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괴는 왜인(倭人)이 그물질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이에 동으로 가서
왜인국(倭人國)을 공격하여 왜인들의 1천여 가를 잡아온 뒤,
그들을 진수 위로 이주시키고 난 뒤 '물고기를 잡아 먹을거리를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처 : 박순발 교수 논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9541
단석괴는 왜인(倭人)이 그물질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이에 동으로 가서
왜인국(倭人國)을 공격하여 왜인들의 1천여 가를 잡아온 뒤,
그들을 진수 위로 이주시키고 난 뒤 '물고기를 잡아 먹을거리를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처 : 박순발 교수 논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9541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 동쪽 해안에 상륙함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은 탈해가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임을 말한다.
[적녀국]은 적녀국 자체로만 봐야 한다고 생각. 엉뚱하게 변질시키지 말고.
하지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요동북부까지 북상하였다...?
앞 서 [도 5]에서 보듯 솽팡문화에는 시종 미송리형토기가 공반되지만, 한반도 중남부 점토토기문화에는 미송리형토기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파급의 출발지가 요동지역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주 목되는 점은 소능하 유역의 링허유형에서는 미송리형토기의 공반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이로써, 최초 한반도 중남부 지역 파급 점토토기문화는 [요서지역의 링허유형]이었을 가능 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션양을 중심으로 하는 극동아세아 농렵구 서단에서 형성된 졍자와쯔(鄭家窪子)유형은 시기적으로 링허유형과 병존하던 솽팡문화의 두 가지 지방유형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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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유적과 유물에서 다소 뜻밖(?)인 점은 바로 선비 계통의 유적과 상관성이 많다는 점이다. 부여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는 그들의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부여의 지배층들은 전연,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또 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芦岛市) 젠창현(建昌县, 건창현) 라마동진(喇嘛洞镇, 나마동진)에서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살았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지매 서쪽으로 연(!?)과 가까운 곳으로 도망쳤으나 대비하지 않았다. 연왕 황이 세자 준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 모용각(慕容恪), 모여근(慕輿根) 세 장군과 1만 7천 기를 이끌고 부여를 습격했다. 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 마침내 부여를 빼앗아[拔] 그 왕 현(玄)과 부락 5만여 구를 사로잡고서 돌아왔다. 황은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딸을 시집보냈다.
금속 유물 및 장신구류[15]의 조합상을 보면 저런 동물문 장식의 계열 자체가 스키타이 계열의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며, 귀걸이[이식(耳飾)]의 형태 또한 조형(祖形)을 따지고 보면 북방 계열, 즉 내몽골 쪽의 기원 전후한 빠른 시기의 유적에서 기원이 찾아지기도 하기 때문에 부여와 선비족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6]
모용황 = 선비족 일파 석씨의 도래 - 점토대토기 도래 - 부여의 몰락 연도가 서로 맞지 않고... 적석목곽분... 일단, 경주의 적석목곽분의 연대는 崔說에 의하여도 기원후 4세기 정도밖에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청동기 시대 만주지역의 유적을 살펴보자. 한국의 고고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편 길림성 서단산유적에서는 2구의 인골이 보고되었는데, 그 형질적 특징이 몽고인계의 특징을 보이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인골과는 달리 퉁구스계에 근접하고 있어, 우리민족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것으로 보여진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7), 30).
서단산문화는 길림·장춘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요령의 무순(撫順)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주로 석관묘와 옹관묘(甕棺墓)·토광묘 등의 묘제를 보여주고 있다.(중략) 중국 학계의 경우 서단산문화를 숙신족과 연결 짓고 있으며 북한 학계에서는 부여와의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7), 65).
이를 따르면, 청동기 시대 만주에 있던 유적인 서단산 문화는 알타이계로 보기 어렵다. 또한 부여족의 무덤 양식 역시 알타이계인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면, 부여보다 앞선 시기인 고조선의 무덤은 적석묘 내지 석관묘였다 그리고 부여의 무덤들은 적석목곽분이 아니라 토광목관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224-226). 즉 알타이계의 무덤으로 알려진, 적석목곽분이 아니다.
한편, 이보다 북쪽으로 눈강(嫩江) 지역인 송눈평원(松嫩平原) 일대에도 일찍이 농경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춘추시대 이전에 속하는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와 전국에서 서한시대에 속하는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가 있다. 이 중,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가 당시 송눈 평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부여족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지, 그것을 부여의 조기문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고리국’의 문화로 보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서단산 문화와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의 문화성격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서로 남과 북쪽 지역에 위치한 두 문화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발전해 나가다가 기원전 4-3세기 즈음에 이르러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 진다. 즉,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가 고리국(또는 탁리국)의 문화이고 그 중 일부 주민들이 남하하여, 먼저 내려와 서단산문화를 누리고 있던 앞선 부여족 주민들과 융합하여 부여국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romanpablovic.tistory.com/entry
blog.naver.com/gnbone/220438683808
松嫩平原, 즉 黑龍江省의 三肇지구(肇源·肇州·肇東)와 눈강 이서지방인 길림성의 扶餘·前郭·大安·鎭賚와 乾安 등은 西周시대 이래 白金寶377)·漢書378)·望海屯379) 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들 문화유형은 시기상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와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로 구분이 되지만 동일한 문화계열로 볼 수 있다. 백금보문화는 貊人의 문화이고 서단산문화는 濊人의 문화로 보기도 한다.387) 이 주장은 백금보-한서 하층문화가 하가점 상층문화와 유사함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대개 하가점 상층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東胡族 계통 외에 貊族 계통도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이 청동기시대에 북쪽 초원지대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설388)을 염두에 둘 때 이 주장은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부여의 근간을 알아 냈지만... 그렇다면 발해만 대릉하 용성국의 石氏와 점토대토기인의 지속적인 반도유입은 무슨 현상이며 어떤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400~0 BC, 연나라의 확장과 점토대토기인 및 석씨일파 도래 간의,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300~400 AD, 후기 부여와 선비족... 부여와 백제 간의 전쟁... 연나라 모용씨... 그리고 스키타이 양식의 보편파... 그 후, 신라로의 유입?
요서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와 홍산문화가 요동보다는, 오히려 지리적으로 더 먼 송화강 중상유역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라고 한다. eurasiad.blog.me/5003068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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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 생각하든가 ~ 난 내가 직접 본 대로, 겪은 대로 말했을 뿐이니깐 ~ 참고로, 사록국의 체질분류에 따르면 N의 키가 가장 작고, O2의 키가 가장 컸으며, O1b1/2의 다리가 제일 짧았고, O1a가 가장 롱다리였다는 걸 유추할 수 있음. 넌 네 방식대로 생각해 ~ ㅎㅎ
월성 석(昔)씨의 한자가 石인 줄 알았다... 큰 실수를 할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