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말기부터, M188이 내륙 깊은 곳까지 들어왔을 듯하고,
연해주 해안가와 외흥안령에 짱박혀 있던 C2a는 500 A.D 무렵에 목단강 중하류지역까지 장악한다. (수정됨)
그 전까지는 옥저계 문화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추가됨)
개인적으로 봤을 때, 고조선은 그냥 C-CTS2657 계열이 다수였을 것 같다.
요 밑으론 청동기 이후임.
과거 한때, 낙랑의 세력범위가 상당히 넓었던 시기가 있었다. 한사군 중 진번, 임둔, 현도군이 폐지되면서
이에 속했던 지역들이 대부분, 낙랑군의 영역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임둔군은 설치된 이후 토착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기원전 82년에 진번군과 함께 폐지되었다.
임둔군의 영역은 현도군에 편입되었는데, 다시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토착민들의 저항 때문에 북쪽의 신고구려현(新高句麗縣)으로 옮겨지자 소속 15개 현 가운데 7개 현이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압록강 중류의 集安과 위원 용연동․평북 세죽리 그리고 두만강유역의 함북 무산 호곡동․회령 오동 등지에서 출토되는
기원전 3~2세기경의 유물은 이른바 明刀錢유적으로 알려진 戰國계 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 출토된 청동유물15) 역시 고조선의 세형동검과 다른 요동계통의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동북지방의 청동기문화의 지역별 분포상으로도
함경남도 동해안 일대는 금야-토성리문화유형의 분포권으로
두만강유역(오동유형, 초도유형)과는 세부적으로 구분되고 있다.16)
이같은 고고학 자료들은 두만강유역과 압록강유역의 정치집단들이
진번과 임둔 및 대동강유역의 고조선과는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헌기록을17) 통해
위만조선 고지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이 두어졌으며,
압록강과 혼강유역의 고구려지역 즉 예맥사회에 현도군이 두어졌다는 주장과도18) 합치되는 면이 많다.
경주 일대에서 조영된 서기전 2세기대의 구정동, 입실리, 죽동리 유적들과
서기전 2세기말 ~1세기 초 전후로 비정되는 황성동, 조양동, 덕천리 등의
널무덤[목관묘] 유적들이 서북한 지역의 고조선 문화와 연계된다.
그런 까닭에 기원전 위만조선의 성립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 설치 이후 한(漢)의 지배를 피해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하한
조선 유민들이 경주 일대에 정착하는 와중에 사로국이 건국되었음은 사실인 듯 하다.
<경기>
이 지역에서는 2세기대 이후 목관 또는 목곽을 매장주체부로 한 주구토광묘와 즙석식분구묘가 나타나기까지
이러한 적석목관묘 또는 토광묘를 계승한 무덤 형태나 새로운 묘제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공백지대가 되는 것도
이 지역 초기철기시대 묘제의 출현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부지역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묘제 공백현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한 무덤에 함께 묻히는 매장방법인
지상식 대형목곽묘가 사용된 옥저 등 북부지역 묘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무문토기·원형점토대토기·흑도장경호·천하석제식옥 등 토기류와 장신구류는 일반적으로 부장되어 있는 반면,
한국식동검과 주조철기 세트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충청·전라지역과 영남지역의 적석목관묘와는 출토유물 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영남>
남한지역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유입된 충청·전라지역으로부터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지만,
충청·전라지역에서는 타날문토기가 전혀 공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식과 북방계 청동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이 지역의 유물 내용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영남지역 적석목관묘 출토 부장품은 종래의 한국식동검·주조철부·철착 세트에 더하여
철단검과 철모 등의 철제 무기류가 부장되는 등 서북한 지역의 부장품 세트와 좀더 가까이 연결된다.
이러한 양상은 영남지방의 초기 적석목관묘와 그 출토유물은 전국계 요소로서
서북한 지역을 통하여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타날문토기 : 영남 지역의 원삼국시대의 시작과 함께 목관묘에서는 승석문타날이 된 단경호가 처음 등장하는데
원삼국시대 후기의 목곽묘에서 격자타날된 단경호가 나올 때까지 승석문이 계속된다.
중서부 지방의 분묘인 주구토광묘나 분구묘에서는 그동안 격자타날문이 시작된 이후의 단경호 형식만이 나왔다.
그러나 최근 원삼국시대 이른 시기의 집자리가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서는 승석타날문단경호가 출토되어 이 지역도 승석문에서 격자문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가평대성리유적은 청동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집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유적으로
북한강유역의 충적지에 형성된 마을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철자형과 여자형, 방형과 원형으로 비교적 다양하다.
원삼국시대 늦은 시기의 집자리는 여자(呂字)형 또는 철자(凸字)형 집자리가 대부분이다.
청동기시대주거지는 평면이 장방형으로 주축방향이 북한강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열을 지어 조성되었다.
특히 17호 주거지는 화재로 폐기되어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노지 2곳, 저장공 6곳, 정치된 상태의 공렬토기가 확인되었으며,
토기 15개체, 석기 12점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의 축조시기는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10~8세기)에 해당한다.
원삼국시대 마을은 전기와 후기 두 단계에 걸쳐 형성되었는데,
전기의 마을에서는 부뚜막이 설치된 방형 집자리와 작은 수혈유구가 조사되었다.
특히 49호 수혈에서는 말 이빨을 매납한, 일종의 제사유구도 확인되었다.
유물은 화분형 토기, 낙랑토기, 철경동촉, 소찰 등 낙랑 유물이 대부분이다.
원삼국시대 후기의 마을에서는 방형의 집자리와 더불어 ‘呂’·‘凸’자형 집자리가 조사되었으며,
작은 굴립주 건물지와 구상유구가 각각 양쪽에 배치되어 있다. 집자리 바닥에는 공통적으로 점토를 깔았으나,
집자리의 평면형태에 따라 취사 및 난방 시설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呂’자형 집자리는 무시설식 노지인 반면, ‘凸’자형은 부석식 노지이고,
방형 집자리에서는 ‘ㄱ’자 형태의 터널형 노지가 조사되었다.
이 집자리 가운데 일부에서는 철기와 함께 철재, 노벽편, 모루돌 등이 출토되어
마을 내부에서 단야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낙랑계토기와 청동 단추, 야요이계토기가 포함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 집단의 성격 및 대외교류의 정황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차편년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https://gjicp.ggcf.kr/archives/14559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덧띠무늬토기[突帶文土器]와 관련되는 이른 시기 집자리부터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와 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는 중기의 이색점토구역이 있는 집자리까지 확인되었다.
<경주황성동유적>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철기시대 집자리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제철유구가 발굴되었다.
1·2차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철기시대의 집자리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집자리가 18기,
방형 집자리가 2기로 모두 20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이들 집자리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앞 시기의 것은 원형 내지 타원형의 움집자리(竪穴住居址)에 지상가옥이 1기 있고,
뒷 시기의 집자리는 말각방형(抹角方形) 내지는 방형(方形)의 집자리이다.
<영동>
기원전 1세기 후반경 부조현에는 낙랑군 으로부터 縣長이 임명․파견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평양시 낙랑토성 근처에서 발견된 貞柏洞 2호 무덤이 그것으로 이 무덤의 주인공은 夫租縣長을 지냈던 高常賢의 무덤으로 밝혀졌다.27)
고상현묘에서는 永始 3년(기원전 14)에 만들었다는 글씨가 쓰여진 일산대와
‘夫租長印’이라 은상감한 백동도장 1개와 ‘高常賢印’이라고 새겨진 銀印이 들어 있어
무덤 주인공의 직위와 성명 및 활동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이 무덤은 漢의 木槨墳계통의 무덤양식을 따르고 한식 유물이 많이 부장되어 있는 등 한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함께 부장된 세형동검과 동검자루장식 그리고 토기의 조합상(화분형 토기와 배부른단지)은
위만조선 지배계급의 문화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낙랑군지역에 남아 있는 목곽분 주인공의 출신에 대해서는 토착 조선인설,28) 토착 漢人說29) 등 견해가 다양하다.
이와 달리 한 정부는 武帝 사후 토착세력을 지배기구 속으로 편입하여 군현지배체제를 유지한다는 방침하에
평양지역 내에 있던 토착 지배세력을 선발하여 부조현의 長으로 파견함으로써 ‘以夷治夷策’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30)
이처럼 고상현을 평양지방의 위만조선 지배계급 출신으로 본다면 부조현장이 세형동검과 화분형토기 세트를 부장하고
그의 무덤이 평양에 만들어진 배경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의 부조현 통치와 관련하여 주목되어 온 다른 하나의 자료는
고상현묘 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夫租薉君墓(정백동 1호무덤)이다.31)
이 무덤에서도 ‘夫租薉君’이라 새겨진 은제 도장과 한의 철기,
그리고 위만조선 지배계급의 무덤에서 흔히 나오는 세형동검․동모․청동제 수레부속과 화분형토기 세트 등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경의 무덤이며, ‘부조예군’ 인장은 한정부가 무덤 주인공을 夫租邑君으로 봉하면서 함께 준 것이다.
<呂→凸>
영동지방의 철기시대 문화 연구는 취락유적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강릉지역은 특히 철기시대가 되면서 구릉상의 청동기시대 취락이 해안의 사구지대로 이동하여 입지한다.
이 지역 철기시대 집자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형의 呂자형 혹은 凸자형의 움집이다.
기본형은 장방형이며 움의 깊이가 깊고 넓으며 呂자, 凸자로 돌출한 부분은 일종의 문이 달린 출입시설이다.
주거지 둘레로 판자벽과 선반을 갖추고 있으며 주거지 중앙에 약간 치우친 곳에는 점토로 테두리를 하고 자갈을 깔아 만든 노지가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과 구조상으로 이전 시기의 청동기시대 후기 주거지와는 전혀 다르고
태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퍼져 있는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상과 상통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연해주지역의 단결-크로노프카 문화)
강릉 안인리유적과 같이 여러 시기에 걸쳐 커다란 규모로 형성된 취락의 전모가 조사되면서
주로 주거지의 구조를 중심으로 영동지방 철기시대 문화의 기원과 변천을 논의해 왔다.
강릉에는 안인리 말고도 초당동과 강문동, 교항리, 동덕리 등의 사구지대에서 많은 수의 주거지가 발굴된 바 있다.
영동지방 주거지의 구조적 변천을 보면 가장 오래된 형식이 장방형 주거지이고
그 다음 단계가 凸자형주거지, 그리고 呂자형주거지로 변천하다가
다시 凸자형주거지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주거지의 평면형의 변천이 시기적인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출토되며 일부 늦은 시기의 주거지에서는 백제토기가 출토된다.
P.S.) L682의 확장거점이 백두대간~영서 내륙지역이었다는 걸 느낀다.
함경지방과 강원지방을 중심으로 퍼진 것 같음.
①번 사로6촌 타입은 신석기부터 남하하며 고조선의 일부분이 되었고, 한편으론 한사군 설치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남하함.
②번 크로우노프카 문화권 타입은 청동기 말~철기시대 때 빠른 속도로 남하함. 임둔군 통제불능... 흠...
경로는 딱 둘인데... 기린우라 → 탸오샨 출신이거나... 러시아 → 동예 출신이거나... 밀양 박티카 쿠술라카. 그는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박혁거세 주검의 산락(散落)은 괴기하다고 할 만큼, 다른 건국신화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신화의 특색이다. 해석하기 대단히 어려우나, 이 부분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성무식(成巫式)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체 분리의 모티프와 대응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고증이 요망된다.
승천, 7일 후에 유체가 땅에 산락하고, 국인이 이것을 합장하려고 한 것 등을 보면, 이것은 나무위에 (樹上葬) 풍장 (風葬) 한 것이 7일 후에 부패하여 그 뼈가 뿔뿔이 땅에 떨어졌으므로 뼈를 모아 매장 (復葬) 하려고 한 것이라 생각된다. 거란, 실위의 장례는 풍장(風葬), 수상장(樹上葬)
풍장은 주검을 가마니나 자리 등으로 싸서 나무에 매달거나 나무로 만든 시렁 위에 두어 자연적으로 비바람에 의해 소멸시키는 장례법이다. 따라서 풍장은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 다시 유골을 수습해서 이차장二次葬을 치르는 세골장洗骨葬이나 초분草墳과는 다르다. 풍장은 세골장이나 초분과는 달리 주검을 더 이상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차장을 위한 전前 단계로서 행해지는 일차장적一次葬的 성격을 갖는 주검 처리방법은 엄격히 말해서 풍장이 아니다. 풍장은 그 자체로 완결된 주검 처리방법이다. 일부에서 풍장을 초분과 같은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검을 노천에 두어 비바람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멸되게 하는 것으로, 대개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은 주검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세골장, 초분 같은 복차장複次葬의 전前 단계와는 구별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조 박혁거세 장례 또한 수상장(樹上葬) + 세골장 (洗骨葬) 이었다.
수상장(樹上葬)은 시체를 나무위에 올려 놓는 장례이다. 약어로 수장(樹葬)이라고도 한다. 주로 시체를 가마니로 싸거나 관이나 항아리에 넣어서 나무위에 올린다. 옥저의 장법(葬法) - 목곽(木槨)을 쓰며, 처음에는 임시로 매장을 하였다가 가족이 죽어 성원이 되면 새로운 목곽에 이장하여 정식 장례를 치렀다. 또 시체는 강가에서 깨끗한 물에 씻어 뼈만 추려 안치하였다. 이로써 이 장법을 가족 공동 묘라 하기도 하고, 일명 세골장(洗骨葬)이라 하기도 한다.
장사는 큰 목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30미터...?) 새로 죽은 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이에 들어간다. 나무에 '生'자를 새기어 죽은 자의 수를 헤아렸다.
북사 거란전 - 시신을 나무 위에 놓고 3년이 지난 후에 뼈를 거두어 불사른다. 북사 실위전- 부락에는 공동으로 큰 시렁을 만들어 두고, 사람이 죽으면 그 위에 둔다.
① 씨니가이문화 : 한까호 주변. 하린스가야(탄화곡물), 키롭스키, 시니가이(주거내 돼지 두개골)의 주거유적. 외반구연호와 옹, 발의 무문토기 위주. 기타 채색, 덧띠와 혹, 자돌, 침선문(예:구연상단 침선 거치문 에 자돌 배치). 자이사노프카 전통 잔존. 청동제(갈고리, 패식, 칼, 송곳, 단추, 그림 100의 시니가이 상층을 보면 연주형장식, 가운데 뉴 있는 소형, 중형의 원판평동기, 곡옥형 꼬리칼=소둔, 이리강 등이 보임. 주석과 비소 합금), 뼈단검, 단면 장방형 마제석부, 갈판과 갈돌, 보습. 뿔괭이.. 골촉, 점판암제 화살촉, 석창, 골갑. 청동기는 카라스크식. 기원전 10-8세기. 전통적 유형과 새로운 유형(청동기, 활, 방어용 무기)이 혼합. 이건 뭐. 당연한 거고.
말갈의 양상은 말갈계 문화를 대표 하는 토기인 ‘말갈관’으로 알 수 있다. 말갈관은 심발형 기형에 외반구연에 동체 부가 타원형에 가깝게 넓어지는 평저토기이다. 그 태토에는 사립이 많이 섞인 적갈색계통이며 물레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수제토기이다. 그 표면에는 타날문이 시문된 경우도 있으며,
(경기가평대성리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유물은 경질무문의 중도식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주류이며,...중도式-경질무문토기납작바닥에 모래가 많이 섞인 점토로 만들고산화염소성으로 적갈색을 띠며 표면은 마연이라기보다 거칠게 점토를 끌어올리는 정면을 하였다.원삼국시대 동안, 이 중도식토기는한강 유역과 강원도 동해안을 포함한 중부 지방 전역, 즉 마한과 예족의 영역에 널리 퍼져 있던 토기문화였다.한강 유역 백제의 중심지에서 무문토기 기종인 옹과 발을 타날기법과 물레질로 제작하게 되면서이러한 토기 제작이 한강 유역을 따라 확산되면서중도식토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북한강과 남한강 상류에는 5세기까지도 이러한 무문토기 전통이 남아 있게 된다.강원도 동해안도 중도식토기의 유형이 지배적이었던 지역이...
지금과는 좀 다른... 구버전 의견...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시니가이 문화의 표지하플로는 C2a-L1373였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