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은 24시간 끝에서 다시 살아나다"
하루. 단 하루였다. 그러나 그 하루는 내게 있어 죽음과 부활, 절망과 구원의 전체를 담은 축소된 인생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적 체험도, 명상도, 수행도 나에게 오늘 같은 24시간만큼의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했으리라. 단지 세 가지 문제. 단지 그뿐이었다. 인생에 터지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다. 한꺼번에 세 가지가 터지고, 그 중 두 개를 정신 없이 해치우고 나면, 남은 하나가 발목을 잡는다.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마지막 하나. 그러나 그것이 나를 24시간 동안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첫 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래, 이번에도 버텼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세 번째 문제에서 시작됐다. 이건 다른 두 문제와는 결이 달랐다. 합리로 안 되고, 경험으로도 안 되고, 사람을 붙잡아도 소용이 없는, 말 그대로 해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무언가를 시도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는 느낌이었다. 답답함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꼬리는 또다른 불안과 공포를 낳고, 결국 내 마음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고, 밥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었으며, 샤워를 해도 찝찝함은 남아 있었고, 뭔가를 해도 공허했다.
나는 점점 하나의 생각에 갇혀갔다. ‘이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생각이 확장되기 시작하자 곧이어 '나는 안 될 놈이다'로 이어졌고, ‘왜 나만 이러냐’는 억울함으로 변해갔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고, 이 세상 모든 귀찮음과 고통은 나를 따라다니는 저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고통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비극이 내 어깨 위에 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사람은 고통이 길어지면 반드시 ‘왜 나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절규다.
그렇게 절망이 깊어지자 내 무의식도 불안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나는 벌떡벌떡 깨기 시작했다. 자다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이불을 차고 일어났다. 이건 단순한 불면이나 악몽이 아니었다. 내 정신이 현실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해 뇌 속에서 온갖 기괴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냈고, 그 시나리오 속에서조차 나는 쫓기고, 허덕이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끝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가장 기이했던 꿈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오줌이 너무 마려워 화장실을 찾고 있었는데, 화장실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떼로 들어와 한국 화장실 실태조사를 한다며 실실 웃고 있었다. 나는 이 황당한 상황 속에서 분노와 불안을 느끼며 뛰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연극 이순신’에서 장군 역할로 캐스팅되어 분장을 마친 상태였고, 무대에 올라가기 10분 전이었다. “금방 다녀올게.”라고 말했던 동료 배우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미친듯이 시장과 마트를 뛰어다녔다. 그곳에 화장실이 있을 거라 믿고. 그러나 없었다. 없었다. 없었다. 뛰고, 뛰고, 또 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꿈에서 깼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정신은 산산조각 났으며, 현실이라는 무게가 다시 짓눌러왔다. 나는 꿀물을 얼음과 함께 시원하게 들이켜고, 찬물 샤워를 미친듯이 했다. 그렇게 육체를 자극하여 다시 숨을 쉬었다. 그리고 점심을 겨우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제 진짜 포기할까?’ 하는 유혹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나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진짜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 순간, 무언가 열렸다."
그토록 나를 미치게 하던 그 세 번째 문제가, 그렇게 단숨에 풀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꼬여 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조각들이 보였고, 그 조각을 맞추자 해답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느낌을 받았다. 무릎이 풀리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저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바로 그때,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나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경험했다. 구했고, 찾았고, 두드렸고, 결국 열렸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신앙적인 위로가 아니었다. 인생을 관통하는 실천적 원리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다.
오늘 밤, 클래식 기타 소리와 함께 무더위를 날려버리며 나는 인생이 다시 살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홀가분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단 하루 전만 해도 삶은 온통 쓰레기 같고,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였고, 세상은 불공정한 지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고통 끝에 낙이 온다’는 말, 그 진실을 나는 온몸으로 체험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지 몰라도, 그건 거짓이 아니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논리다.
내게 필요했던 건 시간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였다. 나는 절망의 끝에서, 아주 작지만 결정적인 하나의 신념을 붙잡았다. “그래도 한번 더 해보자.” 그 하나가 나를 건져냈다.
이 경험 이후, 나는 성경책이 당기기 시작했다. 과학과 철학, 우주의 기원에 대한 책들에 빠져 있던 지난 시간 동안 성경은 단순한 신화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안에 담긴 인생의 리듬과 진리, 인간의 고통에 대한 통찰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다시 읽겠다.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필사하며 마음을 다스리겠다. 필사란 단순한 복사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고통을 종이에 옮겨 적는 의식이다. 내 마음의 혼란을 정리하고, 나 자신을 다스리는 수양의 길이다.
육체의 피로는 잠으로 풀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피로는 생각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은 더 많은 생각을 낳고,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미궁으로 이끈다. 나는 이걸 체험했다. 정신이 지친 인간은 말라죽는다. 아니,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있는 셈이다.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살아 있지 않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오늘, 나는 다시 살아났다.
고통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다. 그것은 낙을 위한 입장권이었다. 나는 그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그 입장권으로 새로운 삶의 문을 열었다. 이제는 안다.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삶이 나에게 들이대는 칼날이며, 동시에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조산의 진통이다. 우리는 평온한 날들 속에서는 성장하지 않는다. 진짜 성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의 절망 속에서 온다. 오늘 나는 그 진리를 몸으로 배웠다.
고통은 하나의 의식이다. 삶이 나를 시험하고, 내가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더 나은 나로 거듭나는 통로. 그것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되고, 오직 나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단 하나의 미션처럼 주어진다. 누구도 대신 풀어줄 수 없고, 누구도 대신 통과해줄 수 없는 시험. 그렇기 때문에, 그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얻게 되는 그 어떤 내적 해방감과 통찰은 설명할 수 없는 깊이를 갖는다.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종교인들은 고난 속에서 신을 찾는지를. 왜 수도사들은 광야로, 절벽으로, 산으로 들어가 고통 속에 자신을 던지는지를. 그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전환점이라 부르는지를. 오늘의 나는 그 길목에 서 있었다. 분명히 나는 그곳을 지나왔다. 그 죽음 같은 하루를 지나, 지금 이 밤, 살아있는 클래식 기타의 떨림 속에서 다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은 단지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한 실천지침이었다.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두드리는 것뿐이다. 오늘 나는 무수히 두드렸다. 끝없이 질문했고, 반복했고, 다시 시도했다. 처음엔 미친 짓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해답이었다.
우리는 보통,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얼른 사라지길 바란다. 빠르게 해결되기를 원하고, 고통은 잠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다. 진정한 변화는, 고통을 충분히 겪었을 때에만 찾아온다. 고통은 진실을 가르친다. 나 자신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나의 태도에 대해서. 그것은 내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나는 나의 한계도 보았고, 그 한계를 넘는 순간도 체험했다.
사람은 누구나 벽에 부딪힌다. 그리고 대부분은 거기서 돌아선다. 어차피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두려움, 그리고 나만 이런 것 같다는 외로움. 그것들이 사람을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끝까지 간 사람만이 그 문이 진짜 열리는 순간을 본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는 스스로의 증인이다.
이제 나는 내 삶을 다르게 살 것이다. 무조건 긍정하지 않겠다. 억지로 웃지도 않겠다. 그러나, 쓰러지더라도 마지막 한 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오늘처럼. 그 어떤 힘든 순간이 와도, 이 경험은 내게 말할 것이다. “그때도 너는 해냈잖아.”
나는 이 고통의 기록을 잊지 않기 위해, 필사를 시작할 것이다. 종교적 의무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록으로서. 내 정신이 다시 어두워질 날이 온다면, 나는 오늘의 이 글을 다시 꺼내 읽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펼쳐, 그 안의 말씀 하나하나를 필사하며 나를 다스릴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도, 그 말씀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은 오늘 얻었다.
"이제, 나는 안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며 존재감을 되찾는다. 문제를 마주하지 않는 삶은 없다. 중요한 건, 그 문제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어떻게 알아가는가다. 나는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한발 한발 다가가 결국 그 정면에서 그것을 마주했다. 결국 문제란, 나를 향한 거울이었다. 내가 얼마나 집요한지,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끈질긴지. 그리고 결국 얼마나 변화될 수 있는지를.
24시간. 단 하루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죽었고, 부활했으며, 구원받았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시간들을 봉인하려 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는 그 절망 속으로 무력하게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그런 시간이 온다 해도,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너는 이미 그 어둠을 통과한 사람이다. 너는 살아서 돌아온 자다."
고통 끝에 낙이 온다는 말. 이제는 문장 하나로 소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살아서 증명한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진실을, 앞으로의 인생 속에서 계속 증명해 나갈 것이다. 낙이 오기 전까지는, 반드시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고통을 넘어서려는 자만이, 그 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자가 되겠다. 지금처럼."
"스트레이너, 랍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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