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 앞에 영상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물과 사건과 인물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한 채로 그것들을 그 직접성의 빛 아래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사실주의가 거둔 이 풍부한 결실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는 다른 한 명의 천재적인 사실주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지닌 이를 데 없는 매력이 그 내용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어 왔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적인 구성, 그로테스크하고 때때로는 악마적인 사건들의 연속, 주정적인 이국적 격정 등,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걸작이 못 되는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의 작품들의 이러한 요소에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도 그것들이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소설들의 두꺼운 볼륨과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의 짧음의 대비는 충격적이다.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백치』나 모두 대단한 장편들이지만 시간은 지극히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나가기에 전혀 따분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격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채로운 사건을 중첩시킴으로써-호메로스의 『오딧세이』가 그렇듯이-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건 속에서 한없는 대화와 마음의 움직임과 소품적 디테일을 중첩시켜 그 박진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사건의 중첩이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중세의 로망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밀도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의 사건들을 이어나감으로써가 아니라 단일한 사건의 그 미세하기 짝이 없는 구성요소를 확산적으로 표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은 사건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기 때문에 박진적인 것이다. 독자는 지칠 줄 모르게 분출되는 그의 주인공들의 대화와 끊임없이 흐르는 디테일로부터, 개념상으로는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생동하는 주인공, 발생 상태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는 영상적 효과는 자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한 인물을 도입하기 전에 그 인물의 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이것은 그의 선배인 투르게네프나 푸슈킨이나 고골리의 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설명함으로써, 한 일문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려버리는 비사실주의적 요소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임 라이트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어둡게 만드는 무대장치와 같다. 그러나 주인공의 실재는 어둠 속에서 뛰어드는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밝혀진다. 주인공들은 무대에 뛰어들자마자 애초에 제시되었던 관념상 속의 인물들과는 완연히 모순되는 모습을 드러낸다. 제시된 장면들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관념과는 상반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상이 관념을 배신하는 것이다.
방탕하고 광기어린 정열의 소유자로 소개되는 미쨔는 순진하고 자유분방한 영상적 제시에 의하여, 그의 전체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이상한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난폭한 생명력과 정열이 시적 민감성과 명예에의 존중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는 부친 살인범의 선고를 받는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고 죽일 생각까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동기 때문에 미쨔는 기꺼이 십자기를 진다. 이것이 받탕하고 난폭한 사람의 모습인가? 그러나 모순적으로 제시되는 그의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의 일관된 주인공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사실적이다. 우연적 모순이 오히려 내적 일관성을 주는, 사실주의가 지닌 영상적 효과라고 할 만한 것이다.
철두철미 악의 화신인 표도르는 오히려 가여운 속물, 교활한 야바위꾼, 질투에 눈먼 졸장부, 천박한 어릿광대로 묘사됨으로써 그 생명력을 얻는다. 악 그 자체에다 그것이 지닌 파렴치함과 난폭함에 덧붙여 누구에게나 발견되는 이러한 악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조명을 비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류의 소설 속에서 얻게 되는 그 미이라 같은 악의 화신, 철두철미하고 악마적인 뉘앙스로서의 악인이 배제되고, 살아 있는 악의 화신, 생동하는 악의 화신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이들 주인공들에 대해 작가의 설명에 의해 도입된 정의는 그 정의로부터 독립된, 그리고 주로는 모순되는 그들이 생생한 '영상'들이 제시됨에 따라 독자와 더불어 생성(becoming)과정 중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념과 영상의 두 개념상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아니 것이므로, 여기에 부딪힌 감상자들은 이 모순되는 사실들을 어떻게든지 통일시켜 정의해 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인물상들을 통일시켜 이해하지 않는 한 늘 이 교차점에서 그들을 놓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 역시도 이 소설적 현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떡해서든지 이해하려 애쓰는 한 대상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에게 기지의 인물로서 제시되었는가? 마치 한 의학자가 심장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내릴 때처럼 그렇게 정의가 내려진 인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한 개념적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와 소유로부터 독립된, 그리하여 복잡하고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개성을 지닌 채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포착하고 소유한 채로 삶을 살아나갈 수는 없다. 같이 살아나가야 하고 영원히 이해하도록 애써야 하고, 결정되어 있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생동하고 갱신되어가는 관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감상자가 그들의 비밀을 뚫고 육박해 들어오는 것을 쉽지 않게 한다. 그들은, 그들에 관해 형성시키고자 애쓰는 독자의 관념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기에 자신들을 부합시키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의 효과적인 실상으로 변모해 나간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장황한 심리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전개되어 나가는 주인공들의 대화에 의해서 얻어낸다. 그의 모든 소설은 연속되는 사건의 중첩이라기보다는 장면의 중첩이다. 그 각 부분은 연극의 극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없이 많은 디테일을 설명 없이 제시함으로써 극적인 영상효과를 얻어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인물을 창조했느냐가 아니라, 그 인물을 어떻게 창조 했느냐가 되는 것이다.
거대하고 통일적인 세계상이 해체되어가는 이 시대, 예술은 예술만의 것으로 수렴되는 이 시대, 그렇기 때문에 직관과 감각과 영상이 점점 더 중요성을 더해가는 이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비교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 채로 그의 소설 속에 구현한 것이다. 원한다면 관심을 그가 가난한 간질병 환자였고, 도박벽 때문에 끊임없는 모욕 속에 산 사람이었고, 숭고한 인간정신을 가진 사람 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끊임없이 집착한 천재였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심오한 관념을 구축했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알렉세이는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음란이라는, 키릴로프는 자살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관념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작가, 자기 직업에 충실했던 숙련된 장인이었지 그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실주의 시대의 소설적 기법에 있어 최대의 거장이었고 소설형식의 최고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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