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너를 기억했던 건 아니다.
중학교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도,
나는 너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애들 중 하나로 생각했다.
이름도 몰랐고,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그때의 나는 바빴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이루고 싶지 않다는 상태를 유지하느라.
매일이 비슷했다.
크게 웃지도,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은 채로
자질구레한 인연들 사이에 묶여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끔은 이유 없이 피곤했고,
가끔은 이유 없이 우울했고,
아주 가끔은 이유 없이 괜찮았다.
그런 날들 사이에서
너는 그냥 배경이었다.
기억은 우연히 돌아온다.
어느 날, 급식실에서 줄을 서 있다가
앞에 서 있던 애가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걸 보는 순간, 이유 없이 시선이 멈췄다.
왼손잡이.
그건 흔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몇 번 더 너를 보게 됐다.
체육관, 복도, 계단.
항상 같은 장소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계속 겹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너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초등학교.
같은 태권도장.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각.
하지만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다.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심지어 네가 나를 기억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신했다.
너는 그 아이였다.
그 이후로
나는 너를 보기 시작했다.
보기 시작했다는 말은,
이전까지는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얼굴선,
말할 때 미묘하게 기울어지는 고개,
별 의미 없는 표정들까지도
나는 하나씩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많이 볼수록 더 흐려졌다.
분명 가까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 느낌.
그래서 나는 너를 그려보기로 했다.
공책 한쪽에,
연필로 가볍게 선을 그었다.
눈, 코, 입, 얼굴형.
하나씩 채워 넣었는데,
완성된 얼굴은 어딘가 어색했다.
다시 지우고,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더 자세하게.
쌍꺼풀의 깊이,
웃을 때 생기는 주름,
입술의 두께,
얼굴의 곡선.
조금 더 비슷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아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리고 있는 건
너가 아니라는 걸.
내가 그리는 너는
내가 본 너의 일부였고,
그 일부를 이어붙인 결과물일 뿐이었다.
나는 결국
너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은 별다른 사건 없이 지나갔다.
우리는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고,
서로 말을 건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더 너를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너를 알고 싶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다고 믿고 싶은 감정.
네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보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쪽이
더 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묘하게 거리가 느껴졌다.
나는 그걸
“미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시에,
그걸 받아들였다.
이상하게도
싫어하는 모습마저
너답다고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네가 나를 알았다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
얼마나 오래 기억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걸 너로 채워왔는지
그걸 알았다면—
정말,
그랬을까.
그 질문 이후로
나는 조금씩 멀어졌다.
너에게서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너에게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너를 떠올리지 않는다.
정확히는,
떠올릴 수 없다.
얼굴은 흐릿해졌고,
목소리는 애초에 없었고,
남아 있는 건 몇 개의 단편적인 장면뿐이다.
왼손,
체육관 바닥,
공책 위의 낙서 같은 선들.
나는 이제 안다.
나는 너를 몰랐다.
알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전부
내가 만든 이야기였다.
그래서 지금의 너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냥—
비어 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걸 이해했다.
문장에서 띄어쓰기가 생기듯,
우리 사이에도
하나의 공백이 생겼다는 걸.
그 공백은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대로 남겨두어야 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 공백을 지우지 않는다.
그 안에
너를 남겨두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공백 속에서
조용히,
너를 잊어간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