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사변적이면서 분석 가능한 존재 모순적 요소 혹은 사태이다. 이 ’진리‘는 보편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특수성을 배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수렴한 곳 끝에서 찾을 수 있는 선험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 ‘진리‘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사변적이기에, 이를 형용하는 기표로서 존재하지만, 그 속 기의는 알 수 없다. 이는 즉, 자크 라캉의 ‘미끄러진다‘라는 표현으로는 이를 설명하기에 그 속을, 즉 진정한 의미가 존재하는지 조차 분석할 수 없으니 사변적 존재에 대한 잘못된 형용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을 부정하는 것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을 안고 나아가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의 한계를 논하는 것 처럼 들릴 수 있으나, 그의 도덕관념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을 배제한 시각이다. 이 말의 요지는 즉, 말하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변적 존재는 사변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글은, 이분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가치를 부여하고 맹목적으로 존재의 여부를 알려고 한다. 이는 이분법적 분리 본능이라고 설명가능하다. 왜냐면 이 글 자체가 이미 이분법적으로 진리를 해체하고자 하는 나의 인간으로서의 맥목성을 논하기 위해서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진리’에 가치성을 논했었고, 사변적 존재를 사변적이다 아니다를 논하였다. 이는 ‘보편진리 탐구’가 아닌 ‘가치 논증 본능 논고’라고 칭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 본능은 ’현대적 의지의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을 막기 위한 무의식적 행위의 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나는 인간이 삶을 지속하기 위한 어떠한 행위든 간에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을 저지하기 위한 이분법적 분리 본능의 발현이 인간의 내재된 행동 기저라고 간주한다. 이는 곧, 변증법적 행복과 맞닿아있다.


 이러한 인간의 이분법적 분리 본능의 발현은 현대적 의지의 자의성을 위협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맹목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인간의 무의식은 분석하지 말아야한다고 언급하였다. 나는 이러한 행동의 기저가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 또한 지금 무의식적으로 무의식을 분석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에 나 자신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웃기게도 이러한 분석 또한 이분법적 분리 본능의 발현이다. 하지만, 본능을 인지하고 위의 이분법적 분리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맹목적이지 않은 현대적 의지의 자의성을 인지한 행동은 맹목적인가를 보았을 때, 현대적 의지의 자의성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나는 지금 맹목적이지 않다. 이는 인간의 자의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자, 나의 이성의 비판을 통해 얻은 ‘정수’이다. 

 본능과 자의성은 과정이라는 선험성이 전재되었던 명제를 뒤집고 선험, 과정, 후험이라는 새로운 틀을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전회를 시도하게 만든다. 다시 말 하자면, 이 본능의 맹목성을 자의식 하에 두고 맹목성에서 벗어나게 하면, 선험과 후험이 아닌 과정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틀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과정 또한 선험적이냐 후험적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과정 자체로 보아야만이 이 맹목성을 자의식 하에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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