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나에게는, 자유의지에 대한 본질과 자신의 부정으로 인해, 선택의 자유가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루시퍼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루시퍼가 부정하는 것을 단념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오만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루시퍼는 자신이 옳았으며, 신이 틀렸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루시퍼가 자신의 생각(추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면, 루시퍼에게는 그것이 최악의 방식으로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나는 루시퍼처럼,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나는 지구에서의 내 여정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루시퍼를 어느 정도는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쪽에서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실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상승한 마스터들조차도 루시퍼를 설득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야말로 나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루시퍼, 혹은 다른 추락한 존재들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모든 열망을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내 내면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정상적인 행성에 존재했던 이후로, 내가 알지 못했던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추락한 존재들과 싸우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이, 내 마음속으로는 추락한 존재들의 폭압으로부터 사람들 혹은 지구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백만 년 이상을 악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 상태로 육화해 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특히 전쟁으로 인해 죽었으므로 많은 육화에서 수명이 짧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육화를 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철부지의 갓난아이로 태어나,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 끼우고, 얼굴에 오트밀 묻히지 않는 법을 배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거쳐야 하며, 그런 다음 선(善)을 위하고 악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난 후, 육화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또다시 되풀이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지구가 추락한 존재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에너지에 권능을 잘못 부여함으로써, 단지 인류의 자유를 지연시켰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이것이 계몽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는 이러한 고통이 단순한 메커니즘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원성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옳고 그름이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극성들을 가지게 되는 마음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옳다고 하는 것과 관련된 의기양양한 느낌과 틀렸다고 하는 것과 관련된 수치심, 혹은 당혹감이 내면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옳은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옳다고 느끼게 될 거라고 믿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옳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우리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우리가 타인들에게 비판적이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싸우도록 야기하는 바로 그 의식이 또한 우리가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막습니다.


낡고 이원론적인 마음 상태에 기초하여, 나 자신을 심판하는 고통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이원론적인 자아보다 내가 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그러한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이원론적인 자아를 통해, 즉 그때까지 내가 해오고 있던 역할이라는 필터를 통해, 내가 했던 행동들을 나는 더 이상 비판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백만 년 동안 악과 싸웠던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내가 이원성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그러한 체험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에게 필요했던 시간이었다면,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나에게 주어졌던, 허용된 시간의 범위 내에 정확히 있었으며, 보다 더 큰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했던 선택들에 대해, 나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재하지 않는(unreal) 자아를 통해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선택들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러한 자아와 동일시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런 다음 형체가 없는 내 자아와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이전에 했던 선택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러한 선택들을 통해 배우고, 통합하고 난 후, 나 자신을 완벽하게 용서함으로써, 그러한 선택들을 하게 만들었던 자아를 용해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과거로부터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자유로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