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나는 희망이 꺼진 성화
산소를 들이마시는 핏덩어리
끈적거리는 액체는 몸속을 휘젓고
안팎에는 온통 검은 질병

나의 기억을 시험하는 죄악은
너덜너덜해진 공포를 머리속에 구겨넣고
닳을 대로 닳아 버린 성기의 말단은
뇌의 신경 사이에 미친 터널을 뚫는다

대도시 지하를 돌고 도는 개미떼를
힘없이 바라보는 맹목의 눈동자엔
그들이 왔던 곳의 눅눅함과
갈 곳의 메마름이 비추고

미뢰를 적시는 쓰디쓴 일상은
종이 위 아라비아 숫자로 변화해
0과 1이 늘어선 이진수가 흘러가듯
저 건너 흑암으로 달큼히도 넘어간다

불세출의 따라지 인생을 따라서
모험의 항해를 떠난지도 어언 십 년
소년은 작살을 던지는 잔인한 꾼이 되어
예쁜 고래의 심장을 수도없이 꿰뚫었다!

지금 소년 앞에 놓인 거울 속에는
낯선 남자가 하나 서서 소년을 바라본다
남자에게 추억이나 꿈은 허락되지 않은 채
罪人의 형상으로

눈물로 만들어진 가면을 소년의 얼굴에 가만히 대어 본다.



독거노인

마침내 가끔 나는
날 아는 사람들이
내 생사를 모르게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불행한듯 행복해 보이기도 하였던 한 인생이
지구 어딘가에서 끝모를 극락의 세계에 있겠거니
사람들이 그리 생각해 주었으면 하였다
산림의 바른 터에는 옛날에 존재했다는
절의 기단이 남아 쓸쓸한 낙엽이 바람결에 스러져갔고
성불에 이르지 못한 고독한 세월은 그 절에 있었을
산신각의 탱화를 보며 기도했을 자신의 조상님을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접동새 울어제끼는 하루 저 석양노을을 보며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만이 무성한 단군왕검의 이야기와
에이는 밤 땔감으로 쓸 나무 뿐 눈에 뵈는 것 없는 깊은 산중에
최후의 만찬식과 더불어 자신의 아비를 버리고 왔다는
높고도 화려한 어떤 장례식의 풍습을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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