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가 없는 바다

 


 


chapter

 


 


 


 


 


 


1:

몸서리치게 추운 초한이 끝나고 부쩍 메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은 모처럼의 따뜻함에 기지개를 폈다. 정우는 새로 산 코발트 색 파자마를 입고 해가 중천에 떠서 방 안 햇발이 가득할 때까지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발 언저리엔 그가 읽다 만 물리학개론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미세한 것들을 제외하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아침이다. 만들다 만 프라모델들이

방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먼지가 다닥다닥 붙은 스웨터 세 벌이 상냥하게 프라모델들을 덮어주고 있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20대 남자의 방다웠다. 보통 프라모델을

하는 이들을 별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또 유달라 보이기도 하겠다만,

방의 상태로만 추측하자면 주인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겨울에 길 구석진 곳에서 핀 코스모스처럼 깊은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냉장고를 열면 풍겨오는 프레온 가스와 뒤섞인 반찬냄새처럼, 익숙한 듯 하다가도 거부감이

드는 그러한 수순을, 차분히, 그리고 더 차분히 밟아왔었다. 막 버려질 준비를 하는 싱싱한

음식물 찌꺼기와도 같은. 하지만 세상은 그를 멸시 섞인 우러러봄으로 대접했다. 길가에서

노숙하는 영화배우를 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정작 정우는 자신이 영화배우와 비슷한

자존감을 지닌 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자신을 그저 하수구에 버려질

역겨운 운명으로 여겨왔었다.

길조를 가져다 줄 것 같은 잡새가 시끄럽게 짹짹댔다. 방역 담당자가 시끄럽게 기계를 웅웅대며 지나갈 때도 죽은 듯이 자던 그가 옅게 눈을 떴다. 눈을 뜬 채로 여전히 자고 있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곤 잠에서 깼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행복하거나, 악몽이었거나, 어쨌든 강렬한 인상을 남긴 꿈을 꾸었던 것처럼, 그는 한참동안이나 침대 맡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는 온 몸이 근질거렸다. 하얗고

창백한 다리를 모기가 물린 것처럼 한동안 벅벅 긁어댔다. 그 강렬함이 소름처럼 돋아난 듯이,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긁고 나서는, 족히 200만원이 넘을 것 같은 외양의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바탕화면엔 일반인이라면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복잡한 아이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자바, 일러스트레이터 등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파일들 뿐 아니라, 그가 대학교수들에게

 


참고시켜 주기로 약속했던 논문 파일도 그에 못지 않게 많았다. 스핀 수와 자기홀극에

대한 논문을 한번 쭉 훑고 나서는 두둑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폈다. 그의 파일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그의 머리도 여전히 똑똑했고, 세상은 여전히 지루하게 톱니

바퀴처럼 맞물려 한없이 돌아가고 있다.

좋다, 매우 좋았다. 영혼 없는 좋음. :D

일관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지구의 물리작용은 영원히 일관성을 유지하며 우리를 평안하게 해 준다. 지금 땅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저 할머니를 보면서 지구를 떠

받치고 있는 태양에게, 태양을 일직선상에 유지하게 해 주는 은하 세계에게, 그리고 그러한 우주를 창조해주신 창조주 빅뱅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말 그대로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인 인간이, 그저 원자같은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물어뜯고 덤비는 것을 묵인한 채, 더 큰 톱니바퀴처럼 탈 없이 돌아주고 있지 않은가.

조립하다 만 아파치 프라모델을 갈기갈기 다시 찢었다. 서로 물고 뜯는 사람들을 따라하기라도 하듯이. 그 자신도 사람이긴 했지만, 원령공주처럼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인식

했다. 문명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은 혈혈단신의 몸으로 원시림을 뛰어가듯, 그의 자의식은

미지의 세계, 빛이 닿지 않은 어딘가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막 빛이 희미해져가는 늙은

혜성처럼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그 일말의 희미한 빛은 적어도 그에겐 허무하지

않았다. 태양계의 경계점으로 뛰어가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싸구려 믹스커피를

마시려고 주방으로 뛰어갔다.

햇살이 방 안 가득 비추어 그에게 빛의 꼬리를 선물해 주었다.

 


 


그가 대학 세미나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였다.

막 커피를 다 휘젓고 입에 대려 하는 순간 교수가 들어왔다. 적당한 키에 훤칠한 외모,

어울리는 슈트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나이는 많았지만 젊어서 한 매력 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저도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럼 논문 컨펌을 시작하겠네.”

교수는 의자를 뒤로 쭉 뺀 뒤 앉아서 그의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깐깐하게 훑는 게 굉장히

감명 깊게 읽고 있단 확신이 들었다. 교수의 성격상 맘에 들지 않는 논문은 바로 내쳐버린다.

그는 잠시 허리 운동도 할 겸 창가로 향했다. 5층이라 그런지 전망이 확 트이고 참 좋았다.

울긋불긋 화사했던 은행나무들도 이젠 말라 비틀어져 앙상하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저

평범한 겨울의 그것인데, 마음속으로 보는 풍경은 사뭇 달랐다. 칼바람이 더욱 매몰찰수록

사람들은 옷깃을 꽁꽁 여미는데, 나무는 옷을 훌훌 벗어버린다. 눈을 감았다. 여름의 생기로운

풍경이 어둠을 스쳐 지난다.

음 잘 보았네. 중성미자의 관성모멘트에 대한 이론은 훌륭했어. 이번에도 자네 논문 덕을

좀 봐야 할 듯 싶구만. 크하하하하. 오늘 저녁 8시에 술 한잔 사겠어. 어떤가?“

오늘 8시에 약속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나중에 신세 한 번 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나야말로 항상 신세를 졌잖는가. 자 이제 수업에 늦지 않게 슬슬 가봐.”

 


문 밖을 나서니 문 밖에서 미처 들어오지 못한 찬 기운이 그의 볼을 때렸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중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없어보였다. 모두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왁자지껄했다. 그는 꽉

조여진 손목시계로 시간을 보았다. 아직 수업까진 7분이 남아있었지만,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로 향하지 않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옥상으로 향했다.

 


.”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팔을 콕 찔렀다. 배시시한 헤어 스타일을 하고 오래된 회색 니트를 입고 있는 한 사내였다.

정우야, 어디가냐?”

잠깐 옥상에 좀.”

미안한데 나 이번 조별 프로젝트에서 좀 빼주라. 워낙 집안 사정이 바뻐야 말이지.”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며 시선 처리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 거짓말 한다는 것을 뻔히 티내고 있다. 하지만 원래 조별 프로젝트는 나 혼자 다 하는 편이어서 이번에도 허락했다.

고맙다. 진짜. 나중에 보자~”

 


그는 정우의 동기생인 강우다. 학교에서 그나마 친하다는 맥이지만, 여전히 정우에게는 낯설고 멀기만 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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