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미묘한 차이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만약 오늘날의 공식적인 기독교 교회들을 살펴본다면, 교회가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는 것, 즉 신앙(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유물론과 합리성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세요. 하지만 예수는 신앙 및 믿음이라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르게 말하는 것, 즉 예수가 어느 한 남성에게 예수가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지 물어보았다거나, 혹은 사람들을 온전하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신앙(믿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추락한 존재들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왜곡입니다.
예수는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으로 자신을 따르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직관적인 확인에 기초하여, 스스로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너는 내가 너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느냐?”라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너는 내가 너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믿기만 했다면, 그들은 치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직관력을 이용하여, 알았다면(예수가 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 기초해서), 그들은 실제로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희망적인 생각입니다. 믿음은 우주가 어떻게 작용하기를 바라며, 그런 다음 여러분이 지닌 이미지에 따라, 우주가 작동하도록 예수 혹은 하나님이 해줄 거라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결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우리는 이러한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이원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 이원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의식을 주셨습니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이원론적인 자아들을 죽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나, 예수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외적인 고난을 충분히 겪고 난 후, 내적인 안내를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고난의 학교에 계속해서 있어야만 합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여러분이 믿게 되기를 바라며, 그들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것도 믿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승 마스터들은 여러분이 직관적인 재능들을 이용하여,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차이를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가 어느 정도의 직관적인 통찰력(나중에는 이것이 제자들 간의 갈등으로 이어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살펴보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혹은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내면적으로 확인하는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영성인들 중에서도 자신들의 스승, 혹은 스승의 가르침이 유일한 참된 것이라거나, 지구에서 황금시대로 들어가는 열쇠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각자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직관적인 체험이 타당한 것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표면적으로 주장하는 것들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가 다 옳을 수는 없으며, 이 때문에 직관의 가치를 부정하는데, 회의론자들과 유물론자들이 무임승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수수께끼와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열쇠는 각각의 개인이 지구에서 가능한 의식의 144단계에서 특정한 시기에(at any given time), 특정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특정한 단계에서, 여러분은 직관적인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 이것이 열쇠입니다 - 이러한 체험은 단지 여러분의 현재의 의식 위에 존재하는 다음 단계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어떤 궁극적인 진실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직관적인 재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여러분은 내가 “베드로의 난제(Peter Conundrum: 수수께끼)”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매우 영리하며, 이들은 모든 사람이 직관적인 통찰력을 갖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이들은 여러분의 첫 번째의 직관적인 체험이 여러분의 마지막의 체험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여러분이 지닌 직관적인 통찰력이 현재의 믿음체계 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교묘한 사고방식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라면, 직관적인 체험은 기독교의 체계 내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러한 체험이 외견상 여러분이 믿고 있는 체계가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주게 될 것입니다. 무신론자들 중에도 순수한 직관적인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은 이러한 통찰력이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는 증거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거짓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물질우주를 뛰어넘는 영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메커니즘은 간단합니다. 현재 하고 있는 직관적인 체험은 현재의 의식단계 바로 위에 존재하는 어느 한 단계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체험이 아주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더 높은 단계의 의식과 교감함으로써, 이러한 현실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며, 마음의 4개 층들이 체험에 어떤 종류의 해석을 투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관적인 체험을 하는 것의 도전은 베드로가 예수에게 했던 것 - 즉 현실에 대한 느낌(현실감)을 받아들여, 이것을 외적인 믿음으로 바꾸어놓는 것, 여러분이 이것을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재 의식 수준을 굳힙니다 - 을 피하는 것입니다.
직관적인 체험을 함으로써, 참조 틀을 갖게 되며, 이러한 틀을 통해 현재의 의식상태가 가능한 가장 높은 의식이 아니며, 더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아를 반드시 죽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감에 대한 체험을 잘못 사용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게 됨으로써, 현재의 자아감 속에 더욱 더 단단하게 갇히게 됩니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것이 바로 베드로에게 정확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핵심은 직관적인 체험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결코 절대적인 진실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관적인 체험은 단지 여러분에게 생명줄을 제공해줄 뿐이며, 이러한 생명줄을 이용하여, 여러분은 스스로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하며, 그러면 이전보다 더 높은 통찰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줄이 자신의 목을 매는 로프가 되게 하지는 마세요.
12사도 980 그리 스도 신비 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