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오늘날의 대한민국

소설「장미의 이름」을 읽고


한 순간만 피고 곧 져버리는 장미처럼,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말처럼, 모든 존재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만은 남는다. 아드소에게 장미는 아마 사하촌의 그 소녀일 것이다. 아드소는 일생동안 그가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교회에 앉아 졸며 환상을 봤을 때, 그 환상 속에 나타난 소녀의 이름은 분명 ‘수산나’라고 명시되어있다. 아드소는 환상 속에서 그 소녀의 이름을 ‘수산나’로 인식하고 있다.「장미의 이름 작가노트」에서 작가는 이 소설에서 실수가 낳은 모순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밝힌다. ‘수산나’라는 이름도 「장미의 이름」의 모순들 중 하나이다. 왜 작가는 이 모순을 소설에 남겼을까.

아드소가 수도원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이름조차 남지 않고 불타버렸기에, 수도원이 정말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의심하게 된다. 수도원이 실재했던 곳이 아닌, 에코가 상상해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장미의 이름」은 지식인들의 이야기다. 작중 인물들은 몇을 빼고는 대부분 학승들이다. 이 작품은 신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에 인간 중심의 문화가 태동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교만이 진정한 진리라는 교조주의의 호르헤와 인간의 본성인 웃음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수도원의 학승들. 이들이 벌이는 사건들로써 교조주의의 위험을 경고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할 필요성을 주지한다. 체제로부터의 문화에 대한 억압은 옳지 못하다고, 인간으로서의 표현의 자유는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한다.

소설 곳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플라톤은 ‘시인추방론’을 주장했다. 이상 사회는 시인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효용을 카타르시스에서 찾고, 시를 인간을 정화시키는데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나도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 예술 작품은 현실의 그림자, 이 글은 예술 작품(장미의 이름)의 그림자이다. 즉, 이 글은 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인 것이다. 교수님이 러시아 희곡에 대해 연구하고 쓰시는 논문도 그렇다. 플라톤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데, 문학은 진리와 멀다. (물론 가깝다면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하지만.) 학문의 목표인 진리 규명이 불가능한 문학이, 과연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호르헤처럼,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장님인 것일까.

호르헤는 수도원의 장서들과 함께 불타 죽었고, 르네상스 시대는 막이 올랐다. 인문학은 신학을 앞질렀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또다른 것이 인문학을 죽이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논리다. 요즘 각종 인문학 서적이 베스트 셀러에 올라 있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의 상업 논리(사재기를 통한 판매 부수 부풀리기, 상업 광고를 통한 홍보 등)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입시와 취직, 생업에 바빠서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을 점점 멀리하고, 일부만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매일 수많은 책들이 출판되고 정보의 홍수가 범람하고 있지만, 저질의 책과 정보에 묻혀 양질의 책과 정보는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로써, 나도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원래 이 글은 이쯤에서 끝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신문에서 본 하나의 기사가 나를 다시 키보드 앞에 앉게 했다. 소설가 이제하씨가 ‘현대문학’에 연재하기로 한 장편소설 <일어나라, 삼손>에 ‘박정희 유신’과 ‘1987년 6월항쟁’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현대문학’으로부터 연재를 거부당했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다른 무엇보다 더 권력에 저항할 수 있어야하는 문학이, 현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작품을 검열하고 있는 이 사태가 통탄스럽다. 뿐만이 아니다. ‘현대 문학’ 9월호에는 1998년에 출판되었던 현 대통령의 수필 네 편과 그에 대해 찬양하는 비평이 실렸다. 굳이 지금 와서 다시 꺼내볼 가치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수필은, 현 대통령의 수필이기 때문에 실렸다는 의심을 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수필들을 찬양한 비평을 비판하는 비평이 기고되자 '현대문학‘은 이를 거부했다. 1327년 유럽이나 2013년 대한민국이나, 자신의 종교(또는 사상)만이 옳다는 교조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호르헤는 신학이 지고 인문학이 떠오르는, 르네상스 초입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호르헤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신념을 계속 국민들에게 강요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인가. 이는 우리들의 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