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효녀 심청’ 이야기를 미담으로 받아들이는 시각과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함께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과거에는 그것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겨졌지만, 점차 시대가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효녀 심청’은 오히려 문제적 이야기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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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는 이 이야기를 순전한 미담으로 접하며 자랐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청소년 세대는 이 이야기를 교훈보다는 도덕적 강요, 가부장제의 상징, 자식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보는 시각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고, 양쪽의 관점을 동시에 보며 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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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봐도, ‘자신의 시력을 되찾기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치는 아버지’의 행동이 정당화되고, 그에 순응하는 것이 미덕으로 포장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런 서사가 “가족을 위한 희생”, “부모에 대한 절대적 효”,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장려되었고, 결국은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도덕규범을 주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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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에서 동화와 교훈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인간상을 내면화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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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플라톤이 경계한 건, 시나 이야기가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비판 없이 이상적인 삶의 모델을 수용하게 만든다는 위험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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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교훈은 때로는 삶을 감동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억압적 구조를 도덕의 언어로 포장해 숨겨버리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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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약, 내가 노년층이 되었을 때는 어떤 이야기가 ‘미담’이 되어 있을까? 노인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해 젊은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이야기가 동화로 만들어진다면? 그 이야기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늙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길이라고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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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몸도 불편하고, 가족들은 힘들어했죠. 그래서 할머니는 조용히 산으로 올라가 눈을 감았어요. 그 후 가족들은 평화롭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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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반복된다면, ‘존엄사’라는 방식의 ‘자발적 소멸의 미덕’이 사회의 도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율성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희생의 강요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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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화의 교훈은 종종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형을 재생산하는 수단이 된다. 예전엔 부모에게 헌신하는 자식, 지금은 국가에 헌신하는 청년, 미래에는 자신을 포기하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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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와 교훈이 ‘아름답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반드시 자문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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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속에서 누가 희생당하는가?
그 희생은 스스로 선택된 것인가, 아니면 강요된 것인가?
그 희생으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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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 없이는, 우리는 언제든 또 다른 ‘심청’이 되고, 또 다른 ‘가난한 노인’이 되어 미담으로 희생당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교훈은 의심받아야 하며, 모든 동화는 시대적 목적을 내포한 정치적 언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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