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철학자(사실 저명하다는 것도 상대적이지만)들이 주장하는 생각만이 철학이 아니고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생각도 철학으로 간주되나요?
개인의 생각 = 철학이라고 볼 수 있나요?
익명(118.221)
2024-07-22 13:36:00
추천 2
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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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간주되지요.
모든 철학의 목표는 철학을 하지 않는 것. 머리를 깨끗하게 비우는 것입니다. 왜냐면 더이상 생각할거리가 없으니까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마음속에 무언가 응어리가 있다는 겁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할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명성의 차이는 있지요.
아무도 철학할 수 없다 게이야 생각함이란 결국 언어(논리)이고 언어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곳으로부터 주어지기때문에 모든 철학은 익명의 철학이다
푸 재밌네 이 친구! 닉값 인정.
철학은 말 그대로 제학문적 학academic discipline(학적 체제 또 스칼라십)입니다. 그래서 엄밀히는 전공자(란 말이 꼭이 강단의 학자를 가리킨다고 보기엔 애매하지만)의 몫이죠. 다만 처음 철학이 탄생한 시원(아카데미 이전의 자연철학이나 거리 유세 등)으로 거슬러오르면 각 개인 나름의 지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혜와 학은 같은 뿌리를 가진
고대 그리스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즘도 강단철학, 곧 체계성이 철학의 전부인가? 라는 질문이 등장하죠. 니체 같은 사람은 기성철학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했음에도 철학자로 불리니까요. 하지만 그를 반철학자(반철학이란 신조어가 아직 개념정의된 건 아니지만)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어렵게 이런 걸로 고민하지 말고, 철학은 철학 전공자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배우면 될 것 같아요. 간단히 말해서, 철학 비스무리한 우리(일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생각과 고민은 이제껏 그렇게 써왔듯, "철학'적'"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철학자가 못 되더라도 철학적이기만 하면 인간의 자질을 갖춘 것이죠. 세상에는 철학적이지도 못한 개인이 훨씬 더 많습니다.
또 달리, 플라톤의 철학은 플라톤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플라톤 이전의 밀레토스 이오이나인과 엘레아인, 그리고 고향 땅 선배 현자들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근대의 칸트라고 다를까요. 칸트철학은 칸트 개인의 것이지만 거기엔 흄과 데카르트, 뉴턴과 라이프니츠, 루소 등 수많은 인물의 생각이 섞여 있고 녹아 있죠. 칸트 전공자도 사실 칸트만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할 수도 없구요. 본인은 니체를 공부하지만 쇼펜하우어도 칸트도, 심지어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까지 읽는다는 말은 취미삼아 철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말만이 아니에요. 전공자 또한 그런 식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철학에서는 철학사도 텍스트(원전) 만큼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오니아ionian school
※참고로 철갤러 220님의 댓글은 제법 철학적인 말이지만, 전공자들이 보건대 그의 댓글을 '철학'으로 여길 일은 거의 제로에 수렴합니다.
다시 또 다르게는, 사실 220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뛰어난 철학자는 사실 저마다의 철학 과정을 통해 엘레아인으로부터 플라토를 통해 진행된 실재론(혹은 본유관념:일자, god 따위) 따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목적이 컸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제가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의 철학자 칸트이구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칸트
또한 우리 인간이성은 신(물자체)이니 이데아(실체)니 하는 걸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합니다. 전부 헛소리라는 거죠. 이런 서양철학사(=사상사) 2천 5백 년을 짓누르는 도그마는 본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론)에서 촉발합니다. 일자to on는 제가 자주 말하는 무(없음)의 성격과 흡사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무한하고 움직임이 없고 다른 것으로
나누어(쪼개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홀로 있으며 결코 변하는 법이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다만 그것을 '(유일하게)있는 것'으로 파악했고 세계 자체로 보았습니다. 존재론, 아니 메타퓌지카가 탄생하는 순간이죠. 잠시 제 얘기를 하자면, 칸트 외에 제가 자주 입에 담는 '아예 없음'이라는 전혀 비철학적이고 존재론에 반하는 말을 저는 인간이 생각해 낸,
아니 정확하게는 인간의식에 자리잡은 가장 위대하고 멋진 생각이라고 믿거든요. 제 생각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없음'이라는 관념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모든 있는 것(들) 앞에서 없음을 생각해 낼 수 있지, 할 수 있지? 하지만 없음은 수학자의 세계에서나 자주 이해될 수 있을 뿐, 우리 일상언어 속 없음의 사용법은 항상 있음의 반댓말 혹은 보이지 않
는 저편, 그러니까 드러난 모든 것의 이면 또는 사후적 추측에만 머물죠. 그런데 이 무(없음)의 성격을 고스란히 역전시켜 '있음(존재)'에 대입해 보세요. 뭐가 생겨납니까? 예, 이 세상, 곧 모든 있는 것들의 완전성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요?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안 그래요?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생물학적으로 동물일 뿐인 인간종의 뇌내에는 드러난 이 모든 것, 곧 세계의 완전성을 의식하는 어떤 능력이 그것도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더라!
완전성, 완전함의 다른 말이 뭡니까? 통일성 아니에요. 즉 나의 이 작은 뇌내에 드러난 삼라만상 모든 것이ㅡ이미 그러한 채로ㅡ입력돼 있더란 것. 미치고 자빠질 노릇이죠. 환희이자 전율 그 자체죠.
아 시바, 뭔가 간단하게 말할 거리가 떠올라서 시작했는 데 또 길어지네. 종일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속이 쓰립니다. 맥주 좀 사와서 한잔 마시고 계속할게요.
술사러 나왔다가 술집에 앉아 있습니다. 동네에 새벽 3시까지 하는 술집(닭발집)이 있어서 한잔했습니다. 그러니까 220님 말씀도 옳아요. 위 댓글에서 조트겐님의 말씀은 비트겐슈타인 전기에 해당하는, 아니 가까운 말이고, 220님은 후기에 가깝죠. 아무튼 모든 철학의 끝은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해방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즉 인류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선험적 욕망(=정념)이거나 나아가 의무일 수도 있겠네요.(인류가 보편성이라는 믿음을 여전히 견지한다면.)
;또ㅡ그렇다면ㅡ이런 형이상학적 불편함의 해소로서 철학함은 누구나에게 당연하고 모두의 가능성이 맞습니다. 결론: 220님은 역시나 철학을 하려고 태어난 '철학자' 맞습니다!
*누구에게v나v
거듭, 220님이 말씀하신 "여전히ᆢ풀리지 않는 문제"는 이제 형이상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죠. 니체는 말하는 "그들로부터 이중의 가면을 요구하는" 심리학 따위에도 모두 적용됩니다. 망치로도 깨부술 수 없는 '이중의 가면'은 어쩌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극복하려는 데서 생겨난 부작용, 곧ㅡ인류사ㅡ새로운 병증의 시작일런지도 몰라요.
*니체가 말하는
술집에서 종일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은 몹시 추한 것이라서 일단은 여기서 그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