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어요"와 비슷한 표현은 한국에 살면서 다들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게 엉터리 문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항상 이 표현이 불편했고 문법적으로 엉터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인터넷 뉴스 기사에서 없어지지 않는 원인을 설명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면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고 여겨서 불쾌해하며 화를 내는 손님이 일부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자기들도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임을 알면서 사용한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듣고 과연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표현이 틀리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틀렸다고 해서 직원에게 직접적으로 따지고 들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속으로 ‘저 사람 틀린 문법 쓰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거나, 혹은 별 생각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아 ‘반말’을 했다고 여기는 소수의 사람은 조용히 넘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따지고 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과 갈등을 없애기 위해 차라리 ‘엉터리 존대법’을 사용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뭐 저런 정말 어처구니없고 비효율적인 것이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을 존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어의 존대말은 결코 ‘서로’ 존대하기 위해 생겨난 어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말의 존대법은 상대에게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고, 사람 사이에 위아래를 정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존대법은 모든 사람을 상하 관계로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즉 순간순간 어떤 어법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내가 상대보다 얼마나 더 높은가, 저 사람은 나보다 얼마나 더 낮은가를 서로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대법은 엄밀히 말해 ‘하대법’ 이기도 하다. 서로 존대하는 경우란 두 사람의 지위가 같은 경우에 한할 뿐이다.
존대법은 또한 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전에 한보 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박경식이라는 의사에게 집권당의 한 국회의원이 반말을 사용했다가 서로 고함지르고 삿대질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일이 있다. 이 때 증인이 ‘반말하지 마세요’ 라고 하자 집권당의 정치몰이배가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데 반말좀 하면 어때’ 하고 받아쳤다. 이것은 말투로 상대방을 위압하고 들어가려는 공격적인 어법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런 경우 상대방의 공격을 가만 놔두면 ‘나는 당신보다 못한 종입니다’ 하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어법을 달리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계급 사회가 남겨놓은 전통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농공상 장유유서 남녀유별 등 직업과 나이와 성별에 따라 여러 가지 계급 구분이 엄격했었다. 사람들은 유교의 예법에 따라 수십 수백가지의 어법을 구사해야만 했다. 그나마 지금 정도로 된 것도 조선 시대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결과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민주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선시대의 말하는 법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어 가운데 뿌리깊게 자리잡아 우리말을 해치는 존대법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남에게 자랑할만한 사회를 결코 이룩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존대법, 하대법이 남아있음으로 해서 세대간, 남녀간, 계층간, 선후배간 위화감이 나날이 깊어질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백해무익한 갈등이 양산되고 있다. 카스트 제도가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존대법도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대단히 견고한 장애물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여러 가지 존대법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말을 건네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적절한 화법과 그에 따른 상하관계를 설정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듣는 사람이 각각의 어투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데 있다. 말하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즉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나를 어떤 지위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말투로부터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나는 외국에서 있으면서 현지인과 그 나라의 문화, 그리고 또다른 외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데, 거기에서도 다른 나라와 다른 한국의 유니크한 점을 많이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존대법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일부는 “외국에도 존댓말은 있잖아? 뭐 다를게 있어?”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한국의 존댓말은 외국의 존댓말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일단 유럽어에서 존대란 ‘나와 친하지 않음’, 혹은 ‘공식적인 관계’임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따라서 존대는 기본적으로 상호존대이며, 일방존대가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한쪽만 친하고 한쪽은 안친한 경우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서양에서는 존댓말과 반말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한국과 같이 일방존대가 있는 일본어의 경우에도 한국보다는 훨씬 상황이 낫다. 내가 일본인에게 부모와 조부모에게 반말을 쓰냐고 질문했더니, 일본인은 황당해하며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부모에게 반말을 쓰는 것도 버릇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고, 조부모에게는 반말을 쓰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즉, 한국에서는 존대와 반말이 위의 글과 같이 상대방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서열로 쓰이는 경우가 다른 언어에 비해서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왜 우리 문화를 바꿔야하냐? 외국이 하면 다 그렇게 해야되는거냐?” 라고 반문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오래된 문화라고 해도 폐해가 크면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구글에 “반말 살인”이라고 검색하면 반말을 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살해했다는 사건의 기사가 수십개 이상 뜬다. 이런 황당한 사건은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이해조차 어려울 것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한국 연예계에서 이태임과 예원이라는 두 연예인이 반말 존댓말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도 한국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도 그 둘이 싸우는 것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 존댓말과 반말이란 친소를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반말을 사용했다고 살인이라니, 이것은 한국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살인만 해도 쉽게 기사를 찾을 정도인데, 그 갈등으로 인한 폭행 사건이나 다툼은 신문 기사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그 문제는 심한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당장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반말과 존댓말 문제로 인해서 한국에서 누군가와 갈등이 한 번도 없었는가? 나는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상대에게 말을 하기 어려운 환경 하에서는, 자연스럽게 불편한 타인과의 대화를 꺼리게 되고, 결국에는 다른 세대, 다른 집단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게 한다. 존대 인플레이션이 지나치다 못해 사물까지 존대하는 우스꽝스러운 문법이 난무하는 한국에서 지나친 존대법의 폐해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