신의 건강이 나쁘기가 힘들다. 신의 의도와 나란히 정렬된 몸과 마음은 신의 성품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치유가 이루어진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심신의 고통은 신의 의도로부터 벗어난 행동과 사고가 있으므로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달라는 신호로 해석될 뿐이다. 만물과의 상생과 공존을 중요시하는 영적인 삶은 최우선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맞추는 일에 힘써야 하며, 삶 전반에 있어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존재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된 것, 즉 스스로가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의 거짓된 관념이 지워지고 올바른 개념들이 채워짐에 따라 인간의 존재는 신성을 표현하는 통로로 세상 속에서 기능하게 된다. 물론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위치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의도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실상에 부합한다.
성이라는 집단의 장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의 틀을 해체시킬 필요가 있다. 온전한 이해와 앎은 언제나 특정 대상을 향한 해방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대상을 아는 자는 대상일 수 없다는 간단한 법칙 때문이다. 스스로가 그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알아차린 순간에는 대상과의 동일시가 서서히 풀리고 이는 자발적으로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한다. 대상과 나 사이의 분리 감을 유발하는 집착이 해소되면, 대상과의 유희가 가능하다. 존재를 향한 사랑이 반영된 순수한 의도는 그 안에 본질을 담고 있으므로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 억압을 생성하지 않는다. 겉으로 나뉜 둘이 실상에서는 하나임을 전제로 한 관계 안에서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얻어가는 것이다. 관계가 전해주는 위안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질 때, 오히려 바람직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와 네가 실상에서는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있음이 명확해지므로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과 기대 없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상대방이 나를 향해 이렇게 해주었음을 좋겠다는 바람과 기대가 투영된 이상향의 모습은 실상 내면에 그러한 자질과 특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이상형은 스스로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모습의 투사이며, 감정의 억압을 바람직한 자질로 상정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는 대개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연인에 대한 소망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적 억압으로 인해 존재 본연의 성품이 사랑 그 자체임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상대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 안달 난다. 나와 이성 간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받는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사랑을 얻어내는 짜릿한 순간이지만, 결국 몸과의 동일시라는 허상 속에서 형성된 관계는 거짓임이 판명되고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하는 순간에 그 공허한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성을 향한 강렬한 끌림은 그 안에 환상이 겹겹이 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개 의식적인 부분에 있어서 남성보다 보다 관계중심적이고 존재론적 삶에 친화적인 대부분의 여성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남성을 원한다. 스스로를 몸과 동일시하는 여성이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남성에게 투사한 결과다. 남성의 경우에는 순결을 지키는 태도와 순진무구함을 지니고 있는 여성을 바람직하게 여긴다. 이는 남성이 진정한 자기 자신의 본질인 순수성을 외부 여성에게 투사시킨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이 무의미한 이유는 진정한 인간 존재의 성품이 성에 구애받지 않는 무한한 바탕, 즉 순수 의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스스로가 바라는 이상형을 통해 자기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향해 온다고 믿었던 일체의 감정과 생각들이 실상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거짓된 관념이 물러가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드러난다. 이러한 해석을 성을 삶 속에서 부정하라는 말로 곡해해서 들어서는 안된다. 성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맘껏 유희하는 것은 자유지만, 스스로를 남성 혹은 여성과 동일시하여 그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를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개념에 한계 지우지 않을 때, 오히려 성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맘껏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통과 무지의 바다인 세계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가 세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을 때이다.
의도와 목적, 바람, 소망, 희망 기대를 완전히 내려놓은 채, 대상을 바라보면 일체가 나일 뿐이라는 진실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신의 성품을 구현하고 있는 순수 의식은 만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순수성을 담고 있다. 마음 너머에서는 세계에서 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와 너, 나와 세계 사이의 분리의 간극이 완전히 해소된 곳에서는 마음의 방어기제가 오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단일한 실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일한 실상을 알고 있는 비 이원적 상태에서만이 대립쌍이 가져다주는 모순과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다. 거짓된 관념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평화와 안정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권태와 무료함으로 받아들인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않고 익숙한 것에 싫증을 내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영에 속아 넘어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본질을 볼 수 없는 무지 때문이다. 무지는 사랑의 부재이며, 영혼과의 단절을 암시한다. 스스로가 만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단일한 신성의 살아있는 표현임을 모르기 때문에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생명의 바닷속에서 단조롭고 지루한 흑백영화를 본다. 미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메말라버린 황무지에서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영혼은 그토록 스스로가 찾아 헤매던 것이 바로 곁에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생기가 충만한 젊은 시절에 누렸던 부와 권력, 성이 모두 물러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온통 거짓과 역설뿐인 세상 속에서 유일한 진실이다. 몸을 움직이게 하고 일체를 지각 가능케 하는 힘은 육체가 아닌 순수 의식의 빛으로부터 나온다. 오감과 에너지 차원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본성을 되찾은 존재는 창조주와 창조물이 본래 하나임을 깨닫는다. 존재하려는 욕망이 부질없음을 알고서 이를 내려놓을 때, 시공간이 사라진 영원 속에서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둘이 하나가 되고 이윽고 전부가 된다. 전부마저 사라지고 나면, 존재의 근원이 나타난다."
본문 내용처럼 물이 차서 빠져 죽을때쯤 되면 알아서 올라오겠죠 ^^;
맞습니다 카르마와 업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운명또한 환상임이 밝혀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