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일발장전.
객관적 관점(그런 게 있을까만은), 또 영원성의 관점은 항상 부정성에 근거한다.(그러한 부정성이 객관적 관점이요, 타자들의 영원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헤겔의 말과 비슷하지?) 무한은 생성이 아니다. 무한은 빼기와 나머지 하나 등의 부정적 연속성의 결과물이다. 사건과 사물(현상)은 나의 관점(관찰자의 시선)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다(항상 한발 앞서 드러난다). 모든 있는 것은 관점(관념)의 결과물이 아니다.
객관적 관점(그런 게 있을까만은), 또 영원성의 관점은 항상 부정성에 근거한다.(그러한 부정성이 객관적 관점이요, 타자들의 영원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헤겔의 말과 비슷하지?) 무한은 생성이 아니다. 무한은 빼기와 나머지 하나 등의 부정적 연속성의 결과물이다. 사건과 사물(현상)은 나의 관점(관찰자의 시선)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다(항상 한발 앞서 드러난다). 모든 있는 것은 관점(관념)의 결과물이 아니다.
'학(학문)'으로서 철학은 늘 읽고 쓰며 생각하는 자의 몫이다. 읽고 쓰고 반성하는 것이 철학공부의 전부다. 그런데 나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다. 게으른 나의 이 넋두리는 그래서 철학이 아니다. 철학 비슷한 것도 아니다. 학으로서 철학은 항상 내 능력 밖의 사태였다.
그런데 비교적 자명한 사실성을 담지하고 또 추구하는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은 결국 인식론적 차이를 문제삼지 않는가. 우리가 유물론을 말하고 일원론을 입에 담을 때, 우리는 관념론자와 똑같은 기적의 순간을 살고 있다. "나무와 금속이 똑같은 입자들의 작용에서 생겨났다니!"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정신, 비와 바람, 별과 태양이 몇 개의 입자들로부터 생겨난 것을 알고 있다. 중력과 전자기력 또한 그 입자들의 운동을 표현하는 말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그 '사실들'을 확신할 수 있는가? 그 확신의 근거는 수학적(물리학적) 공식인가, 당신의ㅡ확신에 찬ㅡ말씀인가?
수학은 정말로 태초(의 사건)를 목격하였는가?
지금 제 주장은 수학을 전혀 모르거나 수학을 아주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는 전자입니다.
관념을 말하는 자가 항상 태어나 본 적 없는 태초와 가본 적 없는 절대(혹은 무한)를 입에 담듯, 유물론자(혹은 과학자)는 항상 눈앞의 갓난아이와 올해도 다시 핀 목련꽃 따위를 보고 그로부터 우주의 생성을 입에 담는다. 삼라만상은 꽃의 피고 짐이 아니며, 실제 우주는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노자laozi가 "창을 열지 않아도 낙엽이 지고 멀리 샛바람이 도는 걸 안다"고 했을 때, 그 말이 정말로 유심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창 바깥은 실제로 낙엽이 지고 샛바람이 도는 가을이라고 했을 때도 말이다. 관념론을 지지하는 당신은 당신의 얕은 느낌으로부터 노자를 불러들인 건 아닌가?
빛보다 빠른 것이 관념론자의 세계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생각(느낌)이다. 50억 년 전 쏘아올린 태양빛이 이제 겨우 250만 광년의 안드로메다를 지났을 때, 2024년 바로 지금의 너와 나는 150억 년 전의 태초와 150억 년 후의 우주 끝을 순식간에 오고 간다. 생각(느낌) 또한 우리의 뇌내 속 전기신호이며 물리적 촉발성이다. 그토록 사소하고
자그마한 한 인간(존재자)의 전기신호가 빛보다 빨리 우주와 처음과 끝을 찰나에 동시적으로 왕복하고 있다. 생각(느낌, 상상)이 물질이라면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고 우주와 함께 나고 죽으며 우주의 시작과 끝을 지금 여기에서(찰나로서) 실현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처럼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고 다만 타인의 삶(과 꿈)을 살 뿐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
타인의 상상 속에 머문 나는 정말로 지금의 나인가? 타인의 경험세계로서 가닿는 절대(혹은 무한)와 나의 경험이 그 속에 참여하는 절대는 무엇이 다른가. 내가 미처 겪어 보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타인의 무한 속에 있는 나는 나인가 타인(의 생각:상상)인가? 그 절대 주관과 절대 객관 사이에 있는 것은 나와 너가 아니라 오직 '아예 없음(무)' 뿐이다. 즉
우리 모두는 지금 당장에도 우주의 처음과 끝을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지만, 아무도 타인의 그러한 권능을 인정하는 자는 없다. 혼자 가고 혼자 돌아오는 것이다. 무한의 가능성은ㅡ결국ㅡ오직 나만의 가능성이다.
58님, 28님, 220님 등등. 이건 힌트가 아니라 나의 세계관을 숫제 까발린 것이니 이걸 토대로 뭔가 한번 써 보세요. 칸트와 헤겔이 뒤죽박죽되고, 무엇보다 박동환 선생님(X의 존재론)을 많이 의지한 거지만, 진짜로 이런 주장(유심론의 작은 것이 유물론의 끝에 다다르다)을 펼친 사람은 드물어요. 님들이 한번 해보세요!
양자역학의 시대에, 이거 잘만 하면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나의 이 어줍잖은 고해(고백)를 철갤선생님들께서는 부디 헤아려 주옵소서. https://youtube.com/watch?v=cQZg7YoZ3lw&si=3jaa9u0aSF00mP9y
한국에서는 어렵고, 아니 거의 불가능한 공부인 걸 알아요. 그래도 해보세요. 자그마한 노트를 남기세요. 그러면 훗날의 딜스와 크란츠가 님들의 말씀을 발견할 겁니다. 나는 한국의 학문과 한국학자를 믿지 않아요. 한국사회는 내 비극의 원초입니다. 물론 태어난 것이 가장 큰 비극이지요. 머잖아, 곧 지금의 한국사회는 다인종 다문화에 의해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철학사적으로 가치있는 텍스트는 종말 무렵에 자주 등장합니다. 채 100년도 안 되는 한국의 어린 인문학은 아예 씨앗부터 말라비틀어질 겁니다. 훗날 김대중 개새끼의 무덤을 파묘하는 날보다 한국 인문학의 종말이 먼저 도래할 것임을 나는 장담하고 또 장담합니다. 이제까지의 철학을 버리십시오. 특히나 한국인이 주장하는 서양철학사는 죄다 폐기처분하십시오. 진심입니다
제주도, 강원도, 전라북도는 이미 특별자치도가 되었고 경상북도와 대구는 통합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 이젠 목포시와 신안군이 통합하되, 그 명칭은 신안시로 할 거라는 목포시장의 제안이 나왔습니다. 결국 이럴 거면 처음부터 미쳤다고 지방자치제를 했습니까! 이 작은 나라에 지자체는 전혀 효율적이지 않아요. 그런데도 586개새끼들은 광주정신,
김대중, 노무현 정신처럼 그 정신만은 잊지 말자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신"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님들은 아세요? 정말로 아시나요! 개판입니다. 뿌리없는 나무에 무성한 가지가 뻗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촘촘히 생겨나서 나무기둥 자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바로 한국사회의 모습이에요.
한반도 최초의 진짜 혁명은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 필리핀 등등의 외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겁니다. 이건 나의 유일한 예언입니다!(중국 조선족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국가권력, 국제간 외교의 꼭두각시이거든요. 의미론적으로도 그건 혁명일 수가 없고, 실제로도 그런 정치외교사적 혁명은 성공한 사례가 없어요.
혁명은 오직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그 내부의 혁명사적 동인은 이미 다문화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베트남계 한국인, 필리핀계 한국인이 일으키는 내부 소요를 미국은 간섭할 수 없죠. 도리어 뒷짐지고 박수칠 겁니다. 그간 우리를 짖누르고, 우리가 복수하고 싶었던 정치인, 판검사, 자본가들의 자식은 그들에 의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이 갈기갈기 찢겨질 겁니다.
진짜 업은 그런 것입니다. 시간이 더딜 뿐, 까르마는 반드시 실재합니다!
숨죽이며 숨어 있는 혁명가 220님과 함께 듣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R8UAFE21BN4&si=ftbARPpBQUi5_a42
일본의 현상학자(서양철학자)이자 칸트 전공자인 기다 겐 씨(그의 스승이 일본 칸트철학의 대가였음!)는 "동양인은 서양철학을 할 수 없다!"는 과감한 주장까지 펼칩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씨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잠자리도 다른 세상을 꿈꾸니까.(서울에서 태어난 잠자리는 어느 날 세찬 바람을 타고 부산까지 ktx보다 빠르게 당도하죠.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일본이나 미국까지는 날아가지 못하더라도 서울 태생의 잠자리는 그저 막연하게 바다가 그리웠던 겁니다. 거기까지면 충분합니다.) https://youtube.com/watch?v=bIx2KoPu3Tk&si=vkAqUQeC4o24OmaJ
꽤나 멀리 갔다 오셨네요. “나” 가 결국 답인것 같습니다. 사실들은 결국 관측에 의한 발견이고, 그 발견에 의미와 인과관계를 부여하는건 시공간입니다. ”나“ 는 시공간의 일부임과 동시에 시공간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이 시공간 외에 다른 시공간도 있겠지요, 그게 바로 바깥 세상이고- 그 바깥 세상 또한 “나”입니다.
그 둘을 구분해는건 결국 우리가 시공간을 나누며 도달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하는 영역의 구분입니다.
고독사님 혹시 명상하시나요?
저는 관측의 신빙성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굳건히 믿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제 자신을 관찰합니다. 그리고 바깥 세상과 교감하는 저를 또 관찰합니다. 그리고 그 관찰하는 제 자신을 또 관찰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근데 언젠간 밥 먹고 물 마셔야죠. 그리고 또 돌아와서 다시 해봅니다.
104/ 그럴 듯하네요.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명상 대신에 주로 술을 마십니다. 몹시 취했을 땐 우주와 내가 한몸인 듯도 하고 몰아지경 비스무리한 것에도 도달하죠. 근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또한 내 의식과 무의식들의 속임수이니까.
자기만의 답을 얻기 전까진 전부 미신의 영역이라 생각합니다(쌔벼온 말)
자신만의 답도 미신이죠. 우리는 그 미신을 향해 미친듯이 생각하고 읽고 씁니다.
예상을 뒤엎는다...후덜덜...
이토록 외롭고 험한 우주를 지나면서 유자나무 님을 만났다는 건 정말로 행운이고 기쁨입니다. 고맙습니다♥+across the universe https://youtube.com/watch?v=1bAQ1OfLybA&si=PR4_yjjIv24-DQ-q(가짜 커트 코베인:그러나 내게는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