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마지막으로, 루시퍼는 신(神)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은 엉터리(sham: 가짜)라고 주장했습니다. 신(神)은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자유의지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행위에 따른 결과와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 주는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루시퍼가 정말로 자유로운 의지를 얻었다는 것은 단지 신과 그가 옹호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에 의해서였다. 마스터들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뭔가를 설명해 주었으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주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또다시, 마스터들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선택은 실제로는 선택(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자유의지의 본질은 물질 우주(실제로는 4개의 모든 옥타브들)가 오늘날 우리가 가상현실 환경(virtual reality environment) 혹은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이라고 부르는 장치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반응하는 환경 속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위 4개 몸체들을 통해, 우리가 투사하는 것들은 물질적인 환경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전반적인 목적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그러한 선택을 개선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點)과 같은 자아감을 지니고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아감에 기초하여, 자극(impulses)을 만들어내게 되며, 이러한 자극을 밖으로 투사하게 됩니다. 피드백이라는 장치를 통해 되돌아오는 반응을 체험하게 됨에 따라,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이용하여, 자아감을 확장해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이제는 보다 더 폭넓은 자극을 만들어내게 되며, 그 결과를 지켜봄으로써, 자아감을 또다시 확장하게 됩니다.
이원성에 빠지게 될 때, 이러한 과정을 부정하게 됨으로써, 자아감을 확장시키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접하게 되는 물질적인 환경이 우리가 밖으로 투사한 것들의 결과가 아니라, 멀리 있는 어떤 신(神)이나, 비-인격적인 자연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는 환상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아감의 초월이라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부정하게 되며, 그 대신에 우리의 자아감을 제한하게 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시점 이후부터, 우리는 상승한 마스터들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자극들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의식의 밀도가 높아지면, 물질적인 환경도 더욱더 삭막해지게 되며, 이로 인해 우리의 힘은 제한되고, 고통이 생겨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이로 인해, 선택의 폭도 더욱더 좁아지게 되며, 선택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박탈당하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추락한 존재들에 의해 더욱더 가속화될 수가 있으며, 이렇게 되는 전반적인 목적은 부정(denial)과 이원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적인 환경이 우리의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거라는 사실을 또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되며, 그런 다음 우리는 의식 상태를 바꾸어, 우리를 제약하고 있는 요소들을 초월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원성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결과가 물질 세계에 꼭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종교, 혹은 정치적인 시스템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구에서 유력한 것으로 확고하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이원성 속에 우리를 계속 가두어놓기 위해, 이러한 모든 서사시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완벽해지기 위해, 이원성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원성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목적은 우리가 아픔과 제약 그리고 고통을 충분히 체험하게 되는 상태로 우리를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라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이러한 고통이 야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을 의식적으로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또다시 자아감을 확장해가는 상승의 길에 합류할 수가 있습니다.
또다시 루시퍼는 우리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때에만, 다시 말해 과거의 선택으로 인해, 미래의 선택이 제한되지 않을 때에만, 진정으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스터들은 물질 우주는 피드백 해주는 기계장치로서, 우리가 투사한 것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원리를 재차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자극을 투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정체성, 정신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몸 속에 어떠한 매트릭스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루시퍼는 상대편(adversary: 악마)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매트릭스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에 잘못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매트릭스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러한 매트릭스로부터 또다시 쉽게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루시퍼가 상대편의 매트릭스를 지니게 됨에 따라, 그는 여기에 해당되는 자극들을 투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에 따른 결과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루시퍼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카르마의 일부를 종종 타인들이 짊어지도록 했지만(예를 들어,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국가가 지지하도록 속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퍼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에 누군가가(대표적인 사례로서, 사탄, 심지어 예수 그리고 어떤 육화에서는 나 자신) 반대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지구라는 극장에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역할이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행성이 정상적이지 않은 행성이며, 또한 사람들이 이원성을 충분히 체험할 때까지, 이원성 의식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루시퍼가 했던 많은 것들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직면하게 되는 결과가 여러분이 투사한 것들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될 때(따라서 되돌아오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극을 투사하는 데 사용된 의식을 초월함으로써, 투사하는 것을 바꾸는 것임), 여러분이 단지 어떠한 연기(역할)를 하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더 이상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 대신에, 자기 자신을 그러한 연기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러한 연기가 본연의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다른 자극을 투사하기 위하여 이 역할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극들이 되돌아올 때, 여러분은 또다시 자신이 이러한 자극을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것의 결과는 루시퍼가 신(神)으로 보았던 것에 저항하는 것에 의해서, 루시퍼가 완전히 자유의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루시퍼는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루시퍼는 진짜 하나님(real God)에게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창조해놓은 이원론적인 신(god,神)에게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루시퍼는 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정체성, 정신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매트릭스에게 반발(반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루시퍼는 자신이 신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단지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신(神)은 어둠의 마스터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신(神)에 대한 이러한 매트릭스는 루시퍼가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루시퍼는 자신이 싸우고 있던 것이 진짜 신이 아니라, 실제로는 어둠의 마스터, 즉 정말로 루시퍼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주장했던 어둠의 마스터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스터들은 메커니즘은 간단하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의식 상태, 즉 자아감 속으로 들어가, 그러한 자아감을 이용하여 어떠한 자극(욕망)을 투사하게 됩니다. 우주의 거울로부터 되돌아오는 에너지(과보, 카르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매트릭스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되돌아오는 에너지를 부정하게 된다면, 실제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이것은 돌아오는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왜냐하면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는 환경에 반응하는 것에 우리 자신을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제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과 동일시하게 됩니다(연극이 끝났을 때, 의상과 분장을 지우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정말로 햄릿이라고 여기는 배우처럼). 물론,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매트릭스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내보내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한 자극이 돌아올 때, 우리는 저 바깥에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는 어떤 외계(objective world)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주가 확인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의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부정을 쌓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부정을 고수하는 한, 우리는 철학자들이 무한한 퇴보(infinite regress)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어떠한 자극을 외부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우주의 거울로부터 반응이 되돌아올 때, 우리는 그러한 반응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원론적인 자아는 더 강해지고, 더 강력한 자극을 외부로 보내게 됩니다. 그것이 되돌아올 때, 부정은 더욱더 심화되며,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한, 이러한 과정은 지속될 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위 말하는(proverbial) 좋은 생각(light bulb: 전구)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으며, 나는 정말로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우주가 얼마나 지혜롭게 만들어졌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루시퍼의 머릿속에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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