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라는 말에는 울림이 있다. 이 말에는 지난 역사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묻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함수函數function라는 수학 용어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말이다. 영혼이라는 말이 생기고 그것이 널리 사용되었던 세월에 비하여 함수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 정립된 개념이고 그것을 수학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두루 학습케 하는 보통교육이 실시된 역사는 훨씬 더 짧다 하겠다. 그렇다면 인류의 긴 역사와 함께하여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종교적 개념인 영혼이라는 말과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의 함수라는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인류가 보편적으로 영혼이라는 말을 쓰게 된 이유는 태어난 사람 모두가 죽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은 태어나서 나이들고 병들어 죽게 되는데 죽음이란 현상 정해진 운명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 확실한 해답이 없는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의 사람들은 살면서 보통 타인의 죽음을 누군가를 통해 전해듣는다. 현대의 문화에서 죽음 가까이의 사람은 보통 매우 고독하며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곁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 죽음에 대한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남들은 쉽게 누릴 수 없는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 사회 우리 문화에서 죽음이라는 사실은 감추어져 은폐되어 있다고 하겠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 앞에 목도했다고 해 보자. 숨이 끊기기 전의 사람이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당신의 손을 잡아 보고 힘을 내어 당신에게 여러 마디의 착한 말을 남겼다고 해 보자.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 보자. 그 순간을 맞이하여 어쩌면 당신은 깊은 침묵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릴 수도 있겠다. 사람의 삶과 죽음이란 무엇이고 대체 숨이 끊어진 그 순간이 왜 죽음의 순간으로 판정되며 '그 사람'이 무엇이기에 무엇이었기에 '이 세상'을 떠나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사람의 몸뚱아리 즉 그 사람의 시체屍體는 바로 당신의 눈 앞에 남아 있는데 숨을 쉬지 않는 그 시체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다. 그 분이 만약 돌아가신 것이라면 잠시 이 세상에 오셨던 그 분께서 돌아간 그 곳은 어디가 되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이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무엇은 아닐까?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가는 것 그리하여 둘이 분리된 상태를 일컫는 것은 아닐까? 영혼이 떠나간 육체는 물이 빠져나오고 썩어서 흙이 되고 바람이 된다. 육체가 아닌 영혼은 그 영혼이라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영혼이 가는 곳은 그가 살았던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인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나쁜 세상인 것일까.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아니하는데 인간이 착각을 하여 그것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세상은 오로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람의 정신은 뇌를 통한 전기신호에 불과하며 영혼이라는 것은 사람의 정신의 일종이었기에 그것은 인체의 전기 신호가 멈추게 되면 소멸되는 것에 불과할까.
아름다움이란 말이 어울리는 영혼이라는 개념에 잠시 딱딱한 법률의 이야기를 하겠다. 법률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진 인격을 중심으로 그 인격에게 권리가 있음을 정해 두고 만약 벌을 받아야 한다면 바로 그 인격에게 책임을 묻는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국가에 출생신고를 하면 그 인격이 법적으로 인정이 되고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의 나이가 되면 온전한 인격을 갖추게 되며 그 사람이 사망함으로써 인격이 소멸되게 된다. 이 때 사람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대해 법률적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심폐 기능이 멈추었을 때 하나의 인격이 소멸하였다고 하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뇌의 기능이 정지했을 때 그 인격이 소멸하였다는 설이다. 두 문단 전에 '숨이 끊어진 순간'을 말하며 사람이 사망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 장면은 심폐 기능이 멈추었을 때 사람이 사망하였다는 설에 따라 죽음의 순간을 그려 본 것이라 하겠다. 심폐 기능이 멈추었을 때 사람이 사망했다고 판정하는 설이 전통적인 해석이었다면 요즘은 뇌 기능이 멈추었을 때 사망했다고 판정하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기초의학을 배우면서 인간 신체의 여러 계통에 대해 알게 된다. 인간 신체의 기본적 모양은 뼈의 형태와 그것을 잇는 관절의 구조에 따르고 뼈에는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근육이 붙어 있다. 근육은 피부로 덮여 있다. 근육과 피부에는 신경이 분포하여 감각과 운동을 할 수 있게 하고 뼈와 근육과 피부에는 혈관이 분포하여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가져간다. 피부에 존재하는 말초신경은 척수와 뇌의 중추신경으로 모이고 중추신경에서는 근육으로 운동을 명령한다. 인간은 음식물을 섭취하여 생명현상의 기본 에너지가 되는 재료를 얻고 호흡을 하여 그 재료를 연소시킬 산소를 받아들인다. 음식물의 통로는 구강 식도 위 십이지장 소장 대장 직장 항문이 되고 그 음식물을 연소시키기 위한 산소의 통로는 코 기관지 폐가 된다. 폐를 통해 공기가 혈관으로 녹아들고 각 소화기관을 통해 소장에서 영양분이 혈관으로 흡수된다. 흡수되지 못한 찌꺼기는 똥이 되고 영양분과 산소를 흡수한 혈관을 통해 신진대사가 이루어져 그 노폐물이 소변으로 배출된다.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 바이러스 진균 등에는 면역반응을 일으킨다. 요컨대 신체는 뼈와 관절과 인대 근육으로 이루어진 근골격계가 있고 감각과 연합과 운동을 담당하는 신경계가 있고 그 신경계에는 피부조직과 근육이 관련된다. 그리고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고 그것을 소화시켜 흡수하는 소화계통이 있고 그 영양분을 연소시키는 요소인 산소의 공급을 담당하는 호흡계 그리고 소화계통의 영양과 호흡계의 산소를 서로 합하여 온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심혈관계 그리고 질병적 요소에 대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면역계가 있다고 하겠다.
뇌사설은 신경계의 중추인 뇌가 기능하지 못할 때 사람이 사망했다고 판정한다. 그런데 뇌가 죽었다고 신체의 다른 계통이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심폐 사망설은 심장이나 호흡이 멈추면 사람이 사망했다고 판정한다. 그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심장이 정지하면 호흡도 따라 정지하고 호흡이 막히면 잇따라 심장도 기능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심폐기능이 멈추면 빠른 시간 안에 다른 신체기능이 따라 정지하게 된다.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이 다른 신체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뇌사상태로 살아있는 사람을 보통의 말로 식물인간이라고 하며 그룹 클론의 강원래는 바로 그 식물인간 상태에 오랫동안 있다가 다시 뇌 기능을 회복하게 된 케이스라고 하겠다. 현대 뇌사설의 광범위한 지지는 연명치료에 대한 의료진의 피로함과 또 의료비용을 지불하는 관련인들의 경제적 부담 그리고 장기이식에 대한 수요 등이 맞물린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 같다. 인체를 이루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적인 요소만을 나열하여 그것으로 생과 사를 가르는 법적인 기준만을 따진다면 먼저 우리가 말하던 영혼이라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영혼은 무엇인가? 영혼은 우리가 위에서 나열한 물질들은 아닌 것 같다. 육체를 이루는 것이 물질이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육체를 이 세상에 놓아 두고 떠나갔다 하지 않는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마지막 큰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고 하자. 더 이상 숨 쉬지 않게 된 그가 마지막 숨을 쉬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숨을 쉬지 않게 된 바로 그 사람에게 그가 남기고 떠난 육체에다 대고서 '아버지'나 '여보' 또는 '스승님'과 같은 호칭을 부를 수 있겠는가? 숨이 끊어진 그 육체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하겠다. 실체에는 본질적 속성과 부수적 속성이 딸려 있고 한 사람을 어떤 실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실체가 본질적 속성을 상실할 때 더 이상 같은 실체가 아니게 된다고 하면 사람의 본질이란 육체보다는 영혼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삶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과 포개져 생각이 되는 날 푸른 하늘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그 사람에게 세상을 떠나 간 아버지의 본질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있어 바로 그 영혼이 하늘에 하늘나라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숨을 쉬면 산소가 공급되고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산소를 실어 나르는 세포는 적혈구라고 한다. 적혈구에는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이 있어 산소를 결합시키고 그 헤모글로빈에 필요한 원소가 철이고 그 철 때문에 적혈구가 붉게 보이고 그래서 피가 빨간 색이라고 한다. 적혈구는 광학현미경을 통해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물질적 실체라고 하겠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실체를 둘로 나누었다. 그 하나가 물질이고 다른 하나가 정신이다. 그는 물질이 연장延長을 가진 실체라고 한다. 연장이란 가로/세로/높이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물질이 연장을 가진 실체라면 연장을 가지지 않은 실체도 있는가?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과연 그러한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이 실체란 말인가? 사람들은 보통 기독교의 허위성을 논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신 그것이 만약 있다고 한다면 내 눈 앞에 가지고 와 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과학적 측정 장비를 통해서도 전혀 드러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그런 것은 없다고 논증한다. 연장이 없는 실체란 무엇인가? 물질과 정신을 나눈 데카르트의 이원론 그가 말한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데카르트를 자세히 읽어보지 못하였고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정신으로 분류되는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석판명한 규정을 내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한다. 다만 나는 여러 사례를 듦으로써 연장이 없는 실체 즉 정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독자들이 대충의 감을 잡도록 도울 수는 있다. 먼저 현대의 유행가를 생각해 보자. 대부분 사랑 노래들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노래이든 사랑이 끝난 후에 부르는 이별 노래이든 대부분이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사랑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누군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랑은 돈이야" 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물질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겠다. 사랑은 돈이고 돈은 물질이기 때문에 사랑은 물질이 된다는 논증이겠다. 과연 이 논증은 타당하고 건전한가? 논증이 타당하려면 논증이 형식적으로 올바라야 하고 논증이 건전하려면 논증이 타당하면서 동시에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어야 한다. 일단 위의 논증은 올바른 형식을 지녀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논증이 과연 건전한가? 위 논증이 건전한지 알기 위해서는 논증의 전제들이 참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논증의 전제는 둘이다. 하나는 사랑은 돈이다 라는 명제이다. 다른 하나는 돈은 물질이다 라는 명제이다. 사랑은 돈이다 라는 명제는 발화자의 개인적 주장이므로 일단 맞는 것으로 해 두자. 문제는 두 번째 명제이다. 돈이 과연 물질인가? 돈은 화폐이다. 화폐는 한자로 貨幣로 적는다. 재화 화 자에 비단 폐 자를 쓴다. 재화도 분명히 물질이고 비단도 분명히 물질이다. 화폐는 쉽게 재화와 교환이 가능하며 그 교환을 쉽게 할 수 있는 단위를 휴대가 가능한 귀한 물질인 비단과 같은 것으로 정하여 두었다고 하자. 비단 한 필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정해져 있고 그 단위를 기준으로 하여 다른 재화들의 가치가 정해졌다고 하면 바로 시장에서 기준으로 통용되는 비단이 화폐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비단이라는 물질을 들고 가서 시장에서 다른 것과 교환하는 시대는 아니다. 핸드폰 화면에 통장 잔고를 나타내는 숫자가 찍혀 있고 그 숫자의 가감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재화 및 서비스와 교환을 한다.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세대들은 동전과 지폐로써 상거래를 하였다. 동전은 금속을 성형한 것에 불과하고 지폐는 종이에 잉크를 찍은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치를 가진단 말인가? 10원 동전의 크기가 줄어든 이유는 물가 상승 때문에 10원 동전을 이루는 물질적 요소인 구리 금속의 가치가 10원의 가치보다 더 크게 되었기 때문이다. 10원 동전의 재료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거래되는 약속된 가치보다 더 크게 되면 10원 동전을 불에 녹여 그것을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이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10원 동전의 재료적 가치를 실질가치라고 하고 사회적으로 약속된 가치를 교환가치라고 한다. 화폐의 실질가치가 교환가치보다 더 크면 그것은 화폐로서의 기능을 잃는다.
실질가치는 화폐를 이루는 금속 그 물질에 귀속된 가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화폐의 교환가치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화폐의 교환가치는 바로 화폐를 발행하는 기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종이에 잉크를 인쇄한 미국 1달러 화폐에 in god we trust 라고 적힌 문구는 미국 화폐를 발행하는 유대인 금융가들과 미국 정부의 신뢰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용화폐에 필수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행정을 담당하는 정부를 신뢰하기 때문에 종이에 잉크를 인쇄한 각국의 화폐들이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 속에서 권위를 가지고 널리 통용되어 쓰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믿음 그 자체는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믿음에 기초한 신용화폐를 자신의 것으로 한 사람들은 그 화폐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가?
상대적으로 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화폐가 물질이라는 말이 깊이 와 닿을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재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화폐는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가난한 사람들은 벌어들인 돈의 상당량을 식료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한다. 식료품은 말 그대로 피부에 와 닿는 물질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에게 돈은 성공의 징표와 같은 것이다. 돈을 매우 많이 번 사람들은 물론 싸구려 불량식품을 먹는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먹는 음식이 만약 그것만 먹고 산다면 오백 살의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것들은 아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주식회사의 지분을 이용해서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그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물질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행위이겠지만 그 시발점에는 기업가의 정신이 있다. 돈이 물질적 조건을 좌우하는 큰 영향력을 가진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돈 그 자체가 바로 물질인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은행 계좌에 찍힌 백만원의 숫자는 다른 물질이나 서비스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힘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겠다. 가능성과 힘이라는 것은 그것이 실현되고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연장을 가진 실체들의 운동으로 변화되어 눈에 보이게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연장을 가진 실체는 아니다. 누가 가능성을 시각을 이용해서 보고 누가 힘 그 자체를 보았다고 하겠는가?
유행가의 사랑 이야기로 돌아가자. 춘향가에서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라는 소리를 할 때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품사로 따진다면 명사인 것일까 아니면 동사인 것일까? 아니면 명사이면서 동시에 동사일까? '내 사랑'이라는 말은 성춘향이라는 사람을 지시한다. 성춘향이란 사람은 그녀의 신체라는 물질적 요소와 더불어 그 신체에 깃들어 있는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 앞의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소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랑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던가? 판소리 명창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가 사랑이던가? 아니면 그 소리가 물질적 실체를 가진 공기의 떨림 그 파동의 전달과 같으므로 물질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판소리 명창의 소리를 듣고 성춘향과 이도령이 노는 모습이 빈 허공에 그려지면 그것으로 사랑이 물질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터인가? 서구 중세의 수많은 교회들 바로 그 교회 건축과 교회 미술과 교회 음악의 악보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모든 물질적 유산들을 가능하게 했던 그 원동자는 아니었을까?
사랑은 영어로 love이다. love는 동사이기도 하고 명사이기도 하다. love가 동사로 쓰일 때 love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필요하다. i love you 라는 식의 문장이 되어야 한다. love는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 있다. 주어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하고 목적어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다. to love two languages is to have two souls 와 같은 문장에서 to 부정사는 love의 특수한 관계적 성격을 지양하고 그것을 보편의 것으로 추상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과거 교조화된 유학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고 오륜은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오륜의 의義 친親 별別 서序 신信은 그것만 따로 놓고 보면 독립되어 존재하는 고상한 정신적인 가치인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은 태생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다.
한편 사이 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인 가치들도 있다. 바로 진眞 선善 미美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이전에 충분히 다루어진 어떠한 것에 대해 내려진 평가와 관련된 술어라고 하겠다. 어떤 것을 충분히 판별하여 보고 거기에 참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보고 그것을 선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이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 진이든 선이든 미이든 어떤 대상을 그에 해당하는 가치로 집약하여 전환하고 보면 그 대상의 과정과 거기에 포함된 복잡다단한 것들은 서서히 망각되고 그 집약된 가치에 대한 인식만이 남게 된다. 마치 중간고사 수학 시험을 채점하여 100점을 맞은 학생이 100이라는 숫자를 확인한 이후 그 시험지의 내용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것 처럼 말이다. 100이라는 숫자 또한 똑 같은 것 100개를 나열한 물질과 관련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런 물질을 하나하나 헤아리지 아니하여도 100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100이라는 수를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수학 연구는 자유라고 하지 않던가. 참고로 가능성이자 힘은 과정의 처음에 있고 평가와 관련된 술어는 과정의 끝에 위치한다.
영혼 이야기를 하려다가 물질이 아닌 실체 즉 정신에 대한 여러 사례를 나열하였다. 다시 영혼의 문제로 돌아가자.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하는 청소년의 고민이 있다. 바로 이 세상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있는 걸까? 없을 수도 있었는데. 무언가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한 다음에 하는 고민이 있다. 없지 않고 있는 세상을 인식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로써 이 세상의 존재는 인식하는 나와 인식되는 세계로 나누어진다. 고민하는 청소년은 여러 경험과 공부를 함으로써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앎을 늘려갈 수 있다. 그런데 인식하는 주체인 나는 무엇인가?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세상을 인식하는 것일까? 만약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더라 하더라도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나는 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 라는 것에는 손도 달려 있고 발도 있고 눈이 있어서 볼 수 있고 귀가 있어서 들리는데 입이 있어서 먹게 되고 코로 숨을 쉬고 나라는 것은 결국 이 육체와 뗄 수가 없는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필이면 나였을까? 이 인식 주체인 나라는 것이 내 몸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몸에 귀속되었을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 몸에서 보고 듣는 것과는 다른 것을 보고 듣는 하나의 무엇이었을 텐데. 내가 나일 수 밖에 없는 이유 내 신체 안에 갇혀 있는 핵심 아주 작은 질점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영혼이라고 불러도 될까. 철학적으로 조숙한 청소년은 고등학교 윤리 책을 읽으며 이러한 생각을 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영혼에 대한 탐구를 하였고 그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설명들도 남겨두었다. 불교 이론에서는 무의식의 심층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어서 그것이 유전된다고 한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인 지성nous이 영혼의 핵심이라고 한다. 칸트는 인간 인식의 선험적 틀을 이야기하였다. 동양학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性 자리 또한 비슷한 말이다. 인간 영혼에 대한 여러 문화권의 비슷한 이야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말해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인간 영혼을 수학에서 말하는 함수 개념에 연관지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전개할 말은 인간 영혼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은 아니고 그에 따른 설명 정도가 되겠다.
수학 책은 정의 공리 정리의 순서대로 서술되어 있다. 책은 그 순서대로 적혀 있으나 수학을 알아낸 과정의 순서는 다르다.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정리를 발견하고 정의에 바탕하여 기본이 되는 공리를 추출해 낸다. 누군가 수학을 배우는 학생을 시험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다음 중 함수인 것과 함수가 아닌 것을 구분하시오. ① y = x^2 + 2x + 1 / ② x^2 + y^2 = 1 / ①은 함수이고 ②는 함수가 아니다. 사실 질문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y가 x의 함수인지를 물어야 하고 그보다 더 정확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정의역과 공역이 실수라는 조건을 덧붙여야 한다.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②의 경우 x의 범위는 -1≤x≤1인 실수가 된다. 함수의 엄밀한 정의는 정의역과 공역의 원소들의 대응관계에 대한 것에서 나온다. 정의역의 모든 원소들은 빠지지 않고 공역의 원소들에 대응되어야 한다. 정의역의 원소 중 공역의 원소와 대응되지 않는 원소가 존재해서는 안 되고 정의역의 한 원소가 공역의 두 개 이상의 원소와 대응되어서는 안 된다. 반면 공역의 한 원소가 하나 이상의 정의역의 원소와 대응하는 것은 가능하다. 공역의 모든 원소가 다 정의역의 원소들에 대응되지 못할 수도 있다. 공역의 원소는 정의역의 원소와 대응된 원소들과 그렇지 못한 원소들로 나뉜다. 정의역의 원소와 대응된 공역의 원소들의 집합을 치역이라고 부른다. 치역은 공역의 부분집합이다. 예시한 ①은 아래로 볼록한 포물선의 그래프이고 ②는 반지름의 길이가 1인 원 모양의 그래프이다.
포물선의 그래프의 경우 x축의 한 점과 y축의 한 점이 결정되어 함수의 그래프가 형성된다. x = -1 의 선을 기준으로 하여 저 그래프는 좌우로 대칭이다. 정의역의 원소 하나에 치역의 원소 하나가 대응되지만 치역의 원소 하나에 하나 또는 두 개의 정의역의 원소가 대응된다. 한편 원의 그래프의 경우에는 함수라고 규정할 수 없는데 x값 하나에 하나 이상의 y값이 대응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x = 0 일 때 y = ±1 이다. 사실 고등학교 수학을 공부하면서 함수 개념을 익힌 후 잊고 살지 않는 사람은 이 설명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해가 되겠지만 고등학교 함수 내용을 공부하지 않았거나 잊고 산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를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이해한다. 그 때문에 내가 두 문단에 걸쳐 이야기한 함수의 내용을 문학적으로 풀어 설명을 시도해 보겠다.
시간이 결정되면 그에 따른 공간이 결정된다. 하지만 장소가 정해진다고 하여 그에 해당하는 시각이 특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들은 위의 명제에서 시간을 함수의 정의역에 대응시켜 보고 공간을 함수의 공역에 대응시켜 보면 좋겠다. 사람은 특정 시각에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특정 장소에는 한 사람이 그 장소에 가 본 적이 없을 수도 있고 갔던 적이 있을 수도 있다. 가 본 적이 있다 하여 그 장소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시각이 특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장소에 있었을 수도 있고 여러 차례 시각을 달리하여 그 장소에 드나들었을 수도 있다. 범죄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범죄자를 특정하려는 탐정의 추리는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퍼즐놀이인 것이다. 만약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특정 시각에 여러 장소에 존재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란 사람이 전국 팔도에서 오십 명 잡혀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영혼이 쉰 군데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문학적 상상력일 뿐이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란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라는 정의역에 자신의 발이 가 닿는 이 세상의 장소라는 치역이 대응되는 바로 그 질점들의 집합 즉 함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과연 옛 철학자들의 말대로 인간 영혼은 불멸하는가? 나는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은 모른다. 다만 옛 철학자들의 말대로 인간 영혼이 불멸한다면 그 불멸하는 영혼의 경과는 정의역의 집합이 무한히 열린 실수인 함수의 그래프의 생김새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인간 영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안에 놓여 있으며 인간 육체 안에 갇힌 영혼의 질점은 시시각각 규정되는 시간과 그 시간에 의해 특정되는 공간에 해당하는 세계 속에 위치한다. 만약 인간 영혼이 질적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이벤트라면 우리는 그 죽음의 순간을 좌표평면 위에 그려진 어떤 함수 그래프의 불연속점에 대응시켜 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만약 인간 개개인에게 귀속된 인식 주체의 질점인 개별 영혼을 초월하는 어떤 보편적인 영혼이 존재하고 그 영혼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초월하여 있는 무엇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바로 그 영혼이 스스로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두고 우리는 인간 개체를 초월한 하나의 정신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하여도 크게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면 함수가 뭔지 공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서 가볍게 공부하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작가님, 다방면에 걸친 예시의 글입니다 수학실력이 뒷받침 되시는 분들이 함수도표로 표시하며 읽어야 이해할 듯 합니다 다양한 예시, 적절합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 dc App
멋집니다. 당장 출판하셔도 되겠습니다. 하긴ᆢ이미 작가이겠군요. 아무튼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제 글을 알아봐주시는 분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매우 기쁩니다. - dc App
제가 무협지 마니아인데, "진짜 고수는 항상 겸손하며 드러남이 없다"는 클리셰를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런 영웅이 현실세계에서는 드물고 또 드물죠. 그러니 우리는 나이들어서 무협지 읽기를 멈추지 않고, 그걸 통해서 위안을 받죠.
*나이들어서v도v 무협지를 읽고, 그걸 통해서 위안을 받죠.
김용 무협지를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사조삼부곡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신조협려를 가장 좋아해요. - dc App
ㅋㅋ저도 신조협려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요즘은 문정후 작화의 무협 웹툰을 자주 보고 있습니다. '아수라'라고, 네이버 웹툰이 최근에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ㅡ님의 념글에서ㅡ언뜻 눈에 보이는 몇 가지 불만을 말씀 드려도 될까요? 아직은 곁눈질만 한 상태라서 저의 불만이 순전히ㅡ저의ㅡ오해일 수 있습니다만은.
네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dc App
괜한 소릴했군요. 시간 내어서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실은 지금도 취했거든요.
제 글의 부족한 점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스스로 검토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 dc App
아닙니다. 저는 지금 님을 비판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됩니다.
P.s. 저도 자주 님처럼 생각했던 게, 데카르트 식의 '영혼/육체'라는 코기토cogito(꿈 속의 꿈: 꿈을 꾸는 누군가는 있다=>꿈을 반추하는 이성 존재)적 이원론이 본질이 아니고, 타인의 죽음 앞에서, 즉 조금 전까지도 나와 같이 함께 쉼쉬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잠들던 사람의 시신 앞에서 어찌 그걸 그 사람의 본모습이라고 여길 수 있겠는가 하는,
나와 동질인 것의 시공간적 소멸로 영혼(성)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요. 한 인간은ㅡ존재자는ㅡ그의 경험적 총체라고 하는 말과 인간의 기억과 의식은 다른 말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흔히 말하죠. 기억이 곧 나의 존재(함:근거)이고ㅡ나의ㅡ염려가 타자의 실체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한ㅡ시체로 누워 있는ㅡ그는 적어도 내게서는 죽은 게 아니죠. 지나가 버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염려라는 그(타자)와 나의 관계 안에서 지금 여기 내 시선을 꽉 채우는 흉물(시신)이 어떻게 그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거부하든 말든, 싫든 좋든 간에 이 순간(그가 처음 시체로서 내게 드러난) 만큼은 그는 아직ㅡ내게서ㅡ죽은 게 아니죠. 판사의 판결로서 역사가 마무리되지 않듯 의사의 선언으로서 한 인간의 사망을 확정지을 수 없는
겁니다. 님 말씀대로 유추하건대 칸트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나'라는 '그(타자)'의 기억 주체가 현존하는 한 그는 아직ㅡ내게서ㅡ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지 비로소 그도 죽는 거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타자인 나를 그의 기억 속에 붙잡고 있는 한 나도 나의 타자도 아직 온전한 죽음을 맞이한 건 아닌 거지요.
네 말씀에 동의합니다. 타자의 죽음의 과정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기억이 그의 영혼이라면 자신의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 코기토 명제의 자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코기토 명제의 자아가 타인에게도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이 죽음의 순간 그의 육체와 분리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고! 무얼 쓰려다가 님의 답글을 보고서 바로 댓글을 답니다. 님은 내공이(기초가) 탄탄하군요!
예, 칸트의 선험주의는 죽음 앞에서 가장 명징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은 선험의 미숙한 감각들이 죽음을 통해서ㅡ각자에게ㅡ비로소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 님의 말씀대로 코기토는 본디 나의 몫이 아니었어요. 선천적이고 선험적인 걸수록 최초와 최후의 형식만을 담보하죠.
그래서ㅡ역시나 님 말씀대로ㅡ플라톤의 형상(주의)을 무시할 수 없는 거죠. 우리 각자의 경험은 경험 그대로이겠지만, 이런 인간(의식)의 구조는 끝없는 동일성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 아니, 인간의 이성 자체가 맹수의 본능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본성을 반복하고 있단 것. 'Cogito생각한다'라는 인간의 형식은, 또ㅡ타자의ㅡ죽음이라는 제의의 형식은 야수의 살상
본능 만큼 자명하단 것. 하지만 타자의 죽음을 죽음 그 자체로 내버려두지 않고 나의 가능성으로 적극 껴안는다는 점에서 이 자연(실체)의ㅡ잔인한ㅡ동일성에서는 조금 비켜 있다고 할까. 적어도 비켜 있으려고 몸부림친다 할까?
사람의 마음에 주어진 性 자리가 있고 그것이 인간의 욕심에 가려져 있는데 마음에 때를 닦아 없애면 훤히 밝아진다 합니다. 플라톤의 지성nous도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인데 누구나 그 능력을 타고나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이데아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dc App
님의 념글에도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듯이 다항식에서 x라는 0에 y 하나가 추가되면 무조건하고 플러스 마이너스 1이 성립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수(학)적 사태는 논리적 사태가 아니에요. 논리적 사태는 도리어 귀납에 가까워서 x=0은 무조건하고 y=0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요. 무슨 말이냐면, 항상 자명한 수학학은 항들(관계)의 문제이고
논리학은 수학보다 먼저 정의와 공리를 선언하지만, 그것이 항상 자명할 수는 없죠. 논리학은 정의가 아닙니다.
※논리(학)는 '정리theorem'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수학을 잘 모르고 아는척 했습니다 논리학도 잘 모릅니다 님 말씀이 뭔지 잘 모르겠네요 - dc App
흐, 님도 저를 가지고 노는군요. 그러니까 제 말은 직각삼각형의 세로 선과 가로 선을 잇는(긋는) 사선(사변) 두 개를 합치고(포개어) 펼치면 무조건하고 정사각형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예외가 없죠. 이게 바로 피타고라스 '정리'입니다. 공리나 정의보다 더 완성된 개념이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확실히 모르고서 적은 것을 인정합니다.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dc App
제 생각은 피타고라스 정리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발견하였고 삼각형의 정의가 더 나중에 규정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 dc App
정사각형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직사각형이 만들어지는군요.
삼각형이 무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 dc App
오, 그런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구글 검색 이미지 대로 직각 삼각형을 가운데 놓고 세 개의 정삼각형을 마주하면 a²+b²= c²가 성립하는군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직각삼각형을 가운데 놓고 세 개의 정사각형을 마주하게 하면!
아, 그렇군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있어도 '삼각형의 정리'는 없군요. 하지만 삼각형을 누구나 '정의'할 수는 있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먼저 정해두고 나머지의 것을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정리들을 다 알아낸 후에 최소한의 공리를 추출해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dc App
저는 여지껏 피타고라스를 말하고 있었는 데 난데없는 유클리드라뇨? 뭐, 상관없습니다. 정리theorem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건 세상에 별로 없고 모두 상통하니까. 쪽팔리겠지만, 지금부터 제 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저도 수학을 전혀 모릅니다만, 님은 지금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곧, 유클리드(기하학)는 공리axiom가 아니라 정리theorem
사칙연산이 무엇인지 정확한 규정을 하게 된 건 정수론이 어느정도 발달한 이후 일 아닐까요? - dc App
항등원 역원 등을 먼저 배운 다음 1+1=2 를 배우는게 아니잖습니까 - dc App
입니다. 정리란 공리의 자명한 것(원리)을 증명하였으므로 더는 이것에 대해 어떤 논증(논쟁)도 불가한다는 신탁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지구가 두 동강이 나고 인간종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절멸하는 이후가 아니라면 "직각삼각형에서 빗변 길이의 제곱은 다른 두 변 길이의 제곱과 항상 같다" 또는 세 변의 길이가 각각 a, b, c인 삼각형에서 a²+b²=
= c²이면 c가 직각삼각형이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증명 전에 경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 dc App
그러니까 1+1=2는 정리가 아니죠. 정리할 수도 없죠. 그건 수학이 아니라 수론, 아니 그냥 갯수의 나열이니까요. 무슨 말이냐면 이정석 손바닥 위의 사과 한 개와 고독사 손바닥 위의 사과 한 개가 있는 데, 이정석이 고독사를 죽인 다음 자신의 손바닥(한쪽 손이라고 하자)에 고독사의 사과까지 올려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게 여전히 사과 하나인가 두 개인가
하는 문제예요. 이런 건 공리도 정의도 될 수 없으므로 정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냥 수놀음이에요. 님 말씀대로 다른 항의 개입이 없잖아요. 똑같은 사과 하나일 뿐이에요. 항의 개입으로서 연산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건 원시적 연역이지요. 곧 진짜 연역이 아니란 겁니다. 고독사를 죽인 이정석의 손에 사과를 1+1+1+1ᆢ을 무한정 올려놓는다고 해도 그건
여전히ㅡ이정석의ㅡ사과 하나의 문제일 뿐이에요. 여기에 좆트라는 사과 수집가가 나타나서 이정석 손 위의 사과를 갈취한 다음 이정석a의 사과와 이정석b의 사과를 헤아려 총갯수를 판단하는 순간, 비로소ㅡ겨우ㅡ셈(숫자)은 생명력을 얻고 드디어 진짜 연역의 세계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는 거죠.
예, 바로 그 겁니다. 수학 이전에 사과와 사람이 먼저 있었고, 사과 수집가(약탈꾼)도 먼저 있었죠. 다만 그들은 아직(은) 셈(수학)을 몰랐을 뿐입니다.
하지만ㅡ님 말씀대로ㅡ고대의 사과 수집가 좆트에게서 벌써부터 수학(피타고라스도 본디 땅문제로 싸우던 사람이었다)의 찐한 냄새가 풍겨오지요?
인생이라는 함수의 정의역은 시간이고 공역은 공간이라는 말이 인상깊노
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