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른바 ‘사회성이 좋다’는 평을 듣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람들, 그중에서도 그런 말을 자주 듣는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는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 의견이 없다. 누군가 어떤 주제를 꺼내더라도, 그것에 대해 자기 관점에서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피드백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대신 “맞아, 진짜 그래~”, “헐, 말도 안 돼~” 같은 감탄사 섞인 반응이 자동적으로 돌아올 뿐이다. 이런 반응은 깊이 있는 사고를 거친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감정을 반복적으로 내뱉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람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리액션을 반복하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들의 언어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정형화돼 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요즘은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래도 그건 선 넘었지~”와 같은 말은 누구나 알고 있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말들엔 진짜 ‘자기 생각’이 없다. 그저 비난받지 않을 말, 무난하고 당연하게 들릴 말, 정답처럼 보이게끔 설계된 표현일 뿐이다. 나는 대화를 계속 이어가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사람의 실체는 끝내 안개 속에 가려져 있고, 무엇을 믿고 관계를 맺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껍데기는 있는데, 그 안에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피곤한 이유는 그들이 말은 많이 하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지만, 아무도 서로에게 깊어지지 않는다. 나는 상대방이 어떤 입장을 취하든 괜찮다. 나와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 관점에서 이야기해주기를 바란다. 그 사람이 진짜로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그 사람만의 언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지만 이들은 대화를 통해 나를 이해시키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대화는 가볍게 흘러가고, 말은 많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여성에게 더 강하게 주입된다. 물론 모든 여성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예쁘게 말해”, “화를 내면 안 돼”, “분위기 깨면 싫어해” 같은 말을 듣고 자란 여성일수록, 자기 감정이나 판단을 드러내기보다 검열하는 법부터 배운다. 그 결과, 누군가 친구에게 명백히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래도 걔 입장에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뉴스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봐도 “아 진짜 세상이 왜 이러냐…”라는 한 마디로 감정을 봉합하며 넘어간다. 누군가 명확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래도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익숙하다. 이들은 갈등을 피하는 법, 모두가 불편하지 않도록 반응하는 법, 누군가의 눈 밖에 나지 않는 법만을 배운다. 공감은 넘치지만, 생각은 없다.
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자체에 큰 이질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는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을 선호한다. 회식 자리에서 윗사람 말에 무조건 “맞아요”라고 반응하고, 단체 안에서 튀지 않으며, 누구 말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리액션만 잘하는 사람이 ‘사회성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의에서도 “제 생각에는요…”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다들 그렇게 하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유능하고 원만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렇게 ‘문제없는 사람’, ‘리스크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두가 스스로의 감정과 사고를 지워간다. 그 과정에서 대화는 무의미한 리액션의 축제가 되고, 관계는 얇고 피상적으로 흐른다.
이런 풍조는 개인의 일상뿐 아니라 사회적 사건에서도 반복된다. 2019년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노 재팬(No Japan)’ 운동을 기억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일 강경 정책과 언론의 선동 아래,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은 하나의 사회적 신념처럼 확산됐다. 일본차는 테러를 당하고, 유니클로는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본 맥주는 매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많은 사람들이 SNS에 불매 인증을 올리며 의식을 표출했고, 그 감정은 마치 시대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열정은 온데간데없다. 유니클로는 다시 매출 상위를 차지하고 있고, 일본 여행은 다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일본 위스키와 맥주는 품절 대란을 일으킨다. 그 많던 불매 인증은 어디로 갔을까. 그때의 분노는 도대체 무엇이었나. 나는 이 질문의 핵심에 역시 ‘자기 생각 없음’이 있다고 본다. 어떤 신념이나 판단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 분위기와 언론의 프레임에 반응했기 때문에, 그 흐름이 지나가면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반대 방향으로 말과 행동을 바꾼다. “일본은 나쁘다”는 말에 “맞아, 너무해”라고 반응하고, 분위기가 바뀌면 “요즘 일본 진짜 좋더라, 여행 가고 싶어~”라고 말한다. 두 말이 논리적으로 충돌한다는 자각조차 없다. 그래서 이 사회는 기억도 없고, 책임도 없고, 신뢰도 없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집단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그렇게 무책임하지는 않다. 미국은 과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의 군사적 협력을 기억하며, 지금까지도 외교적으로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일본은 ‘명예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문화’가 여전히 작동하며, 서구 사회에서는 정치인이나 시민이 과거 발언과 충돌할 경우 강한 사회적 비판을 받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중성과 비일관성이 너무도 쉽게 용인된다. 급기야 어떤 사람은 “그땐 그럴 수 있지, 지금은 또 지금이지”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이 충돌한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긴다.
이처럼 자기 생각이 없는 사회는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휘둘리고, 그때그때 편한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며, 결국 어떤 말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의 진심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은 지워져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 진심도, 성찰도, 책임도 없이 소모되는 감정만이 남는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많아도 믿을 수 없고, 행동은 보여도 신뢰할 수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점점 더 이질감을 느낀다.
튀면죽는다 개돼지들 세상에선 항상 통용되는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