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경우 모든 증명은 결국 동어반복입니다. 'A=A이다' 처럼 말이죠.
또 A=B 이고 B=C 일때 A=C가 되며 결국 A=A(B)=A(C)가 되죠.
수학에서의 공리로 유도되는 모든 증명들을 발견이라고 하는 이유는 결국 공리의 동어반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패러다임이란 것도 사실 어떤 공리체계에서의 동어반복적인 사고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예를 들자면 뉴턴의 3법칙이 공리(패러다임)가 되었을 경우 뉴턴역학이란 그 법칙의 동어반복적인 결론들이란 것이죠.
따라서 뉴턴역학이 물리학계의 패러다임이었을 시기의 물리학자들은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절대시간이란 패러다임을 상대론을 통해서 상대시간으로 바꾸었죠.
그럼 결국 무엇이 바뀐걸까요? 물론 상대론의 경우 뉴턴의 3법칙이라는 공리를 바꾸었다기 보다는 빛이 절대속도라는 현상을
공리에 추가한 것뿐입니다만 결국 공리를 추가하거나 바꿈으로써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시말해서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의 근본적 의미는 공리가 바뀌거나 추가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이 공리가 설정된다는 것은 한계 즉, 틀을 만들며 그 공리안에서의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그리고 뉴턴의 패러다임과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을 각각 구분해서 두개의 패러다임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이 뉴턴역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 있으므로 더 큰 패러다임(생각의 틀)이라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그 틀이 커진다고 해도 패러다임이란 앞서 설명했듯이 그 한계성이 분명하죠.
따라서 그 생각의 틀인 패러다임이 더 많은 것을 포함할 수록, 즉 그 크기가 가장 클 경우가 가장 좋은 패러다임일겁니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크기가 무한대일 경우가 가장 좋은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 패러다임의 크기가 무한대일 경우는
사실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할 수 없게 되죠. 패러다임의 크기가 무한대라는 것은 그 틀이 없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패러다임이 없을 때가 가장 큰 생각의 틀을 갖게 된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가능한가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생각의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패러다임을 해체하는 가능성(기능성)을 가진 학문이 바로 철학입니다.
즉, 사랑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질이란 무엇인지, 존재란 무엇인지 등등의 질문들은 철학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죠.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동시에 절대적이게 되면 모든 패러다임은 결국 해체가 된다는 겁니다.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자연철학의 경우 패러다임을 만드는 철학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집합으로써의 철학은 그 페러다임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철학이 가장 큰 학문의 범주인 이유입니다. 철학이란 패러다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집합에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패러다임이 있는 학문이 있고 트렌드가 있는 학문이 있고 패러다임이 없는
자유분방한 학문이 있는 것이죠.
시간의 절대성에 관한 쉬운 설명
변화가 불연속일 경우 질량이 상대적이고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대란 시간이 절대적이게 되는
우주의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물론 제 설명에서의 시간의 절대성은 뉴턴의 시간의 절대성과는 다릅니다.
뉴턴의 경우 누군가의 시간이 1초가 흘렀다면 우주의 모든 것들의 시간도 1초가 흐른 것이 되지만 제 설명은 아에 시간이
불변이란 것이죠. 즉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고 고정 되어 있다는 것이죠. 관련해서 다른 글에서 설명했던 것을 잠시 그대로 옴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미 읽으셨던 분들은 스킵하시면 됩니다.
(현상적으로 분명하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의 시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변화합니다. 저는 시간이 불변이라고 했지만 시계의 시간은 분명
흘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잠시 시간이 흘렀다는 표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사실 시간이 흘렀다는 표현보다는 시계에 표시된
시간이 달라졌다고 하는게 정확하겠죠? 즉, 저는 시간이 불변이라고 한 것이지 시계의 시간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란 겁니다.
보통 시계의 시간이 변화하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선후관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①밥을 먹고) 나서 (②양치질을 하는) 과정들이 있었다고 해보죠. 그럼 선후관계가 분명한 경우에는 ②의 행위는 ①의 행위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설명한 시간대의 경우 ①이 벌어지고 있는 동시에 ②의 행위도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①에서부터 ②까지의 모든 과정들의 사건(사태:사건의 형태)들도 동시라는 겁니다. 즉, 모든 시간대의 사태들은 선후관계가 없고 동시란
겁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불변이라는 것이죠.)
결국 시간이 불변(절대적)이기 위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현상이 가능한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위의 설명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시로는 바로 영화가 들어가 있는 한장의 CD가 있겠습니다.
프레임 단위로 분할된 디지털 영상을 우리는 눈은 연속이라 느끼고 시청합니다. 그런데 1초에 60프레임으로 출력되는 모니터의 영상을
1초에 120프레임의 영화카메라로 찍으면 1초에 60프레임짜리의 영상의 불연속 변화를 시각적으로도 알수있게 됩니다.
그리고 1초에 60프레임짜리 카메라 두개로 두개의 영화를 찍은 후 두 영화를 합쳐서 1초에 120프레임 영화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프레임이 더 분할되면 분할될수록 영화 2편 이상을 하나의 CD에 집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도 처음에 독립되어 찍은
각각의 영화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요. 이러한 설명은 사실 우리가 5차원적 존재가 되서 4차원적 우주의 변화들을 바라본 것과
유사한 행위입니다. 결국 다중우주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않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죠.
물론 당신이 본 그 4차원 우주(영화들의 교차적 집합)는 매우 복잡해보일지도 몰라요. 그런 짬뽕이 된 영화는 보고 싶지도 않을거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겠죠. 하지만 각각의 영화들은 따로따로 찍고나서 합쳐진 것이라 원본은 하나의 스토리대로 이어지죠.
자 이젠 영화를 cd 한장으로 구운다고 해보죠. 그럼 그 cd는 구워지기 전에 이미 정보를 저장할 저장공간을 가지고 있어요.
즉, 그 구워지기 전의 cd의 저장공간이란 비결정론적인 공간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또 그 CD의 저장 공간의 시간은 모두 같아요.
영화를 굽고 CD를 재생하게 되면 영화의 시간대 별로 영화가 순차적으로 재생되지만 말이죠.
지금까지의 제 설명이 제가 갈루아의 군론으로 설명했던 시간대란 개념입니다. 각각의 시간대가 보유한 에너지가 만들수있는
확률을 모두 만들수있다는 거죠. 만약 한 시간대가 (10-10)의 에너지가 있다면 (5+5-5-5), (2+2+2+2+2-2-2-2-2-2), (3+1+1-1-1-3)...
사실상 각각의 시간대는 모두 무한개의 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CD가 구워지기 전의 상태처럼 말이죠.
결국 시간은 절대적이게 되고 말이죠. 양자역학은 이처럼 디지털의 예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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