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이제, 루시퍼가 예수와 관련하여, “만약 네가 나를 내버려둔다면, 나도 너를 내버려두겠다.”라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루시퍼는 예수를 직접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의 대표자들이 예수를 자극(도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 독려했습니다. 성경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종종 자극했으며, 심지어 신성모독의 죄를 씌우기 위해, 함정을 만들어 놓으려고도 했었다고 올바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들과 교감하고자 했던 동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만약 별 생각 없이 성경을 그냥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게 되나요? 글쎄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 예수가 지식인들과 티격태격하며 말다툼하는 것을 좋아했든지, 아니면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식으로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광신적인 사고방식에 단단히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정신적인 영역과 정체성 영역에 존재하고 있던 추락한 존재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점령당해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어떠한 주장을 제시하든, 그들은 이원성 의식을 이용하여, 그러한 주장에 상응하는 주장, 즉 예수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제시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예수는 분명히 이러한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다 더 직선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꽤 많이 찾아볼 수가 있으며, 따라서 이들의 마음은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분야에서도 찾을 수도 있지만, 과학적 유물론자들과 정치적인 시스템 혹은 당파의 신봉자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을 살펴보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유물론적인 대학교수(소위 공격적인 무신론자들) 그리고 아주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에게서도, 마음이 동일하게 닫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끝까지 설득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주장은 결코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여러분이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 즉 그들보다 더 좋은 주장을 제시한다면, 그들이 여기에 반응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정상적인 사람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추락한 존재들이 육화해 있는 것이지만, 심지어 추락한 존재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여러분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정신적인 영역 혹은 정체성 영역에 존재하는 추락한 존재들에 의해 철저하게 점령당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실제로는 인간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더 높은 영역에 존재하고 있는 추락한 존재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며, 여러분(육화해 있는 인간에 불과한)이 제시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그 존재는 그것이 잘못된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설득할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예수조차도 이러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면, 아무도 설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러한 사람들과 관계를 가졌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예수에게 망신을 주려고 했으므로, 그들이 언제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는 청중들 중에서 일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예수는 서기관들 및 바리새인들과 훨씬 더 많은 언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일반적으로 예수가 이들과 직선적이거나, 지적인 방식으로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예수는 언제나 짧고도, 간결하게 반박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기법으로, 나중에 선불교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예수가 했던 많은 말들은 우리가 오늘날 선문답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상황을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의 세계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당황스럽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늘나라가 실제로 천상의 어딘가에 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천상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달랐습니다. 그들은 천상이 지구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세가 유대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미래에 자신들도 하늘나라로 가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의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한 사람들만이 천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내면의 장소이므로(혹은 오늘날에 말하는 것처럼, 의식상태이므로), 외적인 종교를 따른다고 해서 그곳에 갈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불행히도, 또한 이러한 말들은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조차도 훨씬 뛰어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사람들 역시도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던 사람들의 설계에 의해서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그러한 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을 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예수가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혹은 예수를 통해 말하고 있던 상승 마스터)는 그러한 말들이 청중 속에 있던 일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 이유는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이러한 말들 가운데 하나로 인해, 사람들이 가슴속에서 진실하다고 여기고 있던 것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자극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은 이원성 의식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들의 마음을 밀폐된 시스템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마음속에 정의해놓은 현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개인적인 마음들을 집단적인 실체에게 넘겨줌으로써, 현실(reality)의 바깥에 뭔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칙은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한 사람이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눈이 멀게 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러한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권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개인이 그러한 상태에 아주 오랫동안 있음으로써, 이제는 움직여가야 하는(그 사람 자신을 위해) 시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그 개인이 그리스도 의식을 지닌 사람과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마주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면을 피해야 할 권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대면하고(그럼으로써, 이원성에 대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됨) 난 후, 그러한 만남을 거부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심판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대개 그 사람이 이번 생이 끝나고 나면, 지구에 다시 육화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대신에, 그 사람은 다른 행성, 혹은 아스트랄계로 갈 수도 있지만, 이원론적인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게 되는 곳으로 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장소가 지구보다 밀도가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통이 더 심해지게 됨으로써,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취임하기로 되어 있었던 지난 2000년의 기간 동안, 지구가 앞으로 나아갔었더라면(집단의식의 상승을 의미함), 특정한 사람들(추락한 존재들)은 행성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이들이 집단의식을 끌어당기는 힘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정체성과 정신적인 옥타브들에 존재하고 있던 추락한 존재들의 영향력도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일을 해줄 사람들이 많지 않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도전했던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았으며, 그들은 지난 2000년에 걸쳐 육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대, 즉 쌍어궁 시대에 집단의식이 크게 상승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네 그렇구나 난궁금해서단지보다가댓글그냥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