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돈, 권력, 명예, 사랑, 신념… 겉모습은 달라도 뿌리를 추적하면 하나의 흐름에 닿는다. 나는 그 흐름을 **리비도(libido)**라고 부르겠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성적 에너지였고, 융에게 그것은 성을 넘어선 생명 에너지—창조와 파괴를 동시에 밀어 올리는 원동력이었다. 리비도는 선악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예술·과학·사랑·공동체로 향하면 창조가 되고, 폭력·집착·전쟁으로 향하면 파괴가 된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태아는 양수 속에서 안정과 충족을 경험한다. 그러나 출산은 그 완전함의 붕괴다. 빛과 소음, 압박, 결핍—최초의 상실이 발생한다. 그래서 리비도는 단순히 “원하는 힘”이 아니라, 잃어버린 완전함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된다. 우리는 평생 그 상실을 메우기 위해 사랑하고, 소유하고, 창조하고, 신을 찾는다.
리비도는 두 축으로 흔들린다. 안정 욕구(보호·규율·친밀·습관)와 탐험 욕구(도전·발명·연애의 설렘·미지). 한쪽으로 기울면 정체 혹은 파멸이 온다. 성숙은 균형의 기술이다.
문명은 욕망이 범람하면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고, 법·도덕·종교라는 장치로 흐름을 통제했다. 그러나 억압은 욕망을 죽이지 못한다. 지하로 스며들어 변형되거나, 때를 기다렸다 폭발한다. 동시에 제한은 때로 창의성을 자극한다. 이 변환을 프로이트는 승화라 불렀다. 승화는 욕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능한 형식으로 형태를 바꿔 살려내는 연금술이다. 다만 승화는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전체주의적 열광처럼 파괴적 이념으로도 변형된다.
리비도의 그림자도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타나토스—분리와 소멸, 파괴를 향한 충동이다. 에로스(결합·창조)가 강렬할수록 타나토스의 그늘도 짙어진다. 전쟁, 집단 광기, 마녀사냥, 현대의 온라인 마녀사냥까지—욕망과 두려움은 종종 타자에게 투사되어 폭발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리비도를 억누르지 않고 상품화한다. 결핍→소비→일시적 만족→새 결핍의 무한 고리. 디지털 시대에는 알고리즘, SNS의 “좋아요”, 가상세계와 AI 관계가 욕망의 무대를 확장한다. 리비도는 더 빠르고 더 맞춤형으로 증폭되지만, 중독·고립·현실 감각의 약화라는 위험도 함께 커진다.
나는 리비도를 미화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은 욕망으로 움직이고, 욕망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리비도의 여정은 완전한 귀환이 아니라, 그 귀환을 향해 나아가려는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얻는다.
그 과정이 곧 삶을 “이동”시키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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