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은 내부의 환상이 아니라 외부를 겨누는 판단이다


어떤 견해는 선과 악의 객관적 구분을 시도하는 순간 곧바로 난관에 빠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상정한 시선으로만 판단할 수 있고, 그 시선을 다시 검토하는 메타적 시선 역시 결국 또 다른 자기 내부의 산물일 뿐이므로, 선악의 객관성은 끝내 확보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글에서는 이를 일종의 “메타무한상승의 문제”로 제시하면서, A라는 행위를 B라는 메타적 시선이 판단하고, 그 B의 객관성을 다시 C가 점검하더라도 마지막 기준의 선택은 결국 주관으로 귀착된다고 본다. 또한 나치나 일본 제국의 사례를 들어, 당시 그 사회 내부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충분히 “객관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논변은 겉보기보다 훨씬 약하다. 핵심 오류는 단순하다. 인간이 어떤 기준에 접근하는 방식이 주관적이라는 사실과 그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세계의 모든 것을 자기 인식 구조를 통해서만 파악한다. 수학도, 논리도, 자연법칙도, 타인의 감정도 전부 인간 의식을 거쳐 인식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학적 진리나 논리 법칙이 개인의 기분이나 사회적 합의의 부산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내가 내 머리로 2+2=4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명제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덕 판단도 인간의 정신을 통해 수행된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상대적 허구가 되지는 않는다. 인식의 매개가 주관적이라는 사실은, 판단의 대상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증거가 되지 못함.


이 글의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음. 글은 “객관적 시점”이 결국 내 안에 구성된 시점이므로 완전히 중립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지나치게 비약적임. 인간이 완전히 순수한 관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과, 객관적 기준 자체가 없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완전무결한 중립은 불가능할 수 있음.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하게 접근한다는 이유로, 그가 접근하려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음. 오히려 반대다. 인간이 자주 왜곡되고 흔들리기 때문에, 바로 그 인간 바깥의 기준을 상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기는 것임. 객관성은 “아무 편향도 없는 시선”이라기보다, 편향을 교정하며 더 타당한 판단으로 수렴하려는 가능성의 이름에 가까움.


두 번째 문제는, 글이 객관성과 사회적 승인을 사실상 뒤섞고 있다는 점이다. 글은 북한 주민에게는 김정은 비판이, 트럼프 지지자에게는 트럼프 비판이 그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옳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으며, 나치와 일본 제국도 그 사회 내부에서는 충분히 옳다고 판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성의 설명이 아니라 동조 압력과 사회화의 설명임. 많은 사람이 믿는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객관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한 시대의 통념은 매우 강력할 수 있으나, 강력함과 타당함은 동일하지 않다. 만약 사회적 다수의 승인 자체가 곧 객관성이라면, 인류 역사에서 노예제 폐지론자, 종교 박해 반대자, 여성 참정권 옹호자, 독재 저항자들은 모두 당대에는 “객관적으로 틀린 사람”이 되어버림.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도덕적 진보의 주체로 기억한다. 이는 이미 우리의 도덕 언어가 단순한 시대 분위기 이상의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줌. 도덕은 평균의 통계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임.


세 번째 문제는, 이 글이 무한상승의 논리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만 다룬다는 점이다. “B를 검토하기 위해 C를 세우고, C를 다시 검토하기 위해 D를 세우면 끝이 없다. 따라서 객관적 기준은 확보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추론은 철학적으로 오래된 회의주의의 형태이지만, 그것이 곧 승리한 적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정당화가 반드시 끝없는 상위 정당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임. 어떤 체계는 기본 원리, 자명성, 상호일관성, 경험적 반성, 실천적 불가피성 위에서 멈출 수 있음. 논리학도 모든 규칙을 또 다른 규칙으로 영원히 정당화하지 않는다. 어떤 지점에서는 “이것이 사고 자체의 조건이다”라는 형태의 기초가 필요함. 도덕 역시 마찬가지다. 예컨대 무고한 타인을 불필요하게 고통 속에 밀어 넣는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그 위에 끝없이 메타 기준을 덧대야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직관, 상호성의 원리, 피해와 존엄에 대한 이해, 행위 일반화 가능성 같은 기본적 도덕 원리들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음. 무한상승은 모든 객관성의 반증이 아니라, 어떤 회의주의가 스스로 만들어낸 장치일 뿐임.


네 번째 문제는, 글이 사람들이 왜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는가와 그 판단이 왜 정당한가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치가 왜 나치를 지지했는지 설명하는 것은 가능함. 일본 제국 시절 일본인들이 왜 제국주의를 옹호했는지도 설명 가능함. 교육, 선전, 집단 동조, 공포, 국가주의, 이익 구조 같은 요소를 제시하면 됨.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인의 설명이지 정당화가 아님. 어떤 믿음의 발생 경로를 밝혔다고 해서 그 믿음의 진리값이 결정되는 것은 아님. 상대주의는 자꾸 이 둘을 섞는다. “그들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느꼈고, 그들 주변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는 문장을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는 객관적으로 옳았다”는 문장으로 미끄러뜨린다. 그러나 이 도약은 허용되지 않음. 어떤 사회가 학살을 옹호했다고 해서 학살이 그 사회 안에서는 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사회가 악을 선으로 오인했다는 말이 성립할 뿐임.


다섯 번째 문제는, 상대주의가 결국 도덕 비판의 언어를 스스로 해체한다는 점이다. 선악이 사회마다 달라지는 해석 체계에 불과하다면, 어떤 잔혹 행위도 결국 “그 문화권의 가치 체계”라는 말로 희석될 수 있음. 그러면 학살은 잘못이라기보다 차이의 문제로, 고문은 악이라기보다 관점의 문제로, 배신은 비난받을 일이라기보다 맥락의 문제로 변질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타인을 수단화하고, 그의 자율성과 존엄을 파괴하며, 정당화될 수 없는 피해를 발생시킨다. 아동 학대, 고문, 무고한 자의 살해, 의도적 기만과 착취는 사회가 어떻게 포장하든 악임. 물론 경계 사례와 난해한 사례는 존재함. 하지만 애매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경우까지 지워버리는 근거가 되지 못함. 회색지대가 있다고 흑백 자체가 환상인 것은 아님.


여섯 번째 문제는, 상대주의가 결국 가장 중요한 인간 경험 하나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바로 도덕적 후회와 자기고발의 경험임. 인간은 종종 “그때는 다들 그랬다”는 말로 스스로를 변호하려 하지만, 정말 깊이 반성하는 순간에는 그런 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양심은 대중의 승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하기 때문임. 사람은 종종 자기 사회가 허용한 일을 나중에 스스로 악이라고 고발한다. 이것은 사회적 규범이 도덕 판단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임. 만약 선악이 전적으로 공동체 내부의 승인에 달려 있다면, 공동체를 거슬러 자신과 시대를 함께 심판하는 양심의 구조를 설명하기 어려움. 결국 상대주의는 가장 숭고한 도덕 경험인 참회, 저항, 양심선언, 내부고발, 자기희생적 정의의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함.


일곱 번째 문제는, 이 글이 도덕의 객관성을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의 소유”로 과도하게 엄격하게 설정해 놓고, 그런 관점이 불가능하니 객관성 확보도 실패한다고 보는 데 있음. 그러나 객관성이란 애초에 신의 눈을 뜻하지 않음. 그것은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이유를 요구하는 태도, 자기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정당화 가능성, 타인의 관점에서도 비판에 견딜 수 있는 원칙을 뜻함. 다시 말해 객관성은 관점의 부재가 아니라 사적 편의와 집단 편견을 넘어서는 규범적 보편성의 이름임. 내가 싫어하니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같은 조건에서 같은 행위를 당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경우 악이라는 것임. 이 정도의 객관성만으로도 도덕은 충분히 성립한다. 오히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는 힘센 자의 취향을 진리처럼 강요하는 공간으로 전락함.


상대주의를 끝까지 밀고 가면 생기는 실천적 귀결도 치명적임. 첫째, 도덕적 진보라는 말이 무의미해짐. 나치 이후 세계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게 됨. 그냥 시대 분위기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해야 함. 둘째, 악에 대한 규탄이 약화됨. “그들도 그들 나름의 객관성이 있었다”는 문장은 결과적으로 악에 대한 도덕적 날을 무디게 만듦. 셋째, 피해자의 호소가 철학적으로 무장해제됨. 피해자는 단순히 다른 가치 체계에 의해 손상되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음. 넷째, 저항과 양심의 용기가 설명 불가능해짐. 모두가 찬성할 때 홀로 반대한 사람이 왜 옳았는지 설명하려면, 결국 사회적 승인 바깥의 기준을 끌어와야 함. 상대주의는 결정적 순간마다 자기 바깥의 객관성을 몰래 사용하면서, 말로만 그것을 부정하는 셈이 됨.


결국 선과 악의 객관성은 “인간이 완전히 순수한 시점을 가질 수 있는가”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님.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시대와 욕망과 집단을 넘어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남. 나치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일본 제국주의가 악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오늘날의 강자와 다수를 향해 “그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선악은 단지 해석 공동체 내부의 산물이어서는 안 됨. 선악이 오직 상대적이라면, 악은 설명될 수는 있어도 심판될 수는 없게 됨.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설명을 넘어 심판을 요구하는 존재임. 철학이 그 요구를 포기하는 순간,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잔혹함을 세련되게 번역해 주는 변명술로 타락함.


선과 악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붙인 라벨이 아님. 인간은 그것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하기도 함. 그러나 그 오남용 가능성은 선악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밀한 도덕 판단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임. 사회가 악을 선이라 부른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지는 않음. 다수가 박수친다고 해서 잔혹함이 정의가 되지는 않음. 인간의 주관은 선악을 가릴 때 늘 개입함. 하지만 그 사실은 선악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관이 자주 진실을 흐린다는 뜻일 뿐임. 그래서 필요한 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자기기만을 벗겨내는 더 강한 도덕적 객관성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