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숙함이라는 마취


이스탄불에서 아야 소피아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깊은 감탄을 느꼈다. 그 압도적인 돔, 천년을 견뎌온 벽면의 흔적, 종교와 제국이 교차한 공간의 무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감탄했던 이유는 단지 그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학적으로만 본다면, 우리 동네 다리에 걸린 흔한 현수교 하나가 훨씬 더 정밀하고 뛰어난 구조물일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고 흔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무심히 지나친다.


만약 2천 년 전의 고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서울 거리를 걷게 된다면, 그는 아야 소피아보다도 더 크게 감탄할 대상들을 매일 마주할 것이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고물차, 신호등, 엘리베이터, 내가 쓰는 낡은 중국산 샤오미 스마트폰.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겐 마법처럼 느껴질 테니까. 누군가의 손 안에서 영상통화가 이뤄지고, 철 덩어리가 불 없이 달리고, 버튼 하나로 방이 밝아지는 세계. 고대인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신전보다 경이로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감탄하지 않는다. 매일 보기 때문이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무언가에 감탄하는 것은 정말로 그 대상이 뛰어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가? 만약 후자라면, 감탄이라는 감정은 대상의 가치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단순히 익숙함의 부재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일상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체계가 익숙한 것의 가치를 자동으로 삭제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자"라는 자기계발서의 교훈과는 다른 이야기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이 메커니즘은 특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한국인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는 능력이 극도로 약하다. 대신 아직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은 극도로 강하다. 이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소비 사회의 구조다. 광고는 끊임없이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SNS는 끊임없이 남이 가진 것을 보여준다. 이 시스템 안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는 감각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장려하지 않는다.


여행 산업도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에 가서 감탄하는 이유는 그곳이 객관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은 제주 바다에 감탄하지 않는다. 서울 사람이 감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 사람은 매일 지나치는 한강의 야경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이다. 결국 여행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아름다운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는 것"이다. 여행 산업은 이 단순한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한 채, 마치 어떤 장소에 고유한 아름다움이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포장하여 판매한다.


아야 소피아에서 느낀 감탄으로 다시 돌아가자. 나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히 감탄은 실재했다. 하지만 그 감탄의 절반 이상은 아야 소피아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처음 봤다는 사실에서 왔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아야 소피아 옆을 지나가며 출근하는 이스탄불 시민은 아마 그 건물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이를 느끼는 능력은 훈련의 문제인가, 아니면 익숙함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